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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Nov 19. 2017

서늘한 현실, 한국교회 느와르

영화: 로마서 8:37(2017, 신연식 감독)


  흔한 이야기다. 교회를 배경으로 한 온갖 범죄들. 교회 안팎에서 더 이상 비밀도 아닌 이야기들. 그러나 흔한 사건이라고 충격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교회판 스포트라이트 같은 전개가 펼쳐지는 내내 <스포트라이트>에서는 느끼지 못한 혼란함을 느낀다. 그건 가해자들의 뻔뻔한 언어와 그 언어가 통하는 현실에서 오는 답답함이었다. 그래서 사실 이 영화를 꼭 봐야겠다는 생각 같은 건 별로 하지 않았다. 현실에서도 숱하게 보는 판을, 뉴스에서도 나오는 이야기를 굳이 영화관에서까지 보아야 할 필요 있을까 싶어서였다. 시사회로 모처럼 극장까지 가는 김에 영화 한 편 더 보자고 예매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겉보기보다 울림이 크다.


  보통의 느와르 영화 등장인물들이 총과 칼로 문제에 맞선다면, 이 영화는 그 대신 암전과 텍스트로 문제를 비춘다. 페이드아웃도 아니고 정말 말 그대로 그냥 화면이 툭툭 끊어지는 암전이 영화 중간중간 계속된다. 암전 직후 스크린 중앙에 기본 폰트로 하얗게 떠오르는 간결한 글자들은, 이따금 수첩 속 글씨나 녹취록 목소리를 받아 적은 것일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성경 말씀들이다. 그러나 읽는 이가 “아멘!” 하며 감격에 젖을 일이란 없다. 사실 교회 다닌 지 십수 년인 나는, 한때 감동으로 읽었던 그 문구들이 너무 낯설었다.

  사실 그동안 교회는 언어를 너무 혼탁하게 사용해 왔다. 뭐 원래 사람마다 같은 단어도 다른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 “사랑” 같은 단어는 노래 가사마다 사람마다 의미가 다르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굳이 교회가 언어를 혼탁하게 쓴다고 콕 집어 이야기하는 이유는 교회에선 사전적 정의 없이 뭉뚱그려 느낌만으로 사용하는 단어가 너무 많고, 그러다 보니 단어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기 때문이다. (사이비나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이단들은 대부분 이 흐릿한 경계를 파고들어 의미를 변질시키고 서서히 언어의 팔레트를 뭉개 온통 추한 먹색으로 칠해 버린다. 교회에서 자주 쓰는 말의 의미를 교묘하게 비틀어 사람 심리의 약한 점에 독침처럼 쏘아서는 꼬드겨내는 것이다.)


  교회에서 많이 쓰는 단어들은 개그 프로에서 희화화될 수 있을 만큼 널리 알려졌음에도 그 의미가 사람마다 다른 경우가 많다. 종교의 신앙이라는 영역이 워낙 개인적인 측면이 있어 그렇기도 하지만, 교회가 선명하게 쓰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런 경우다. 성경의 “죄인”과 법전의 “범죄자”의 의미를 흩어 버리는 것. "당신은 그저 범죄자"라는 분노 어린 고함 앞에 “사람은 모두 죄인이지”로 자신의 범죄 행위를 희석시키려 드는 것.



  세상에 존재하는 형법조차 지키지 못하는 이들이 예수의 성품을 가르친답시고 얻은 권위로 타인을 신나게 깔아뭉개는, 너무 끔찍한 이야기를 너무 ‘교회스러운’ 언어로 덮어 버린다. 이 영화에서도 그렇다. 교회 안의 바리새인들은 엄중하게 고개를 끄덕이지만, 사실 이런 이야기는 교회 문턱도 안 넘어본 이들이 더 먼저 알아챈다. 이들에게는 “교회의 언어”가 없기에, 알량한 말로 덮는 수가 더 잘 보이는 것이다.

  언어를 더럽히는 가해자들의 목소리를 듣다가 암전된 화면에 갑작스레 떠오르는 성경 구절을 보면 그 구절이 눈에 안 들어오기도 하고 울컥 반감이 일기도 한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이 교회를 보면서 느낄 분노를 나도 함께 느낀다. 가해자들이 혼탁하게 만든 언어 때문에 성경 구절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고, 그들이 저 말을 어떻게 굴려 이용하는지 뻔히 들리기에 반감이 이는 것이다. 그러나 개의치 않고 영화 내내 성경 구절은 계속 나온다. 암전된 화면, 구둣발 소리나 목청 높인 설교 소리 위로.



  극 중에는 다양한 교회 인물이 나온다. 주인공 기섭은 착실하고 좀 미련할 만큼 둥글둥글한 “교회 오빠”의 전형에서 시작한다. 반면 요섭은 빤들빤들 똑똑하지만 뱀 같은 말로 언어를 갈기갈기 찢고 스크린 안팎에서 다양한 뒷공론을 벌이는 “개독”의 전형에서 시작한다. (스크린 안’팎’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의 죄를 고발하느라 다 보여주지 않았지만 정황상 그가 죄를 감추기 위해 한 것 같은 일이 더 많기 때문이다.) 교회와 목사를 “지킨다”는 말을 계속 쓰는 이들도 있다. 보통 느와르라면 보스 눈치를 보며 서로 칼날 같은 눈빛을 주고받는 참모진 정도의 위치인데, 이들은 자기들의 말 안에 이미 예수가 없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다.

