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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Sep 25. 2018

중요한 말은 입 안에 있다

영화: 어느 가족(2018,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일본 영화는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다. 할리우드 영화나 한국 영화가 대체로 기승전결이 명확하고 흐름이 선명한 작품으로 많이 대표된다면, 일본 영화는 유럽 영화처럼 스토리의 흐름보다는 느낌으로 기억되는 것들이 더 많은 듯한 이미지가 있다. 개중에 덜 그런 것들이 <지금 만나러 갑니다>처럼 국내에서도 유명세를 타는 정도? 그러나 몇 년 전부터 고레에다 히로카즈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너무나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영화는 언제나 한 편만을 언급하기보다 전체를 묶어 생각하게 된다.


  늘 가족이라는 소재에 집중했고, 이제는 고인이 된 키키 키린을 비롯해 많은 배우들이 그의 영화에 겹쳐 출연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영화들은 일직선 위에 병렬로 놓여 있는 느낌을 준다. 다만 그의 가족 이야기는 훈훈하게 둥실둥실 떠 가는 게 아니라, 주제에 비해 너무나 차가운 소재들을 사용한다는 게 특징이다. 하나하나 언급하는 게 의미 없을 만큼 그는 늘 가장 냉랭한 사건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 초연한 태도로 가족을 담았다. 영화에서 구구절절 언급하지 않은 따뜻함은 관객의 몫으로 남겨두며.



※ <어느 가족>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는, 그럼에도 아베 총리가 축하 메시지도 남기지 않았다고 논란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남겼다. 아베 총리의 태도가 너무나 밴댕이 속알딱지라는 생각을 금할 길이 없다만... 그 이유를 굳이 찾자면 고레에다 영화에 담기는 냉랭한 소재들에는 일본 사회의 어두운 면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사실 뭐 딱히 일본만의 문제도 아닌 것 같은데 뭐가 찔렸는지. 외면하는 게 더 없어보인다.


  아무튼 국내에 “어느 가족”이라는 중화된 제목으로 개봉했지만, 국내 배급사가 제목을 정하기 전까지 칸 영화제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기사에는 늘 “만비키 가족”이라는 원제 그대로 쓰여 있었다. 만비키(万引き)는 좀도둑이라는 뜻이며, 영화 속 “어느 가족”은 정말 좀도둑 가족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콤비를 이루어 마트에서 물건을 훔치면서 시작되어, 이 영화의 인물 관계도는 점점 가관이다. 할머니 연금에 기대 사는 일가족이라니. 그런데 그렇다고 가족들이 일을 않는 것도 아니다. 남편이 일용직 노동자로 일을 가거나 아내가 세탁소에 일 나가는 모습도 나오고 심지어 “이모/처제” 포지션의 아키는 성매매 업소까지 나가지만, 그럼에도 연금과 좀도둑질은 이들 가족의 주요 수입원이다. 이들은 거기서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종내에는 지나갈 때마다 베란다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여자아이까지 “좀도둑질”해 오면서 이들의 가족은 또 한 명 늘어난다.


  가닥가닥 살펴보면 볼수록 이들을 가족으로 묶어준 끈이 무엇인가 의문을 갖게 된다. 이들은 어느 누구 하나도 평범한 경로로 가족이 된 이가 없다. 출산은 물론 정식 입양까지 포함하여 일반적으로 가족을 이루는 어떤 끈 하나도 갖지 못했다. 오히려 악연으로 정리될 수 있는 선으로 연결된 이들조차 있으며 가끔은 그런 감정조차 집안에서 맞부딪친다. 그럼에도 영화를 보다 보면 이 “어느 가족”이 언제까지 행복할 수 있을까 기대하게 된다.


아이들을 보면 <아무도 모른다>가 생각나서 자꾸 흠칫하게 되지만...


