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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Mar 31. 2019

시가 천지삐까리다

영화: 칠곡 가시나들(2019, 김재환 감독)


 다큐 영화인 <칠곡 가시나들>에 우울한 장면은 딱 한 컷 나온다. 블랙아웃된 화면에 텍스트로만 표현되는 첫 장면이다. 1938년 일제가 조선교육령을 냈는데, 이때 한국어 교육이 금지되었다는 단 한 줄의 텍스트.


  팔십 줄에 느지막이 한글을 배워 인생 재미가 트였다는 할머니들의 소박한 일상을 담은 영화의 첫 장면 치고는 살벌한 문구다. 그러나 이 한 줄은 할머니들이 왜 팔십 줄이 되어서야 한글을 배우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줄 뿐 아니라, 역사에서 배운 내용을 피부로 살아냈을 할머니들의 삶이 단지 한글을 못 배우는 그 이상으로 복잡다단했으리라는 사실을 전해 준다.



  영화는 경상북도 칠곡군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할머니들은 마을 노인정으로 찾아와 한글을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과 함께 수업을 하면서 난생처음 한글을 배우고, 손주가 쓰는 것과 비슷한 글씨를 써 내려간다.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쓴다. 어린아이들처럼 보이는 글자란 글자는 죄다 읽으려 들어, 세월에 밀려 하나씩 떨어지거나 색이 바랠 대로 바랜 가게 간판들을 더듬더듬 부지런히도 읽고 다닌다.



  왜 전국의 할머니들은 드레스 코드가 다 비슷비슷한 걸까. 하늘색 점퍼에 분홍 꽃무늬 스카프, 휘황찬란한 무늬 상의 위에 무심하게 걸친 조끼 같은 것들은 내가 동네에서 보는 할머니들 옷과 크게 다르지 않아, 분명 처음 보는 할머니들인데도 어쩐지 아는 할머니를 뵙는 듯 정겹다.


  우리 마을 할머니들도, 칠곡 할머니들도 같은 동네 할머니들끼리 친하게 지낸다. 서로 아프면 살뜰히 돌아보기도 하고, 빨래터에 모여 빨래를 하다가도 누군가가 막걸리와 종이컵을 사들고 와서 한 잔씩 노느매기를 한다. 한글 교실 수업 시간에는 선생님이 내시는 퀴즈를 맞추려고 열심히 손을 들고, 급한 마음에 손이 상에 쾅 부딪히면 다 같이 까르르 웃는다. 오답이 재미있어도 까르르 웃는다.



  영화는 할머니들 사이의 오밀조밀한 대화를 장면 장면 배치해 두고, 내레이션 대신 할머니들이 쓴 시를 알맞은 것으로 낭독하여 넣었다. 힘을 꾹 주고 써 내린 글씨들이 화면에 하얗게 떠오르고, 아들을 생각하며 쓴 시부터 몽글몽글한 벚꽃 색이 느껴지는 사랑 시까지 장르도 다양한 시가 흘러갈 때마다 웃게 되기도, 울게 되기도 한다.


  할머니들의 일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바쁘고 생동감 넘친다. 전국 노래자랑 예선에 나가기도 하고, 그 할머니를 따라온 동네 할머니들이 우르르 몰려가 의리 있게 "직관"함은 물론, 본인에겐 이 할머니가 1등이라고 아주 인터넷 소설 뺨칠 명대사를 날리기도 한다.


  명절에 자식 손주들로부터 절을 받으며 흐뭇해하는 모습도 있지만, 도시에 있는 자식의 집에 나왔다가 자식이 기르는 개를 산책시켜 주면서 우리 동네 할머니들 없어서 심심하다고 생각하며 동네 할머니들도 나 없어서 심심할 거라고 시를 쓰는 모습도 있다.


전국 노래자랑 예선 참가하는 한 사람을 위해 관람 여정을 떠나는 할머니들의 비장미

  할머니들의 우정에는 어딘가 묘한 것이 있다. 이는 아직 서른 해 언저리에 와 있는 나로서는 범접할 수 없는 어떤 무게다. 글도 지혜로운 노인이 쓴 글에서는 백발에서만 피어날 수 있는 빛이 느껴져 읽는 사람을 겸허하게 만드는데, 하물며 사람과 사람이 시간을 들여 갈고닦아야 하는 관계는 더욱 그러하겠지. 오랜 세월 고생을 함께 해온 사람들이 서로의 삶에 갖는, 적당히 끈끈하고 적당히 무심하지만 깊은 다정함을 바탕으로 하는 그런 것이 할머니들 사이에는 흐른다.



