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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Jan 06. 2019

적어도 솔직할 권리

현실을 담을 언어의 그릇을 찾아서


   솔직하자. 문학을 좋아한다고 하기가 무색할 만큼 나는 언제나 문학보다는 일상 속 자질구레한 것들에 더 쉬이 매몰되는 사람이다. 부끄럽지만 맨부커 상이라는 단어를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수상했을 때 처음 들었다. 그러니 얼추 이십 년쯤 전에 그 상을 탄 소설이 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아룬다티 로이라는 사람이 <작은 것들의 신>이라는 첫 소설로 부커 상을 탄 1997년, 나는 갓 초등학교에 입학해 교과서나 들여다보고 있었을 터다.


  그러나 아룬다티 로이의 소설은 2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여전히 아주 생생한, 지독하리만큼 생생한 감각으로 찾아왔다. 처음 내게 이 소설을 권한 친구는 "인도에 사는 시리아인 기독교 가정의 이야기"라고만 했고, 당시 내게 "시리아"의 연관검색어는 난민과 내전 외엔 없었다. 빈약한 지식으로는 그게 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그 친구는 인도에서 살았으므로 그렇게만 말해도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한참 뒤에 집어든 이 책은 시리아와도, 기독교와도 무관해 보였다. 오히려 인도의 뿌리 깊은 카스트와 (그러니 당연히 힌두와) 밀접하게 맞닿아 있었다. 그 사실을 보여주는 방식은 결코 친절하지 않았다. 시간과 무관한 순서로 배치되어 있었던 탓이 큰 것 같다. 앞장에서 죽은 사람의 과거가 뒷장에 나온다든지, 앞장에서 현재의 모습을 묘사한 다음 뒷장에서 그 어린 시절의 사건을 서술한다든지 하는 식이라 나는 앞부분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그러면서도 그 문장 하나하나의 깊은 힘을 느꼈는데, 그건 꼭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꽃이 피는 순간이나 벌새가 꿀을 쪼아먹는 순간 같은 걸 전부 담아 슬로우 비디오로 보여주는 것 같은 문장들이었다. 꽃잎이 원래 저런 모양을 하고 있었던가, 벌새는 저런 식으로 날갯짓을 하는가, 하고 낯익으면서도 낯선 것을 아주 집중해 지켜보는 기분.


  그림으로 비유하자면 꼭 옛 왕조에서 전해져 내려온 세밀화를 보는 기분이다. 손바닥만한 그림 속 인물의 눈동자나 옷자락의 금박까지 아주 정밀하게 그려둔 것을 찬찬히 뜯어보는 느낌. 아니면 아주 정교하게 짠 거미줄 같다는 생각도 든다. 같은 문장이 앞에서 또 뒤에서 계속 나오면서 새로운 의미를 보여주고, 인물이 갖고 있는 물건 목록을 일부 서술할 수 있을 만큼 각 개인의 잔뿌리 같은 역사를 다 담아낸 후에야 가장 메인이 되는 사건을 서술하고 있어, 마지막에야 우리는 거미줄 전체를 한 눈에 보며 거기에 압도당한다.


  그렇게 마지막에 거하게 한 방을 얻어맞고 압도당한 나는 이 책을 덮자마자 앓아누웠다. 이틀 동안 잠만 잤다. 이 책에는 누가 어떻게 사랑받아야 하는지까지 다 정해져 있는 카스트의 세계와, 그 거대하고 역설적인 구조 앞에서 무너져 내린 "작은 것들"의 세계가 아주 촘촘하게 드러나 있다. 불가촉천민, 공산당원, 돈 많은 기독교인 할머니, 결혼하면서 외부 세계로 나가려다 실패하고 돌아온 여성과 그 쌍둥이 아이들. 다양한 인물들이 다 현실에서 갓 낚아올린 듯 생생하다.


  내가 <작은 것들의 신>을 읽고 왜 이틀 동안 신생아처럼 잠만 잤는지, 그 이유는 자명하다. 하나는 소설 속 감각들이 너무나 선명한데, 소설에는 너무나 깊은 상실과 역설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것들이, 예리하게 벼린 언어가 칼날처럼 나를 죽죽 그어놓았다. 또 한편으로는 그 상실과 역설이 나와도 간접적으로 연결될 세계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인도에서 사랑한 아이들이, 나중에 경찰이 되고 싶다며 다부지게 웃던 아이가, 그들이 자라서 들어갈 세계였다. 이야기에 나오는 그런 경찰들이 있는 경찰서로, 이야기에 나온 그런 이웃이 사는 마을로, 우리 아이들은 가야만 한다. 그 사실이 새삼 사무쳐 왔다.


  와중에 나는 그 작가의 역량에 소름이 끼쳤다.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게 사회를 담아내면서도 조그만 아이가 가진 색깔 선글라스와 그 노랫가락까지 기억에 선명하게 남기는, 이런 글은 대체 어떻게 하면 쓸 수 있는 것일까. 아룬다티 로이가 고른 단어 하나하나까지 경탄스러웠다. 그리고 궁금했다. 인도 사회에서 어떻게 사는 사람이기에 이런 글을 쓸 수 있는지가.



