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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Nov 11. 2018

머리를 가린 여자들

그 옷자락을 따라서


  책 사는 걸 좋아한다. 만나기로 한 친구를 기다릴 때, 혹은 집에 들어가는 길에 산책하듯 들리는 서점도 좋지만 무엇보다 좋아하는 순간은 여행지에서 책을 살 때다. 무게 때문에 꼭 한 권만 사야 한다고 스스로와 약속한 후 서가를 빙빙 돌다가 내 마음에 꼭 드는 단 하나를 찾아내는 일, 추리고 추려도 덜 수가 없어서 결국 자신과 엉성하게 타협하고 두 권을 집어들고 나서는 길이 얼마나 기쁜지.


  일상인으로서 책을 고를 때와 여행자로서 책을 고를 때는 시선부터 다르다. 당장 읽어야 하는 책이나 내가 확실히 좋아하는 책들에 밀리기 일쑤였던 마음 속 작은 위시리스트가 수면 위로 퐁 떠오른다. 평소라면 굳이 시간을 내기 힘들었던 낯선 것들에 나를 온전히 할애하는 순간, 나는 온전히 행복하다.


  인도 살던 시절에도 즐겨 가던 서점이 있다. 확실히 내게 인도에서 가는 서점은 더 특별했다. 끝없는 더위와 피로에 지칠 때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한 가벼운 소설 하나를 사 들고 와서는 꼭 하이틴 로맨스 처음 보는 십대라도 된 양 빠져들었던 기억, 언제 읽을지 모르나 일단 사 두겠다고 제법 두께 있는 고전을 골라잡고 나온 (그리고 아직도 다 못 읽고 방치한) 기억 등 현실에서 잠깐 발을 떼게 해 준 고마운 순간들이 거기엔 있다. 한 달 짬을 내어, 인도 살 적에 살던 곳으로 여행을 갔을 때에도 잊지 않고 그 서점에 들렀다.


  로알드 달이 유난히 많다는 걸 빼면 딱히 눈에 들어오는 특징은 없는, 평범한 서점이었다. 다만 인도 내에서 가장 인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체탄 바갓의 소설들이 거의 한 코너를 이루고 있다. <세 얼간이> 소설 작가라는 것 외에 한국과 큰 접점은 없는 그이고, 나는 그를 한 번도 읽어본 일 없다. 현대 사회를 사는 여성과 전통 가치관이 부딪치는 내용이라는 그의 소설을 하나 집어들고, 이걸 읽으면 좀 더 인도 사회를 볼 수 있으려나 고민하고 있었다. 서가 한쪽에 잠잠히 있던 책과 눈이 마주친 건 그때였다.


  

  책과 눈이 마주치다니 이상한 표현이지만,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다.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오는 것만 같은 기분에 그 한 권 집어들고 나왔지만,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그 책은 아주 오래 내 책장 구석에서 침묵을 지켰다. 결국 책을 펼쳐든 건 6개월이나 지난 뒤였다. 그리고 한동안 이 책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고등학교 때 칼레드 호세이니의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처음 읽은 날과 비슷한 기분이었다.


  이야기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시작한다. 페레이바라는 여자아이의 유년기부터. 전통 문화와 여러 가지 상징, 의미 아래 놓여져 있는 삶의 면면을 매끄럽게 보여준다. 마치 올올이 다른 색실로 양탄자를 짜는 모습을 보고 있는 기분. 행복과 안정을 찾지 못하고 곡예사처럼 휘청이면서도 쓰러지지 않는 이야기는 이내 페레이바와 아이들 함께의 몫으로 넘어간다. 탈레반 치하의 아프가니스탄에서 페레이바와 가족들은 난민의 삶을 시작하고, 페레이바와 그 아들 살림을 내세워 작가는 현실 같은 이야기들을 보여준다.


