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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Jan 20. 2019

차가운 기적과 뜨거운 외면

영화: <가버나움> (2018, 나딘 라바키 감독)

가끔은 현실이 영화보다 더 극적이다.

그리고 영화 <가버나움>은 그 경계에 서 있다.


* 스포일러 없습니다. 메인 예고편 정도의 내용만 들어 있어요.


  10월에 큰맘먹고 부산에 가겠다 결심했던 건 순전히 이 영화 때문이었다. 몸져 눕는 바람에 가지는 못했다만, 칸 영화제에서 15분의 기립박수를 받았다는 명작을 놓칠 순 없어서 개봉을 기다리고 또 기다린 끝에 시사회를 다녀왔다. 비록 너무 앞 열에 앉았다가 핸드 헬드 카메라에 멀미가 나서 중간에 나오긴 했지만, 그래서 결말을 보려면 개봉을 기다려야 했지만 괜찮다. 이런 영화는 천천히 다가와줘도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 이런 현실에 비하면 훨씬 빨리 오고 있는데, 까짓거 못 기다릴까.


  <가버나움>을 포털에 검색하면 시놉시스에 어떤 구구절절한 이야기도 적어놓지 않았다. 열두 살 소년이 "부모님을 고소하고 싶어요.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으니까요."라고 했다는 아주 간략한 문장 하나만 툭 던져놓았을 뿐이다. 마치 <이방인>의 첫 문장 ("오늘 엄마가 세상을 떠났다. 아니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같은 기분이 드는 문장이다. 그러니까 그게 어떤 느낌이냐고 묻는다면, 굳이 설명하지 않고 그 몇 단어만 던져도 들은 사람으로 하여금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문장.



  게다가 조목조목 깊이 따져볼수록 문장이 낯선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열두 살"이 추정치다. 열두 살을 추정한다니 한국에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한국에서 그런 건 보통 동물병원에서 한다. 길고양이를 우연히 집에 데려오게 될 때 동물병원에 데려가면 입을 열어 이빨을 보고 나이를 추정하는 것이다. 고양이한테 하듯이 그렇게 소년의 유치와 영구치를 보며 나이를 추정한다. 게다가 소년은 열두 살이지만 세파에 지쳐 버린 성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나는 저런 얼굴을 한 아이들을 본 일이 있다.


  내가 저런 얼굴을 한 아이들을 본 건 인도 북부의 한 슬럼에서였다. 보통 외국인을 보면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거리며 신기해하거나, 경계 어린 눈으로 먼발치서 지켜보거나 하는 게 아이들의 일반적 반응이었는데, 슬럼의 아이들은 세상 다 산 것 같은 얼굴을 하고 허공만 멀거니 보고 있었다. 마치 거울에 비춘 무언가를 보듯, 나를 전혀 인식하지 않은 모양새였다. 그 아이들에겐 세상에 흥미로운 것도 기대하는 것도 없어 보였다. 새로운 일이 닥쳐와봤자 그건 또 하나의 불행일 뿐이었던, 그런 세월을 오래 살아온 이들이 으레 하는 눈빛이었다.


주인공 자인


  주인공 자인이 하고 있는 그런 얼굴을 평범한 아역 배우를 데려다 시키기는 어려웠을 터다. 그래서 이 소년은 배우가 아니라 주인공 자인 역할이 하는 일을 실제로 하며 살아온 어느 거리의 소년이란다. 아마 자인이라는 주인공 이름도 이 소년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것인 듯하다.


  영화에 담긴 것 못지않게, 아마 그보다 더 거친 현실을 살았을 아이는 그래서 생활력이 강하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무니가 마치 누워서도 자라는 나무처럼, 현실에도 굴하지 않는 해맑음을 보여주었던 것과는 대비된다. 가난의 결도 나라마다 다른 것 같다. 여긴 누워서 자라는 나무조차 없다.



  영화는 자인이 부모를 고소하게 되기까지, 결코 길지 않았던 그의 생애의 일부분을 보여준다.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고 그냥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하나 무겁게 다루는 소재들이 너무나 휙휙 스쳐간다. 예를 들면 잠깐 나왔다 사라지는, 주연은 물론 조연도 아닌 아이는 시리아 난민이다. 또 부모의 보호를 잘 받지 못하는 어린 여자아이를 노리는 음험한 시선이 대사 하나로 슥 왔다가 자인이 쫓아내면 슥 사라진다.


  여기 이런 문제가 있고, 저기 저런 문제가 있다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시선은 없다. 너무 자연스럽게 있기엔 너무나 무거운 문제들이 너무나 만연해 있다. 아니 너무 무거운 문제들이 너무나 만연해 있어서 너무 자연스러워 보인다. 레바논의 작은 집에서 나고 거의 거리에서 자란 자인을 둘러싼 문제들은 대개 그렇다. 숨은 그림 찾기처럼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크고 작은 문제가 보일 때마다 경악스럽지만 그건 영화의 줄기가 아니라 배경이다.



    모든 영화는 다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담지만, <가버나움>은 그냥 이 영화의 존재 자체와 영화를 만들어온 방식까지 모두 감독이 세상에 던지는 직구 같은 기분이다. 자인뿐 아니라 영화의 주요 등장인물들은 다 원래 배우가 아니고, 실제 영화 속 인물과 비슷한 현실을 딛고 살아온 이들이다. 모든 영화가 다 현실을 비추지만 이 영화는 특히나 현실 어딘가와 긴밀히 맞닿아있다. 이 영화는 그렇게 극장의 우리를 현실의 우리로 데려온다. 현실의 그들에게로 데려온다.



 영화는 초반부터 거리의 모습을 상당히 많이 보여준다. 가본 적도 없는 낯선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보고 있는데 묘하게 눈에 걸리는 게 있었다. 하얀 십자가였다. 제대로 봤는지 모르겠지만 하얀 네온사인 십자가처럼, 꼭 서울 어딘가에서 보는 그런 십자가처럼 보였다. 의식하고 보니, 도시나 거리를 원경으로 보여줄 때 십자가가 화면 한쪽에 걸려있는 장면이 꽤 많이 보였다.


  "가버나움"이라는 제목 자체가 성경에 나오는 지명이다. 많은 기적을 본 곳, 그럼에도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는 예언을 들을 만큼 회개하지 않았던 곳. 그래서 기적과 범죄가 공존하는, 혼돈의 공간을 뜻한다고 (검색 결과에 따르면 그렇다고) 한다.



  그 책망으로부터 우리는 과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단편적인 예를 들자면 수많은 NGO들이 지구 곳곳에서 일을 하고, 그 결과 한국에서 "000명이 출생 신고를 하고 스스로의 권리를 찾게 되었어요"라는 문장을 받아보거나, 내 후원아동이 다행히 조혼이라는 단어에 묶여 끌려가지 않고 무사히 학교를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도 하루아침에 모두가 행복해지는 동화 같은 결말은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다.


  나는 그냥 계속 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아동후원이든, 글을 쓰는 것이든, 글을 읽는 것이든. 영화를 만드는 것이든, 영화를 보는 것이든. 오래 전 성경 속 가버나움이 그 많은 기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우리 마음 속 가버나움은 곳곳에서 일어나는 작은 기적들을 기적으로 인식하지 않은 채 기적 아닌 일에 너무 분주하다는 것이 아닐까. 반짝인다고 다 금은 아닌데 우리는 어떤 반짝이는 것들을 뜨겁게 바라보느라 기적을 차갑게 외면하는지. 우리의 뜨거운 외면은 차가운 기적을 지나친다. "가버나움"에는 아직도 수많은 자인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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