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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Mar 25. 2019

분산된 우상도 우상일까

영화: 우상 (2019, 이수진 감독)

  뭐든 맹목이 되면 독이다. 누가 봐도 잘못이거나 범법 행위가 아니라면, 웬만한 중립적인 것들은 대부분 적당 선까지는 다 좋다. 명예욕도 그렇다. 적당히는 있어야 훌륭한 인물들이 죄다 안빈낙도 물아일체 독야청청하지 않고, 개중에 누군가는 좋은 정치인이 되려 할 게 아닌가. 부성애도 마찬가지다. 적당히는 있어야 아들자식 잘 키워낼 게 아닌가.


  그러나 극단으로 날이 선 명예욕이 칼이 되어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고 뼈를 부순다면, 극단의 부성애가 다른 사람들을 (아들의 생애에 아주 작은 접점이라도 있었던 모든 여자들을) 도구로만 취급한다면. 한석규가 분하는 명회와 설경구가 분하는 중식 두 사람은 많이 달라 보이지만 각자의 맹목으로 눈멀고 귀 멀어 있다. 영화는 우상을 좇는 맹목적인, 그렇게 어그러지는 이들을 그린다. 그러나 오롯한 집중을 본질로 하는 "우상"과 "맹목"이란 단어에서 시선이 분산되어 있다면, 그게 우상이고 맹목이라고 할 수 있을까.



*브런치 무비 패스를 통해 감상하고 작성하는 글입니다.


내게 이 영화 통틀어 제일 좋았던 건 캐릭터 포스터다. 여기까진 좋았다.


  한석규의 얼굴은 선악의 스펙트럼 어디 놓여도 안정적이다. 모건 프리먼 대신 하나님을 연기한대도, <살인마 잭의 집> 주인공이 된대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연기하는 명회는 득세만을 위해 달려가는 정치인이다. 얇은 양파 껍질 만한 두께의 선악을 이리저리 뒤척거리다 결국 악으로 거칠게 고개를 튼다. 그렇게 거친 면을 가득 보여주면서도 그는 동시에 우직하다. 교활한 악인보다는 우직한 악인, 그러니 차라리 눈속임이 쉽다. 그는 마치 줄타기 하는 광대처럼 한 발 한 발을 내딛는다. 공중에 들뜬 스스로에게 도취된 채로.

그의 얼굴은 선악의 스펙트럼 어디 놓여도 안정적이다.


  맹목적이긴 마찬가지인 중식 또한 끊임없이 아들을 위해 내달린다. 아들을 신혼여행이라는 가장 달콤한 시간으로 싸안아 데려다 주고도 "더 좋은 호텔로 보냈어야 했다"라고 우는 중식의 얼굴을 보면, 뺑소니 피해자의 아버지인 중식을 보면서 슬몃 비웃음을 짓던 뺑소니 가해자 요한의 얼굴을 보노라면 분명 중식을 향한 안쓰러움도 올라온다.


  중식의 공간은 중식과 닮아서, 분명 빛을 반사함에도 도무지 반짝이지는 않는 공구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고 어디선가 들어오는 원색 조명들만이 난삽하게 희번덕거린다. 그 인생 최대한의 노력이, 아들을 아끼는 아버지 마음이 어찌 가련하지 않겠냐만은... 보고만 있어도 오장육부가 녹아내릴 것 같은 절절한 부성애를 설경구가 연기하는데도 나는 중식과 부남이 안타깝지 않았다. 어떤 약자들에게는 그들도 요한의 뺑소니 같은 존재들이었을 걸.


중식의 공간은 중식을 닮았다.

  안전하게 머물 곳만을 찾아 여기까지 기를 쓰고 온 련화는 거의 히어로물에 출연해도 될 것 같은 놀라운 생존력을 보여준다. 조선족 여성들의 삶에 기구한 일이 많은 걸 보고 마음 아파하면서 만든 캐릭터 치고는 너무나, 너무나 유별나다. 련화도 명회나 중식 못지않게 그악스러운 사람이었다. 차라리 잠깐 나오는 마사지 업소의 여성이 채 터뜨리지도 못하는 설운 울음이 나았다.


  명회나 중식과는 달리 련화는 그의 삶이 제법 설명되는데도, 그냥 자극적인 장면들에 련화가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은 왜 드는지 모르겠다. 생존을 위한 맹목에는 정당성을 부여할 수 없다 친대도... 그 이상의 무언가를 하며 련화는 뛰어다닌다. 련화의 맹목이 단지 생존을 위한 것이라기엔, 한 걸음 더 나아가 뭔가 더 그로테스크한 것이 더해져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 마디로 그의 맹목은 분산되어 있고, 분산된 맹목은 맹목이 아니다. 여기에는 다른 맹목이 덧칠되어 있다. 영화를 작품주의로만 끌고 가는 맹목이다.



  련화를 중심에 둔 이 영화의 "잔인한" 장면들은 부자연스럽고, 이해되지 않는 선상에 놓여 있으며, 그래서 불쾌하다. 푸드 스타일리스트가 정돈해 둔 식탁처럼, 패션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제 오늘 내일 겹치지 않게 때론 의도적으로 겹치게 코디한 옷들처럼, 딱딱 계산되어 놓인 체스 판처럼, 너무 인위적으로 "설계"되어 있는 느낌이다. 왜 소싯적 보던 탐정 만화에서 범인의 특성을 적당히 드러내게끔 하느라 실제라면 절대 안 일어날 사건 모양새를 만들어 놓는 그런 장치들처럼.