  성경에서 천하보다 귀하다고 했던 한 사람의 영혼을 여럿이나 찢어놓은 교회 내 범죄에 대해 사람들은 각각 다른 양상을 보인다. 처음에는 교회 내 알력 다툼에서 시작하지만 그보다 더 민감하고 잔혹한 범죄들까지 이어지면서 그 다양한 교회 인물들은 각자 다른 반응을 보인다. 범죄를 은폐하려는 자, 범죄를 까발리고 법의 심판을 받게 하려는 자, 괴로워하며 기도만 붙들고 물러나는 자, 범죄를 가만히 지켜보며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려는 자... 그들의 차이는 결국 피해자에 대한 태도 차이다.

  그렇게 다양한 인물들 중에는 “전형적인 목사”의 인상에서 벗어나 있는 한 목사도 나오는데, 내게는 그가 참 인상 깊었다. 그는 김치냉장고가 놓인 작은 방에서 복닥복닥 앉아 설교를 하고, 담배 피우다 활짝 웃으며 반갑게 인사하는 (어떤 "교회"에서는 별로 안 좋아할 인상의) 이웃 여자에게 피우던 담배 맛있게 피우라며 허허 인사를 건넨다. 무엇보다도 그는 생활인이다. 설교하는 장면보다 요리하는 장면이 더 많이 나온다.



  그는 피해자를 위해 애쓰는 기섭 일행을 계속해서 먹이고 있다. 고구마를 찌고, 삼겹살을 굽고, 하여튼 계속 해서 밥상을 차리며 그들에게 먹고 하자고 기운을 북돋운다. 전형에서는 가장 멀어져 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목사다운 인물이다. 강단에서 무례하게 손가락질하고 다짜고짜 이유 없이 목청 높이는 설교가 아니라, 설교 듣는 이들의 상황과 마음을 알고 그들과 눈 맞추며 건네는 설교. 얇은 입술만 남은 게 아니라 일상의 굳은살이 배긴 손을 가진 사람.


  게다가 그는 일련의 상황을 걸출하게 한 마디로 요약한다. “90프로는 밥그릇 싸움이고 10프로는 자존심 싸움”이며, 한국에서 싸움질해 이길 생각이라면 “진영 싸움”해야 한다고. 탁월한 논평이다. 그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려는 이들에게 현실감 없는 비전을 제시하지도 않고, 현실에 누군가 무너진대도 거기에 대해 함부로 혀 차지 않는다.


  뜬구름 잡지도 않고 함부로 정죄하지 않는 것, 그러나 현실에 대한 감각은 더없이 예리한 것. 오늘날 "일부" 한국 교회 목회자들에게 상당히 부족한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교회 언어를 투명하게 정제하지도 않으면서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잃어버린 사람들, 성도들이 교회에 충성하지 않는다며 툭하면 탓하는, 설교하려고 마이크 잡자마자 말투부터 무례해지는 사람들을 똑똑히 본 적이 있기에 극 중 인물일 뿐임에도 그가 참 소중하다. 물론 현실에도 이런 사람들은 있다.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있어 그렇지.



  극 중의 인간들은 상처 입어 갈가리 찢기기도 하고 괴로움에 무너지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는 그들의 감정을 구구절절 나열하는데 시간을 할애하지 않고 냉혹한 현실을 담담하게 표현한다. 등장인물들의 속내는 현실에서 그러하듯 별로 대놓고 티 나지 않는다. 살짝 찌푸린 미간, 겉옷을 벗어 거는 팔의 모양새, 새 나오는 한숨 같은 것에서... 그들에게 무슨 일이 닥쳤는지 다 지켜본 관객이기에 그 허물어 가는 속이 보일 뿐.


  마지막까지 갈가리 찢긴 인간의 기도는 방향을 잃고 절뚝거린다. 그 기도가 관객인 내 마음에 카타르시스를 안겨주진 않는다. 그른 걸 그르다 말했을 뿐인데 그는 여기저기 찔리고 괴로워졌으니. 피해자가 오히려 자신의 죄와 연약함을 말하며 후회를 내비치기도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세상의 법 기준과 달라서 그중에는 관객도 모르고 극 중 인물 마음만 아는 “죄”가 있을 수 있다. 결국 기섭을 공격해 오던 말에도 사실이 섞여있을 수 있단 생각을 했고.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해결책이 있다. 애통하는 자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길 잃은 인간은 서서히 길을 찾아갈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바로 이렇게 찢기고 애통하는 인간들의 기도가 한국 교회에 남은 소망의 출발점이라 믿는다. 그래서 영화가 한국 교회에 대한 애정과 소망을 놓지 않았다고 느꼈다.