  혈연도 법적인 절차도 없었던 이들은, 세상이 이들을 가족이라 부를 만한 근거 하나도 갖지 못한 이들은 분명 하나로 이어져 있다. 끈끈하다기엔 엉성하고, 느슨하다기엔 복잡하다. 이 영화에서는 안도 사쿠라의 입을 빌어 “키즈나(絆)”라는 단어로 정리한다. 굴레를 뜻하는 한자를 쓰는 이 단어를 사전에서는 “끊기 어려운 정이나 인연, 유대, 기반”이라 설명한다. 운명에 가까울 정도로 깊이 매여 있는, 도무지 떼어낼 수 없는 무언가를 가진 이들이 가족이 아니라면 대체 어떤 이들을 가족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들은 서로를 소중하게 대하는 방법을 차근차근 알려준다. 그 안에서는 자신들이 받고 싶었던, 응당 받아야 했던 대우가 어떤 것이었는지도 아른아른 비친다. 이들은 모두 사회의 절벽에서 굴러 떨어진 사람들이다. 남편과의 관계가 결코 정상적으로 끝맺지 못한 할머니도, 다분히 “반사회적”인 삶을 살던 과거를 가진 부부도, 조부모 세대의 일에 얽혀서 멀쩡한 집 놔두고 이렇게 살고 있는 아키도 그렇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였던 쇼타, 가정 폭력의 희생자였던 유리도 다르지 않다.


  이들은 현재 사회적 약자이거나 한때 사회적 약자였고,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채로 이렇게 되었다. 그리고 그 굴레 아래 질식하는 대신 서로를 끌어안기를 택했다. 궁색한 삶을 조금이라도 벗어나고자 하는 시작이었든 어째서였든 그렇게 꾸역꾸역 채워 온 하루하루가 이들에게 끊을 수 없는 가족이라는 굴레를 뒤집어씌웠다. 이들은 사회에서는 투명인간에 가까운 계층이고, 이들이 가진 가족의 끈 또한 사회의 눈에는 투명하여 보이지 않는다.

  


  벽지는 누레졌고 군데군데 곰팡이도 잔뜩 슬어 있는 낡은 집, 거의 쓰레기장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신없는 집이지만 이들은 사회에서 슬쩍슬쩍 해온 것들로 이 집을 채우며 자신들의 둥지를 틀었다. 그리고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할머니가 없다면 사라져 버릴 이 둥지를 유지하기 위해 할머니의 시신을 집에 묻고 계속해서 연금을 타려 한다. 그러나 이들이 어려운 상황에 있을 때에는 이들을 보지 못하던 사회가 이들의 범법을 발견할 때는 쉽게도 눈을 부릅떴다. 어떤 사회적 망으로도 묶여있지 않은 이들 가족은 결국 뿔뿔이 해체된다.


그들의 집은 영원히 닫혔다.


    현실은 명확하고 엄준하다. “엄마”를 연기한 배우 안도 사쿠라의 눈에서 흘러내리던, 매우 차가워 보이는데도 매우 뜨겁게 마음에 와 부딪던 눈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똑바로 쳐다보며 낳으면 엄마가 되는 거냐고 묻는 말은 우문 같으나 정곡을 찌르고, "낳아야 엄마가 된다"는 수사관의 대답은 맞는 말 같아도 현상을 하나도 담지 못했다. 그럼에도 현실은 겉보기에 맞는 말로 이루어져야 한다. 가족은 결국 뿔뿔이 흩어지고 각자도생처럼 보이는 길을 걷게 된다. 그 와중에도 그들은 서로를 생각한다. 그 와중이기에 더더욱 서로를 생각한다.


  아이를 납치하고 시체를 유기한 범죄자를 붙잡아 법의 처벌을 받게 하고, 납치된 아이들을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 주었다... 아마 사회는 그 사건의 결말을 이렇게 기록하겠지만, “어느 가족” 입장에서는 갈기갈기 찢긴 셈이었다. 그 가족을 찢는 수사관을 이케와키 치즈루가 분한 것 또한 기분이 묘했다.


