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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Feb 25. 2018

B셔터로 찍는 사진

지나간 시공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공항에서 들어오는 길에 고속도로를 탄다.

  2년만의 하이데라바드다.


  처음 인도에 들어오던 밤, 2012년을 마무리하던 그 즈음의 밤을 떠올려 본다. 사위가 캄캄했지만 크리스마스 다음 날이었기 때문에 곳곳에 조롱조롱 매달려 있던 별 모양 등불 장식이 그나마 마음을 좀 환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 아래 들개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누워 있던 걸인들의 모습에, 그런 모습을 처음 본 당시의 나는 매우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때를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정말 많은 게 변했다. 전에는 없던 고속도로가 쭉 뻗어 있다. 그 도로를 따라 협죽도를 고르게 심어 두었고, 키 큰 야자나무도 멀리서부터 눈에 들어온다. 기억도 그렇게 고르게, 멀리서부터 차근차근 돌아온다.



  무얼 바라 여기까지 왔나, 하는 윤동주의 한 구절을 입내내어 본다. 그 시를 읽으며 느낀 무거움과 비슷한 무거움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다. 오랜만에 만나는 얼굴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다들 그때 살던 집과 다른 곳에 살고 있다. 공간적 배경이 같은 곳이라곤 즐겨 찾던 카페와 마트 정도.


  낯익으면서도 낯설고 또 그렇다고 마냥 낯설지만은 않은 이상한 기분이다. 공간적 배경이 아주 조금 달라진 것만으로도 조금은 어색해, 이 재회가 기쁘면서도 어딘가 순도 100% 기쁨만 있는 것 같지가 않다. 그냥 꿈 속을 걸어다니는 기분이랄까. 너무 좋아서 꿈 같다는 관용구가 아니라, 정말로 잠시 후면 내 방 침대에서 일어나 “하이데라바드 꿈을 꿨어.” 라고 말할 것 같은 기분이다.


천장에 선풍기가 돌고 아이들 목소리가 들린다. 그토록 상상해 왔던 꿈 같은 순간.


  아이들은 확실히 달라졌다. 가르치는 걸 흡수하는 어린이 단계를 지나, 그걸 튕겨내며 반항하는 사춘기의 초입까지 보고 갔는데... 이제는 그것도 지나 정말 나를 자기네 친누나 취급하는 든든한 동생들이다. 언제부턴가 자기들 방에선 옷 벗고 있다며 방 근처에도 못 오게 하던 녀석들이 이제는 웃통을 벗고도 슥슥 돌아다녀 오히려 여길 내가 돌아다녀도 되나 눈치보는 나만 이상한 사람이다.


  외국인과 같이 버스에 오르는 걸 부담스러워하던 녀석들이 이제는 그걸 아무렇지 않게 여김은 물론 "그땐 싫었는데 지금은 괜찮아"라며 과거의 감정을 솔직하게 말해주기도 한다. 여자친구나 연애에 대한 관심도 부쩍 많아져 눈을 빛내며 자기들 이야기를 잔뜩 풀어놓기도 한다. 기껏해서 눈 마주치고 '안녕'을 할까 말까 정도의 밀고 당기기지만 한창 그게 재미있을 나이라,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한다. 꼭 교생 선생님 첫사랑 이야기 터는 중학생들처럼 내 이야기를 물어 오기도 한다. (말해줄 만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별로 없기에, 나중에 말해줄 만큼 좋은 사람이 생기면 이야기해주겠다고 했다.)


  전에는 둘씩 짝 지어 손 꼭 잡고 앞만 보며 착착 걷던 길을, 그러다 한때는 같이 걷기 싫어 주머니에 손 꽂고 이리저리 빙빙 돌아다니던 길 위를, 이제는 내게 발밑 조심해라 뭐해라 있는 대로 잔소리를 해 가며 같이 걷는다. 심지어 누나 집까지 걸어갈 수 있겠냐고 묻는 데는 조금 어이가 없다. 너희가 큰 거지 내가 작아진 건 아닌데. 내가 무슨 할머니도 아니고. 그래도 그냥 웃고 만다. 지나간 모든 시간이 과정이었듯, 지금 이 순간도 아이에게는 날 향한 배려와 관심을 표현하는 과정이기에.