아룬다티 로이 (사진 출처: https://www.flickr.com/photos/chrisboland/34377975073)

  아룬다티 로이는 인도 사람이다. 인도를 사랑하고 인도를 비판하는 인도 사람이다. 뉴델리에 살면서 구시가지의 사람들을 관찰한다는 그는, 방송 작가로 오래 글을 썼다는 그는, 일상의 구석구석을 다니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세밀하게 캐치한다. 인간에 대한 애정 때문인지 그는 소설 밖에 더 오래 머물렀는데, <작은 것들의 신> 이후 20년 동안 단 하나의 소설도 내놓지 않았다. (2017년에야 신간을 냈다.) 대신 인도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날카로운 펜촉을 가져다 댔다.

 

 댐 건설에 반대하고, 카슈미르 독립을 지지하는 목소리를 내고, 핵 정책에 반대하는 등 인도 정부와 크고 작은 마찰을 빚었다. 중국만큼은 아니지만 인도도 지역 독립에 꽤 예민한 편인데다가, 파키스탄과의 불편한 관계 때문에 핵에 꽤 힘을 쏟아왔던 것을 생각하면 아룬다티 로이의 목소리가 인도에서 환영받았을 리가 없다는 걸 금방 알 수 있다.


사진 출처: https://www.livemint.com/Leisure/sNS5QirpRQnYhWXwv36ovO/


  <작은 것들의 신>의 저자답게 그는 "작은 것들"을 위해서도 목소리를 계속 낸다. 예를 들면 "낙살리즘"을 따르는 이들을 정부가 무력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낙살리즘은 대충 인도 마오주의라고 하지만, 사실 주류권의 공산 정당들과는 또 적대적 관계에 가깝다. 낙살리즘은 사실상 토지 없는 농민들의 모임이었다. 아룬다티 로이가 "인도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로 벌인 전쟁"이라고 정부를 비판한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다.


  독립 후 인도에는 놀랍게도 토지개혁이 없었다. 그냥 안 했다. 토지개혁을 한 곳은 공산당이 세력을 잡은 지역들뿐이었다. 가뜩이나 녹록지 않았던 농부들의 삶이 얼마나 굴러떨어졌을지는 자명하다. 차라리 소작농이 낫지, 지주의 농지에서 일용직처럼 부려지는 신세가 되었으니. 농약을 마시고 자살하는 농부가 그토록 많다는 마음 아픈 현실도 이런 큼직한 구조 위에 놓여있다. <안나와디의 아이들>에서 잘 보이듯, 빈민촌에서 목숨 걸고 하루하루를 살더라도 고향을 떠나 도시 속 슬럼으로 스며드는 이들도 이 위에 있기는 마찬가지다.


  마찬가지로 그러한 구조 위에 놓여 있지만 낙살리즘은 애초에 정부와 싸움도 되지 않는 작은 세력이다. 한 줌도 안 되고 아마 한 꼬집 정도. 그나마도 정치에 관심없는 일반 시민들은 낙살리즘을 테러 단체로 인식하고 있다. 실제로 낙살리스트들이 테러를 벌이는 경우도 있으나, 과연 어디까지를 믿어야 할 지는 알 수 없다.


  예를 들어 오늘자 신문에 "OO 지역에서 군인들이 테러범 낙살리스트들과 교전... 낙살리스트 2명 사살"이라고 나온다면, 과연 그 2명이 정말 낙살리스트였는지 아니면 그냥 산에 기대 사는 동네 사람이었는지 믿을 수 있을까. 한국에서라면 이런 말을 음모론 취급하며 무심히 넘기겠지만... 인도에서 보고 듣고 읽은 것들이 내게 가르쳐준 사실은, 힘 없는 이들의 죽음을 둘러싼 사실 관계는 종잇장에 써 있는 대로만 믿을 수 없는 때도 있다는 것이다.


  나보다 더 많이 보고 들었을 아룬다티 로이는 정부와 낙살리스트들 사이에서 무기가 쓰이는 상황을 두고 "정부가 국민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다만 아룬다티 로이의 말도 수위가 상당하긴 하다. 대부분이 테러 단체로 인식하는 낙살리스트들을 더러 "이들이 헌법 정신을 수호하려고 하니 이들도 나름의 애국자인 셈이며, 그 헌법 정신을 정부는 날려먹었다"고까지 말했다. 아룬다티 로이 특유의 톡 쏘는 유머인가 싶은데, 반대파에게 먹이 주기 쉬운 발언이기는 하다.


BJP당 모임에서 인사하는 나렌드라 모디 총리. 이들은 아룬다티 로이와는 대척점에 가까운 위치의 사람들이다.