  영화는 "이 땅의 아름다운 사계절"이라는 부제를 달아도 될 만큼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스케치해 넣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조선 반도에서, 지금은 저렇게 형형색색 아름답게 인생을 즐기고 있는 할머니들의 삶이 녹록하지 않았으리라는 사실은 영화 곳곳에서도 속속 드러난다. 드럼 세탁기가 은나노 살균까지 된 지가 벌써 몇 년이고, 탈수 기능이 보편화된 지가 몇 년인데, 할머니들은 여전히 빨래터에 모여 빨래를 손으로 두드린다.


  시를 쓸 때에도 이름 앞에 '어디 댁'을 꼭 붙인다. 그거 <태백산맥> 정도 되는 시대 배경의 소설에나 나오는 단어들 아니었나, 이름 대신 친정을 붙이는 건. 나 어릴 때나 요즘은 '누구 엄마' 해서 아이 이름을 붙이니까 아직도 엄마의 이름이란 존재는 요원한 거리에 놓여 있지만, 시를 쓰면서도 '어디 댁'이 붙어 있는 게 자연스러운 모습은 90년대에 태어난 내겐 낯설고도 어쩐지 조금 서글픈 느낌이다.



  팔십 줄이 된 할머니들도 그림을 그릴 때는 '울 엄마'를 그리고, 그냥 엄마도 우리 엄마도 아닌 '울 엄마'라고 쓰는구나. 한글 교실에서 할머니들이 그려 줄줄이 걸어둔 각자의 엄마 그림은 그것대로 가슴이 뭉클했다. 예전에 박완서의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처음 읽었을 때, 나이가 예순이 넘었어도 가끔은 엄마를 부르며 울고 싶다는 말을 보고 나는 새삼스러운 충격을 받았는데 그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당연히 나에게 엄마여서, 엄마에게도 엄마가 필요하다는 생각 같은 거 해보지 않았는데 사실 엄마 아니라 할머니가 되어도 엄마는 그립고 필요한 존재라니.


  그런 한편 할머니들 또한 누군가에게 이미 엄마여서, 자식을 향해 편지를 쓴다. 글을 모르는 게 들킬 것 같아 무서운 심정이라 한 번도 가 보지 않았다는 우체국에 이제는 당당하게 가서 편지를 봉투에 넣고, 연습한 대로 주소도 멋지게 쓰고, 침 쓱 발라 우표도 붙여 편지를 보낸다.


  가게의 간판을 읽지 못한다는 것이나, 글 모르는 나를 콕 잡아낼 것만 같아 공공기관에 들어서기 주춤거리게 되는 마음 같은 건 얼마나 생활에 큰 불편이었을까. 가시 같은 불편을 안고도 얼마든지 남들 못지않게 밝고 활기차게 살아왔고, 지금은 더 재미있게 산다는 할머니들을 보면 삶의 지혜는 거창하고 유려한 것들이 아니라 이렇게 소박한 일상에 거한다는 생각이 든다.


  시도 마찬가지다. 할머니들의 표현을 빌자면 정말이지 시가 "천지삐까리"다. 꼭 영근 열매처럼 일상의 사방팔방에 맺혀 있는 시들을 하나씩 톡톡 수확하여 자기만의 색깔로 풀어내 주는 할머니들의 시를 듣고 있노라면, 황현산 에세이나 박완서 소설에서 묻어나는 것 못지않은 문학의 향기가 난다. 노년기까지 삶의 우물을 깊이 판 사람에게서만 느껴지는, 담백하고 웅숭깊은 문학의 줄기가 분명히 있다. 잘 쓰는 것보다 잘 사는 게 먼저라는 생각을, 다정하게 살아온 할머니들을 보며 깊이 깨닫는다.


한글학교 선생님

  할머니들의 모습도 그대로 아름다웠지만, 한글학교 선생님의 모습 또한 아름답고도 존경스러웠다. 한 톤 높은 목소리로 쾌활하게 웃으며 수업을 진행하고, 우스운 소리로 할머니들을 까르르 웃게도 잘하는 능수능란한 선생님이었다.


  에너지 넘치는 밝은 모습을 보이다가도, 할머니들 가정 방문을 갔다가 아픈 할머니를 보고 다정하게 말할 때나, 할머니가 선생님이라고 그려 주신 그림을 받고 조용히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을 보면 밝은 못지않게 깊은 분이구나 싶어서 그 모습 보기만 해도 뭉클하고 좋았다. 나 또한 "이런 분"이 아닌 주제에 "이런 분"이 더 많아야 좋은 세상일 건데, 하는 이기적인 바람마저 조금 품어 보았다.