  그렇게 달라진 아이들을 새롭게 관찰하며 며칠을 보냈다. 내게도, 아이들에게서도 여전히 그 시절 꼬마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애정이 물씬 느껴진다. 그 애정이 마치 최루탄이라도 되는 것처럼 터져 나와 모든 공기를 바꾸어 놓는다. 모든 감정과 기억, 기쁨과 고민까지 마음에 훅 밀려 들어온다. 처음 며칠 동안 '무얼 찾아 여기까지 온 걸까', '여기에 온 건 잘 한 결정이었나' 하며 울적했던 마음은 탐색전이었던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어디로든 훌쩍 떠날 필요가 있기는 했다. 정신없이 굴러온 올해를 어떻게든 꺾어 잠시 접어두어야만 했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 공부를 하고 있었고 그게 쉽지만은 않았던 한 해였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책상 앞을 떠나면 죄책감이 들어 스스로도 알려고 하지 않았지만, 아무튼 힘들었던 게 사실이고 몸도 마음도 피폐해지고 있었다. 잔뜩 긴장해 스트레스성 불면증으로 매일 아침 해 뜨는 걸 볼 때까지 날 몰아세우고서야 잠들곤 했다. 일부러 수면 패턴을 바꾼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 나 스스로도 그렇게 믿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내가 온 길을 돌아본다. 인도에서의 시간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가자마자 갑자기 뒤집히는 일상을 견딜 자신이 없어 귀국 이틀만에 시작한 인턴 출근, 곧바로 이어진 복학, 졸업 준비와 이런저런 시험들. 갑자기 바뀐 목표와 계획, 모자란 시간, 잘 나오면 잘 나와서 불안하고 안 나오면 안 나와서 불안하던 점수. 내가 인도에서 2~3년을 사는 동안 취직하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어딘지 몰라도 나와는 한참 멀다는 느낌이 드는 어딘가에서 살고 있는 친구들. 너무 오랜만이라 오히려 안부를 나눌 수 없는 시간의 간극.


  공부든 인간 관계든 스스로가 포맷된 컴퓨터 같은 기분이었다. 다들 업데이트가 된 최신형으로 반짝거리는 삶을 살 때 나 혼자 구형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당황하는 기분. 그러면서 나는 아주 옛날에 겪은, 잊고 살았던 모든 실패의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걸 느꼈다. 그 실패들이 나를 감싸고 두려워서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는 기분에 옴짝달싹 못 하고 지냈다. 살면서 그래본 적도, 스스로가 그럴 거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는데 어느새 우울함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우울한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이렇게 힘들구나, 생각하면서도 그저 멍하니 망가져 가는 자신을 볼 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모든 걸 떨치고 다시 이곳, 다시 인도. 내가 가장 활기차게, 불꽃 같이 살았던 곳. 그와중에 또 일정이 바뀌고 비행기가 취소되고, 다사다난한 가운데 마침내 도착한 곳. 그리고 서서히, 아주 서서히 느껴지는 그 지난 날의 나.


  여기 오자마자 거짓말처럼 불면증은 사라졌다. 때마침 휴일을 맞은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하루를 보내고 있어서였을까. 10시에서 12시 사이에 잠들고 아침 7시면 거짓말처럼 눈을 반짝 뜨는 바른 생활이 저절로 시작됐다. 그렇게 억지로 노력해도 안 되더니만. 딱히 여기가 어디여서라기보다는, 잠시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나를 정비할 시간이 필요했고 한국에서는 그게 쉽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서 여기까지 오는 길 내내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도입부에 나오는 인디언들의 잠언을 오래오래 생각했다. 인디언들은 가끔 말을 멈추고 말에서 내려 자기가 온 방향을 돌아보며 서 있는데, 그 이유는 자기가 너무 빨리 달려서 자기 영혼이 못 따라올까봐 기다려주는 것이라 했다.


  영영 잃기 전에 기다려야 할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다. 바쁘고 혼잡한 현대 사회에서 꼭 사치처럼 느껴지지만. 내가 조금 모자라고 부족한 게 죄도 아닌데 그렇다고 좀 쉬어가는 게 죄스럽다는 생각이 드는 건, 나만 느끼는 건 아닐 테지만. 그럼에도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니 한 달의 시간을 쪼개어 인도로 돌아온 것이 실은 놓쳐 버린 마음 조각을 찾는 여행이었다. 우습다. 배낭 동여매고 자아를 찾아 떠난다며 인도로 여행 가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던 내가, 내 영혼 구석을 메우러 인도로 여행을 왔다.




  처음 토이카메라를 잡았을 때 산 카메라는 홀가였다. 35mm 필름을 쓰는 보통의 필름카메라와 달리 홀가는 120mm 필름을 써야 했다. 따로 구입하고 챙겨 쓰기에 당시의 난 너무 게을렀기 때문에 몇 롤 찍지 않고 장식품이 되었지만, 아무튼 가족의 카메라가 아닌 나의 카메라로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길지 않은 설명서만큼은 그래도 제법 들여다 보았다. 거기에는 B셔터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B셔터 모드로 촬영하면 셔터가 눈 깜빡이듯 순식간에 열렸다 닫히는 것이 아니라 1시간이나 2시간처럼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천천히, 그 시간 동안 렌즈 안에 들어오는 장면들을 한 필름에 고스란히 녹여 낸다. 별의 발자취도 그렇게 B셔터로 찍을 수 있다. 물론 토이카메라로는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소리지만 아무튼 설명서가 말해주는 원리로는 그랬다.


  그 홀가로는 한 번도 써 보지 않은 그 셔터를, 나는 내 마음 속에서 눌러 두었다. 어느 노래의 제목처럼 기억을 걷는 시간. 이 여행 내내 나의 발자취를 차곡차곡 담으면 그 끝에 다음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놓일 것이다.


그렇게 여행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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