  하나하나 말하지 않더라도 실로 괴로운 여정이다. 만나고 헤어지고, 자리를 내어주기도 하고 내주는 자리에 앉기도 하는 여정은 도무지 한 치 앞을 헤아릴 수가 없다. 이야기 마지막에 페레이바와 살림이 무사히 살아 있기나 할는지조차 보장이 없다. 가슴이 쿵쾅거려 스포일러를 찾아보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아직 국내 역서가 없었다.


  숨가쁘게 펼쳐지는 여정에서 유일하게 정적으로, 햇빛 드는 슬로우모션처럼 느껴진 장면이 딱 하나 있다. 어느 난민촌에서 살림이 자기 아버지를 아는 노인을 만났을 때다. 지나간 여정을 돌아볼 여력조차 없는 살림에게, 아버지의 기억조차 희미한 살림에게 노인은 말한다. Maybe your story would be different, 아마 네 이야기는 다를지도 모른다고.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엔딩을 보고 한동안, 스크린 속 무니가 세상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아서 무니가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뭉클했다면. 이 책을 읽고서도 그런 마음이다. 아마 미국의 실질적 홈리스인 무니도, 아프간 난민인 페레이바와 살림도 실존하는 인물이나 다름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이야기 이후의 이들은 행복했으면 좋겠다. Maybe your story would be different, 아마 네 이야기는 다를 거야.




  그리고 나는 이들의 이야기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난민영화제에 가서 시리아 난민을 주제로 한 영화를 볼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 가서 탈레반 치하 아프간을 담은 영화를 볼까 하다가 상영 시간이라는 지극히 현실적 요소를 고려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 갔다. 이 날 본 영화가 넷플릭스에 <파르바나>라는 제목으로 올라와 있는 걸 미리 알았다면 달랐을지도 모르겠지만. 안젤리나 졸리가 총 프로듀서로 참여해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는, 국내 첫 상영이지만 나름 화제작이었다.


  <브레드위너breadwinner>라는 제목으로 상영되었는데, 문자 그대로 밥벌이하는 사람,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는 사람이란 뜻이다. 주인공 파르바나는 아버지가 탈레반 손에 끌려간 후로 남장을 하고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게 된다. 전신을 가리는 부르카를 뒤집어씌우고도 모자랐던지 탈레반은 여성이 길거리 다니는 것을 금했기 때문에, 아직 애티가 남아 있는 파르바나만이 그나마 남장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파르바나와 함께 탈레반 치하의 아프간이 얼마나 비극적 공간인지 보게 된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소개되기는 했지만 이 영화에서 사람들이 페미니즘에 기대(?)하는 어떤 과격한 면을 찾아보긴 힘들다. 그저 인간 보편적인 이야기다. 탈레반 치하를 살던 사람들의 고통이 성별 무관하게 두루두루 들어있다. 다만 탈레반이 여성에게 유달리 더욱 잔인했을 뿐이다. (여성 문제의 현실이란 으레 그렇다. 페미니즘은 이런 현실을 기반으로 한다.)


  탈레반에게 여성이란 집안이 아니라면 무덤에 있어야 할 존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생사가 불분명한 아버지 소식을 수소문하느라 부르카를 뒤집어쓴 어머니와 파르바나가 길을 나섰을 때 탈레반은 부르카 아래로 파르바나의 어머니를 구타했다. <When A Moon Is Low>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탈레반 손에 죽은 남편을 대신해 어린 아들을 앞세우고, 뱃속이 심상찮아 병원을 찾던 임산부 페레이바는 탈레반의 저지를 받는 장면이다. 결국 울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이 장면은, 페레이바의 수난사에서 아주 작은 조각을 차지하는 페이지다.


  아프간 문제의 비극성은 아직 우리를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니어서, 어느 이야기를 봐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같은 건 없다. 아직 역사의 먼지 아래 잠들지 못한 현재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들이라, 너무 비현실적이 되지도 과하게 처참해지지도 않으려 애쓴 이야기의 끝은 모두 어딘가로 통하는 문을 닮아 있다. 이야기는 이어질 것이다.