  길지 않은 영화인데 잠깐 사이에 사람을 이렇게 들었다 놨다 하면서 울리기도 웃기기도 했다. 푸근하고 정감 가고 편안한 영화일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뜻밖의 아름다움으로 가득했다. 스펙터클과는 거리가 멀찍하니 떨어진 "착한" 이야기는 영화관보다는 텔레비전에서 인간극장으로 보는 데에 익숙했는데, 보고 나오니 극장에서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상영관 싸움에 밀려 두 번은 못 봤지만, 아쉬운 대로 우리에겐 IPTV와 N스토어가 있으니 어찌어찌 다운로드 받아서 볼 수 있을 거다.



  나는 다큐보다는 극 영화를 좋아하고, 쏟아져 나오는 극 영화 보기에도 나의 시간은 늘 모자라다. 다큐 영화를 특히 좋아하거나, 영화를 죄다 보는 시네필이 아니라면 , 이 분주한 현대 사회에서 아마 대부분 나와 비슷한 상황일 텐데... 여기에 동등하지 못한 스크린 분배 상황까지 감안하면, 다큐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발걸음 떼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억지로 시간을 내고 서울 시내 모든 상영관을 다 뒤져 이 영화를 기어코 극장에서 본 건 감독이 CGV를 보이콧했다는 기사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상영 시간표가 폭력적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이제 있을까? 오죽하면 "천만 영화"라는 영광의 타이틀조차 그 빛이 바랬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쭉쭉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하는 게 상영관이라지만, 그래도 관객이 다양한 영화를 볼 창구를 아예 차단하는 정도로 가는 건 문제다.


  <칠곡 가시나들>의 김재환 감독은 상영관을 생색 내듯 찔끔 떼어주는 행동에 반기를 드는 의미에서 아예 CGV를 보이콧했다. CGV 측에서 상영관 내줄 테니 그런 보도자료 내지 말아 달라고 했을 때에는 뒷돈 받고 거래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거절했다고 한다. 자기는 그렇게 넘어가도 이런 작은 영화, 작은 감독들이 매번 그럴 수는 없을 현실까지 고루 감안하여.


  알고 보니 그는 <트루맛쇼>, <쿼바디스>나 <미스 프레지던트>를 통해 한국 사회에서 어떤 사람들이 성역으로 간주하는 곳을 통렬히 찌르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왔던 이였다. 다큐 영화에 관심 없던 나도 제목 정도는 들어보았으니, 싸울 것을 골라 싸움을 거는 그의 태도는 뿌리가 깊은 듯하다. <씨네 21> 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웃으면서도 싸울 수 있는 거라고 말했고, 그 말은 내 마음에 깊이 남았다. 그래, 우리는 웃으면서도 싸울 수 있지.


  이 영화 자체가 그런 "웃으면서 싸우는" 메시지 아닌가. 나이 듦에 대한 공포는 늘 죽음에 대한 공포와 엮여 우리 주변에 있고, 모든 게 휙휙 빠르게 지나가는 사회에서 더더욱 우리는 나이 듦에 깊은 공포를 갖게 된다. 그러나 소박하고 정겹게, 단출하지만 다정하게 사는 할머니들의 일상에선 부드러운 향기가 난다.


  그런 할머니들임에도 많은 걸 누리지 못한 현실 또한 영화는 살짝 짚어 보여준다. 세종대왕이 창제하신 위대한 한글 덕에 성인 문맹률이 0에 수렴하는 이 나라에서, 숫자로 집계되지조차 않아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누군가가 여전히 있다. 할머니들의 인생 첫 영화관 나들이는 본인들이 주인공인 영화였다고 한다.


  영화에서 다루지는 않지만, 할머니들은 촬영하는 동안 감독에게 언제 다 찍냐며 묻고, "다 찍으면 갈 거지?" 하셨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내가 고향에 갈 때마다 드는 마음, 갈수록 휑해져 가는 어떤 곳을 애틋하게 바라볼 때 드는 서글픔이 몰려온다. 서글프지만 따스한, 은은하지만 유쾌한, 이런 이야기야말로 웃으면서 싸울 수 있는 힘을 가진 이야기일 것이다. 깊은 역설을 품은, 시가 그야말로 천지삐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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