  범죄가 범죄인 줄 모르고 자기에게 사명이 있다며, 청춘 드라마 엔딩처럼 한없이 석양을 보고 달리는 인간이야말로 문제다. 정신적 권위를 이용해 피권위자, 즉 저항할 수 없는 상대의 상태와 마음을 뻔히 알면서 폭력을 저지른 자들. 예수는 작은 아이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했는데.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분노의 채찍을 휘둘렀는데. 그 모든 말을 무시하고 되려 큰소리치는 순간이 인간이 가진 교만함의 최고봉을 찍는 순간이다.


  세상의 언어로는 “반성” 그리고 “자기 행위에 대한 책임”, 성경의 언어로는 “회개” 그리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가장 절실히 필요한 순간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한 인간으로 홀로 몸부림칠 시간, 그리고 예수의 용서와 별개로 사회적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법정에서도)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이 있다면 받고 해야 할 일이 있다면 해야 한다는 뜻이다. Amizing Grace가 널리 사랑받는 노래인 이유는 그 작사가 존 뉴턴이 노예선 선장 시절을 “회개”하고 나서 평생 노예 해방과 연결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고, 그 각 사람 사이에서 향기롭게 피어나는 관계가 교회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관계고 사랑이다. "교회"를 부수는 죄는 재물 손괴죄일 수도 있지만 살인죄, 강간죄, 횡령죄 등 다양한 죄명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 영화 속 교회 이름은 부순교회다. 누군가가 부순 교회...라는 생각으로 바로 연결된다. 부순교회 건물 내부는 몇 번 나오나 건물 전체는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부순교회를 보았다. 시선을 떨구는 피해자의 얼굴, 음성 변조한 녹취록에서... 부서진 교회들이 울고 있었다.

  또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현실에 부서지고 있는가. 교회 안팎에서 성토하는 소리가 빗발치는데도 자기들만의 유리벽을 꽁꽁 닫아버린 명성교회의 세습 문제나, 피해자를 오히려 꽃뱀 취급하며 일련의 사건들을 단순히 극복해야 할 역경 취급해 온 이러저러한 목사들을 떠올려 본다.


  영화는 결코 내용을 자극적으로 담지 않았다. 현실에 비하면 오히려 부드러운 톤일지도 모른다. 떠오르는 그 이름들 뒤에 기섭 같은 이들이, 이 영화 속 피해자 같은 이들이 있을 것이다. 때론 분노하고 때론 자책하며, 대답 없는 가해자 앞에서 부사지고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그래서 때로는 그들의 기도조차 방향을 잃을지 모른다.

  그들을 덮으며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이 영화의 제목은, 영화 내내 나오는 그 어떤 암전보다 강력하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로마서 8:37, 이 말씀은 가해자의 비열한 얼굴이 아니라 피해자의 얼굴을 감싸 붙든다. 이런 일에 얽혀들어간 각 사람의 얼굴을, 처참해진 한국 교회의 얼굴을 붙든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에 나온 수많은 성경 구절 중 유일하게, 처음으로 낯설지 않게 느껴졌던 구절이다.




  교회의 입장에서만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 이런 이야기들은 교회뿐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에 있는 이야기들이다. 당하고도 이어질 불이익 때문에 말 꺼내기 어려운 피해자들, 오히려 떵떵거리고 큰소리치는 가해자들. 다른 범죄 기사에는 득달같이 가해자를 욕하는 댓글이 달려도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는데 유독 성범죄 기사에는 "좀 더 지켜보죠", "꽃뱀 아닙니까", "그러게 여자가 몸가짐을 바로 해야지 조신하지 못했네요" 하는 댓글이 밑도 끝도 없이 달리는 현실의 방관자들. 심지어 남자 초등교사가 고등학생이라고 뻔뻔한 거짓말을 하며 초등학생과 성관계를 맺었다는 기사에 달리는 댓글에조차 피해자 탓은 있었다. (별로 볼 가치가 없기에 따로 검색하지 않으시길 바라며 덧붙임. “13살짜리도 문제가 있네요”, “얼마나 발랑 까졌으면...” 따위의 댓글이 있었다. 보면서도 눈을 의심했지만 정말이다. 저 정도의 사건에서조차 가해자 편에 서 있는 댓글이라면 잠재적 가해자 취급 받아도 할 말 없는 거 아닌가 생각했다.)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자세히 서술하지 않았지만 사실 내가 뭐라고 쓰지 않아도 현실에서 더 잘 보일 것이다. 크다는 교회에서 어떤 정치 싸움이 오고 가는지, 교회 내 성폭력이 교회 밖 성폭력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오히려 더 잔인한— 방식으로 얼마나 많이 발생하고 은폐되는지. 그 모든 것 앞에서 우리는 이미 고인이 된, 꼿꼿한 목사 존 스토트가 책에 남겨 놓은 짧지만 강한 말을 기억한다. "사랑이 바라는 것을 정의는 요구한다". 찢기고 애통하고 피 흘리게 싸워야 한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길 것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렇게 어떤 새로운 이야기의 첫 장면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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