  그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라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앞 부스에서 책 한 권을 또 사 들고 들어왔다. 어쩌다 집어든 것인데 이번에도 표지에는 차도르를 뒤집어쓴 여성이 있다. 이번에는 이란 여성의 이야기가 담긴 두꺼운 소설 책. 두 번이나 판금을 당했고 지금도 책을 쓰면 검열을 당한다는 작가의 이야기가 너무나 궁금했다.


  가판대의 직원 분께 무슨 내용이냐고 여쭤봤을 때 직원 분은 뭐라 대답할 말을 단번에 찾지 못하셨다. “한 이란 여성과 그 가족의... 이게 좀 긴데... 길어서 읽기 좀 힘드실 수도 있긴 한데... 진짜 좋아요! 진짜 좋아요!” 이야기하시면서도 뭔가 더 표현하고 싶은데 스포일러 없이 한 마디로 일축하기 어려워하신다는 느낌이라, 진심이 물씬 느껴지는 “진짜 좋아요”를 믿고 그 책을 집어왔다. 그리고 나도 곧 그 말을 이해했다.


  여성의 유년기에서 시작해 그 삶의 파란만장한 물결을 기록했으니 내용이 쉬이 요약될 리가. 그러나 한 인물과 한 가족의 이야기 속에 나라와 민족의 역사를 이렇게나 고스란히 녹여낸다는 건 너무나 신기한 능력이다. 어떻게 이렇게 흡입력 있을 수 있는지. 한동안 텍스트에 집중력이 떨어져 있었는데 단숨에 읽어 버렸다.


  아프간의 페레이바와 파르바나에 이어 이란에 사는 마수메의 삶을 듣는다. 읽는 매 순간 충격적이다. 때로는 꽉 죄는 스키니진을 입은 것처럼 답답하고 때로는 바람처럼 자유로운 이야기. 자기를 옭아맨 것들 사이에 살고 있는 새장 속 새 같은 영혼들. 국제정치 책에서 몇 줄로 요약된 사건이 개인의 삶에 보내온 집채 만한 파도들. 이래서 문학이 좋다. 파르바나의 아버지 말마따나 모든 게 잊혀도 이야기는 마음에 남으니까.



  한국 사람들도 그러하지만, 중동 사람들은 참 이야기를 사랑하고 이야기에 강하다. 국내에 가장 잘 알려진 칼레드 호세이니를 비롯한 아프간계 작가들은 오색 실에 감긴 구슬 같은 이야기들을 잘도 자아내 이 먼 타국까지 데려다 준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이런 멀리서 불어온 이야기가 필요하다.


  인도에 살던 시간은 나의 세상을 넓혔다. 어느 새부턴가 나는 나와 전혀 다르게 생긴 이들, 아마도 내가 평생 만나보지 못할 이들의 소식이 뉴스에서 무미건조하게 흘러나올 때 마음 아파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큼직한 불행이 얼마나 개인의 작은 삶을 구차하게 만드는가. 그러나 난민이나 분쟁이라는 단어에 가려졌을 뿐 그들에게도 사실 태고에서부터 이어져 온 이야기를 먹고 자란 고풍스러운 삶들이 있었다. 우리가 듣고 자란 <섬집 아기> 같은 노래가, 우리가 아기 때 덮던 보드라운 이불이나 업힐 때 쓰던 포대기 같은 자락이 그들에게도 있었다.


  보드라운 이불 대신 앞을 보기도 힘든 옷자락으로 그들을 덮는다 해도 그들의 풍요로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머리를 가린 여인들의 이야기가 세상에 더욱 더 알려지기를, 이들의 이야기가 문을 열고 다른 이야기로 연결되기를 더욱 꿈꾸며 나는 오늘도 부지런히 이런 서사의 조각을 찾고 모아 본다.




 소리의 크기가 아니라 내용을 높여라.
꽃을 피우는 것은 천둥이 아니라 비다.

                                    (영화 브레드위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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