  그로테스크한 정서와 장치를 과시하듯 치렁치렁 두르고 있어서, 이 영화를 좋다고 말하기엔 좀 찜찜하다. 맹목을 겨냥한다는 이 영화 자체가 작품주의로 가겠다는 맹목을 보여준다는 느낌이 들어서다. "영화라면, 작품이라면 이래야 한다"는 생각이 영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보다 앞서 있다는 느낌이랄까? 련화의 맹목을 그리다 말고 작품주의를 향한 맹목으로 빠졌다.


  이 영화 얘기하면 열이면 열 나오는 "대사가 안 들린다"는 문제 또한 과연 작품을 관객에게 전달할 의도가 있긴 한 걸까 하는 불쾌한 의문으로 남는다. 어딜 봐도 딕션 좋고 연기력 빠질 것 없는 배우들만 나오는데 대사 알아듣기가 이렇게 힘들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말 나온 김에... 하얼빈인지 연변인지의 낯선 단어들도, 정말 알리는 게 목적이라면 배급사 인스타그램이 아니라 자막에 써줬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렇게 소리를 뭉개 놓는 자체로 뭘 말하려 했는지 모르겠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무리 좋아도 관객에게 전달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인가.


  아무튼 어떤 평론가가 "마음 둘 곳 하나 없다"라고 20자 평 쓴 걸 봤는데, 그 평론가 분은 무슨 의미로 쓰신 말일지 모르겠으나 내 마음도 딱 그랬다. 나는 극 중 인물이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다 역겨웠다. 감정 이입도 이해도 할 수 없는 인물들의 아귀다툼을 보는 게 괴로웠다. 감독이 보여주고 싶었던 건 부조리일까? 부조리한 구조의 모양새였을까?

  그 거대한 부조리,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몽땅 끌어다 모은 자리를 떠받치고 있는 건 명회와 중식을 비롯한 각자의 맹목들이다. 이 정도까지 해야 해? 싶은 련화도, 이 정도까지 해야 하게끔 만든 세상의 크고 작은 사람들도.

  가해자 아버지에게도 의원님 하며 고개를 깍듯이 숙이는 중식의 누이도, 돈밖에는 보이는 게 없는 안하무인 명회의 모친도, 아들을 위해서라면 뺑소니도 뺑소니 아니라고 말하지만 남편의 언행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빨래 바구니를 좀 세게 놀리는 것밖에 하지 않는 명회의 아내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닭의 살을 찢고 닭은 인간의 피를 쪼고, 다시 결국에는 인간 손에 닭 털이 뽑히고 목이 잘리듯이 부조리는 돌고 돌며 서로의 목을 겨눈다. 그런데 이런 상징도 반갑고 재미있기보다는 너무 치렁치렁해서 부담스럽다.


  련화의 발에 왜 주사기를 꽂아야 했는지, 대사도 잘 안 들리는 영화인데 사람을 죽일 때 사운드는 꼭 그렇게 액체 고체 소리 생생하게 다 넣어야 했는지, 하여튼 자극을 과하게 넣었고 그걸 즐기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물론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은 너무 좋아하겠지만, 장치와 상징 같은 건 나도 꽤나 좋아하지만, 인간의 고통과 목숨에 엮인 장치를 과시하는 것 같아, 그게 영화 초반의 메시지와는 일치하지 않는 것 같아 이 영화에서는 불쾌감으로 남았다. 몰라 난 예술가가 아니라 그런가 보지 뭐...

  러닝 타임이 굉장히 긴 데다가 초반의 긴장감은 굉장히 촘촘한데도, 이야기가 산만하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후반 가면서 스토리고 캐릭터고 마구 헝클어졌다는 느낌이다. 이 이야기를 이렇게까지 풀어냈어야 했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초중반과 후반을 갈라 다른 이야기로 뭉쳐도 될 것처럼 딴판이 된다. 스토리 라인을 파악하고서도 개운하지가 않다. 모든 떡밥이 다 회수되지 않아도 그냥 그게 영화가 빚어낸 분위기로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작품도 있는 반면, 뭐야 싶은 것도 있다. 내겐 이 영화가 그랬다. 너무 꼬다가 결국 꼬였는데? 싶었다.



  마지막 장면은 거의 누군가의 꿈이나 환상이래도 그렇겠거니 싶을 만큼, 너무나 상징이라고 느껴지는 장면이다. 정신없던 후반부를 급작스럽게 마무리짓는 느낌이긴 하지만, 인상 깊은 장면이기는 하다. 프롬프터의 한글은 누구에게도 전달되지 않는다. 무슨 말인지 빤한 문장이 한 번 비치지만 그 모양새는 그려지지 않는 그 혼란한 맹목의 한가운데서, 모두가 무대를 보며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곳에서 한 아이만이 무표정으로 핸드폰을 보고 있고 다른 아이는 그 아이를 향해 아예 몸을 돌리고 있다.


  어쩌면 어린아이 같은 무심함과 단순함이 맹목으로 가지 않는 유일한 길인지도 모르겠다. 실제 어린아이조차 그렇지 않은 순간이 많다는 건 차치하고. 과하게 꼬아 놓고 머리를 쓰는 것만이 좋은 작품으로 가는 길은 아니다. MSG 팍팍 친 음식은 그 맛이 있지만, 그렇다고 캡사이신을 위에 대뜸 때려 부을 수는 없다. 소박하고 심심한 음식이 그리워지는 기분이었다. 영화도 치렁치렁한 것들을 조금 거둬내고 말하고 싶은 바를 명확하게 전해주는 영화가 내겐 더 좋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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