  현재 인도를 이끄는 모디 총리와 BJP당은 "모든 인도 사람은 힌두교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극우파니까 이런 아룬다티 로이가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다. 물론 아룬다티 로이 눈에도 그들이 곱지 않기는 매한가지여서, 나렌드라 모디가 후보에 올랐을 때 이미 "비극"이라 평한 바 있다. "너무 군사적이고 공격적인" 후보라는 것이 이유였다. 그 평 값을 하려는지 공영 뉴스에서 아룬다티 로이를 더러 "인도를 깎아내리는 사람"이라며, 아룬다티 로이는 인도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카랑카랑한 앵커 소리로 비난을 던진 적도 있다. 어쩐지 좀 우습고 유치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룬다티 로이는 계속 쓴다. 그의 펜끝은 인도 내에만 머물지 않는다. 가까운 스리랑카 정부에서부터,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정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건과 상황에 "작은 것들"의 목소리를 냈다. 특유의 감각적인 문장들을 총동원해 얼마나 힘있는 소리를 내는지, 마치 아룬다티 로이 자체가 "작은 것들의 신"이 되어 소설 속에서 못 다 펼친 것들을 풀어내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렇게 <작은 것들의 신> 이후 20년이 흘렀다. 아룬다티 로이는 작은 것들의 이야기를 또 하나 세상에 내놓았다. The ministry of utmost happiness. 아직 국내 출판 전인 이 소설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카스트를 비롯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엄격하게 그어진 선과, 그 선의 애매한 위에 서 있는 이들의 삶을 그려냈다 한다. 아직 다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인도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에 카스트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는 그의 인터뷰를 보니 이번 소설도 나에게 펀치를 날릴 것 같다.


  그 간디조차 카스트를 옹호했다는 아룬다티 로이의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따지고들면 간디도 비판 받을 거리가 수두룩 빽빽이다. 인간은 다면적이니까.) 그 정도로 항상 날선 비판을 해온 그가, 비판의 힘을 의심하며 소설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내게 얼마나 큰 힘을 주는지 모른다. 물론 그의 말마따나 그 비판의 시간으로 인해 이 소설도 존재하는 것일 게다.



  이야기를 엮고자 하는 사람은 어두운 현실에 침잠해야 한다. 이야기를 보고 듣고 그 근처를 서성거려야 하고, 거기서 느껴지는 희로애락을 자기 안에서 폭포수처럼 쏟아내야 한다. 신병 앓는 무당처럼 깊숙하게 앓은 후에야 그것이 이야기라는 정수로 맺혀 나온다. 따라서 모든 이야기는 어느 정도 자전적일 수밖에 없다. 근처를 서성거리다 보면 결국 내 안으로 녹아들어 원래의 내 세상과 융합되고 그렇게 넓어진 세상이 소설에 아른거리기 때문이다.


  <작은 것들의 신>을 "어느 정도 자전적"이라고 평하는 글이 많은 것도 그래서가 아닐까. 아룬다티 로이는 등장인물과 같은 고향, 같은 언어에서 자랐고 대학에서 같은 것을 공부했다. 더욱 속속들이 들여다보면 볼수록 "자전적 요소"가 더 많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작은 것들의 신>을 자전적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이건 아룬다티 로이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한 인간 군상들을 그린 세밀화라고, 그렇게 믿는다.


   그가 엮어낸 문장이 맞닿은 현실을 생각하고, 아룬다티 로이의 인터뷰를 찾아보고, 그러는 동안 내게는 그런 의문이 들어찼다. 부지런히 글을 쓰는 한 사람의 생애란 어떤 것인가. 한 사람의 삶 끝에는 어떤 글들이 남는가. 결국 한 사람 평생의 문장을 다 모아보면 그가 애정을 가지고 관찰한 것이 남는 게 아닐까.


  존 버거가 쓴 문장처럼 "어떤 시인도 한 편 이상의 시를 쓸 순 없"으며 이는 "평생 걸리는 일"이다. "본인은 짧은 시들을 여러 편 쓰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것들도 모두 긴 시 한 편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본다.


  그런 시선으로 아룬다티 로이를 보면 그가 사는 복잡한 인도 사회의 다양한 관계들이 보인다. 그런 사회이니 문장과 문장이 연결되어 결말로 갈수록 눈사태처럼 나를 덮어 버리는 것이다. 한 사람의 힘 같은 건 도무지 쓸 데가 없어 보일 만큼 거대한 관계망으로 짜인 사회 구조 앞에서, 그는 용감하게 문장의 화염병을 투척한다. 헌법에서 없앴어도 살아 숨쉬는 카스트라는 괴물에게, 스스로의 이득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동일하게 짓밟으려는 누군가에게.


  아직 살아 변화무쌍할 누군가를 더러 좋아하고 기대하는 작가라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그럼에도 아룬다티 로이를 좋아하고 그에게서 앞으로 나올 문장들도 기대된다고 말할 수 있어 기쁘다. 동의하는 부분도,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많은 그의 생각들을 들어볼 수 있어 기쁘다. 적어도 솔직할 권리가 계속해서 주어지는 사회에 그가 살기를, 또 내가 살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런 사회에서 그가 길어올릴 이야기가 여기까지 무탈히 전해져 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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