  꾸준히 그를 보아 왔다면 그냥 그렇구나 싶었을 수도 있겠으나, 내게 그는 오래 전에 본 몇 작품 이후로 잊고 살던 얼굴이었으므로. 한때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사랑을 잃으면 조개 껍데기처럼 깊은 바닷속을 데굴데굴 굴러갈 자신을 처량하게 말하던, <금발의 초원>에서 이룰 수 없는 사랑 위에 햇살 가득한 환상을 툭툭 덮던 작은 소녀가 이제는 다 자란 어른의 단정한 얼굴로 말한다. 당신들의 굴레는 범법이라고. 당신은 가족이 아니라 범죄자, 가해자라고.



  어린 왕자가 말하듯 가장 소중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서, 때로는 떠난 자리에서 더욱 명확하게 보이기도 한다. 해변에서 가족들의 뒷모습을 보며 할머니가 “모두 고마웠어”라고 말한 장면처럼. 그 장면은 사실 대본에도 없던 장면으로, 나중에 편집할 때에야 보고 깜짝 놀라서 살린 것이라 한다. 촬영 당시에도 암을 앓고 있었던, 그리고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배우 키키 키린의 말인 것만 같아서 더욱 마음에 짠하게 와 닿는다. 오랜 세월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에 출연한 그이기에, 정말로 삶의 마무리 단계에 서 있던 그이기에 매우 옅은 미소였음에도 그가 떠난 지금 그 미소가 더욱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말은 이따금 속에서 넘쳐 터지듯 나오지만 또 어떨 때는 너무 가볍게 흘러나오기도, 너무 무거워 나오지 않기도 한다. 사랑... 기표와 기의가 이토록 멀찍하니 떨어져 있는 단어가 또 있을까? 이 영화에서도 서로 사랑한다는 의례적인 대사 같은 건 나오지 않는다. 보통의 가족이 다들 그렇듯, 이들 또한 가장 중요한 말은 입안에만 머문다. 영화 내내 아빠라고 한 번만 불러줬으면 하는 “아빠”의 바람에 끝끝내 고개 젓던 아들이 버스 차창을 바라보며 입속으로만 아빠라고 불러 보듯이. 하루 다 같이 놀러 간 해변에서 신나게 노는 가족들을 바라보며 할머니가 모두에게 고마웠다고 입으로만 말하듯이.



  피가 같으니 가족이라고만 하기엔 가족들 사이에서 너무나 끔찍한 일이 많이 일어나는 시대다. 가족을 가족답게 하는 것은 과연 혈연일까? 법적 관계일까? 아니면 서로를 붙잡는 마음의 끈일까? 누가 이들을 쉽게 비난할 수 있을까? 절벽 끝에 내몰려 서로를 붙든 것이 잘못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영화를 보며 나는 어쩐지 이와이 슌지 감독의 <립반윙클의 신부>에서 그려진 가족의 모습이 생각났다. 피가 통한 진짜 가족은 받아들여주지 않은 무언가를, 연극하듯 가족 배역을 맡은 이들이 오히려 받아들여주는 모습이었다. 따뜻한 빛을 풍성하게 쓰면서도 종종 유리알처럼 차갑고 단호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이와이 슌지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매우 대조적이면서도 종종 어딘가가 겹친다. 일본 영화계를 하드캐리하는 이름들이 나란히 가족의 의미를 묻는 건 (그리고 그 모습을 아베 총리가 매우 티나게 외면했다는 건) 생각해 봄직한 일인 듯하다.


  가족이라는 이름이 놓여야 할 자리에 있었던 것, 정말 소중하여 보이지 않지만 그렇기에 사라진 자리가 더욱 눈에 띄는 그 무언가를 생각해 본다. 그 자리가 이 영화가 관객에게 남긴 따뜻함의 자리인 것 같다. 이토록 주제 의식이 겹쳐도 자가 복제 소리 한 번을 듣지 않는 거장의 실력도, 배우들의 호연도, 다양한 시사점도... 다 좋아서 감탄을 하며 보았지만, 무엇보다도 감정의 가장 따뜻한 자리는 관객이 직접 채우게 하는 이 영화의 친절한 무심함이 좋았다. 어쩐지 이 영화의 가족들만큼이나 친절한 무심함, 가족이란 건 다 그런 건지 모르겠다. 중요한 말은 입안에 있어 현실에 자리를 내어주곤 하지만 오늘만큼은 입밖에 내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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