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끔한 매듭이 불가능한 건 언제나 이어져 있기에
내가 만으로 2년 정도 되었던 인도 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인도 우리 집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원래 우리는 24명의 아이들과 누나 형들이 같이 살면서 아이들이 집 근처의 학교로 통학을 했는데, 더 이상 그럴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럴 수 없는 상황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힌두주의가 극성을 부리면서 힌두교가 아닌 사람들의 어려운 시절이 시작되고 있었다. 어떤 무슬림들은 바우처를 받으러 갔다가 강제 개종을 당했다 하고, 그 많은 기독교 시설 상당수가 강제로 문을 닫게 됐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기면 아이들은 친부모가 데리러 올 때까지 정부가 운영하는 시설에서 우두망찰 기다려야 했는데, 이런 시설에 맡겨지는 아이들의 부모에게 며칠 일을 빠지고 교통비를 들여 정부 시설까지 찾아가는 건 보통 큰 일이 아닐뿐더러 경우에 따라 출생 등록이 되어 있지 않은 아이들도 있을 거라는 점을 생각하면 사실상 아이들의 어린 시절이 박살나는 일이었다.
다행히 우리 아이들은 출생 신고는 다 해두었다. 그러나 그런 일만은 피하고 싶었다. 게다가 우리는 고아원도 아니었고 기숙학교도 아니었고 좀 애매한 측면이 있었다. 아이들의 부모님께서 아이들을 우리에게 위탁했다는 자필 서명이 들어간 서류부터 시작해, 필요한 서류는 죄 부지런히 구비해 두었다. 그러나 갑자기 누군가 나타나서 생판 처음 듣는 서류를 요구하면 그만이었다.
그런 일이 아직까지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앞으로도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이런 "시설"을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은 갈수록 매서워지고 있었고, 그럴 때는 이따금 법 조문보다 관습법의 힘이 더 클 수도 있다. 아무리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가족이라 인지하고 있다 한들 조심해야 하는 건 사실이었다.
결국 아이들의 부모님과 큰엄마 큰아빠 모두 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끝에 아이들을 기숙학교로 보내기로 했다. 아이들이 안정적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다행히 좀 멀기는 하나 다른 도시로 가지 않고 우리가 사는 곳에 적당한 기숙학교를 찾을 수 있었다.
그 모든 이야기들을 한국에서 듣고, 문서로 정리하고, 사진을 받아 보면서 나는 아이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가 너무 궁금했다. 갑자기 너무나 많은 것들이 변했을 터였다. 그때까지 아이들을 둘러싼 세계는 충만 그 자체였다. 아이들 밥 먹이는 것에 큰엄마가 얼마나 철저하셨는지, 매주 닭고기도 두 번씩 달걀도 두 번씩 나오는 식단은 항상 야무졌고, 아이들이 눈 반짝이면서 따라갈 수 있는 이야기를 항상 들려주시는 큰아빠는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 주는 사람이셨다.
누나 형들 또한 챙기는 손길이 완벽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질리지 않는 간식을 주고 싶어서 머리 굴리며 고민했고 학용품 하나 떨어지는 법이 없도록 애를 썼다. 아이들 옷이 조금 뜯어지면 밤늦게까지 앉아 바느질을 했고, 흰 셔츠라 더러움 타기 쉬웠던 교복을 깔끔하게 유지하는 건 우리 모두의 과제였다.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을 수천 명이 사는 학교의 사무적 손길로, 혹은 스스로의 힘으로 해야 할 터였다. 한편으로는 염려도 되었지만 또 어떻게 생각해 보면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새로운 마음가짐을 배우는 시기가 될 수도 있었다.
아이들이 학교로 들어가고 겪었을 처음의 시간을 나로서는 짐작만 할 뿐이다. 그때 나는 한국에 있었으니까. 다만 아이들 모두 통화할 때면 예전이 그립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 전이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고 했다. 예전에 우리 같이 살던 시절에는 받는 게 당연해 고마운 줄도 몰랐는데 생각해 보니 참 고맙다고 말할 때는 대견스러웠지만, 학교에서 나오는 음식이 형편없다든지 이런저런 점이 힘들다든지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는 안쓰럽기도 했다.
나도 한때 기숙학원에서 지내보았기 때문에 알았다. 교실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고 밤에는 잠만 자는 방으로 돌아와 이 층 침대에 누우면 가끔은 스스로가 난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침이면 울려 퍼지는 항상 같은 알람, 같은 식당, 같은 화장실, 같은 일정... 입시 학원 특유의 일정이 어찌나 촘촘했던지 건물에서 건물로 옮겨 가는 잠깐 사이에 하늘을 바라보면 매일 해가 떠 있는 각도마저 같았다. 가끔은 그 쳇바퀴 같은 현실에 소름이 끼쳐 악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입시만을 목적으로 했던 기숙 학원과는 조금 다르겠지만, 아무튼 기숙사라는 장소 자체가 최선이 호그와트 최악이 올리버 트위스트, 그 사이 어딘가 아니겠는가. 호그와트 해서 말이지만 배우 틸다 스윈튼이 해리 포터 시리즈가 기숙사 생활을 미화한다며 불쾌감을 표한 적도 있다. 그만큼 기숙사는 뭐랄까 어른들이 관여할 수 없는 아이들만의 세계다. 해리 포터 같은 누군가에게는 안락한 도피처가 되어 줄 수도 있겠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세렝게티 같은 느낌일 수도 있다. 그 적응은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결국 고스란히 아이들 각자의 몫이며, 사실 본인이 잘 한다고 다 수월하리란 법도 없었다.
그리고 이번 여행에서 드디어 나는 기숙학교에 들어간 이후의 아이들을 처음 만나보았다.
나는 아이들에게 내가 인도에 놀러 간다는 사실을 비밀로 했다. 마침 2주에 걸친 힌두교 축제로 방학을 맞은 아이들이 기숙사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시기였다. 아이들과 오래 함께 있을 수 있도록 일부러 시기를 그렇게 잡았다.
아이들에게는 연휴 동안 아이들 공부를 같이 봐주고 같이 지낼 사람이 올 거라고만 말해 두었다 한다. 나중에 듣자 하니 아이들은 그냥 자기들이 아는 인도인 형 누나 중 누군가 오겠거니 하고 있었단다. 나는 비행기 표 다 끊고서도 통화할 때 인도 언제 오냐며 몸을 배배 꼬는 아이에게 "그러게, 나도 너무 가고 싶다. 언제 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 하고 울상을 지었다. 자꾸 광대가 올라가고 웃음이 나오려 해서 참느라 힘들었다.
델리 공항에서 밤을 새운 후 아침에 하이데라바드로 들어가는 비행기였다. 친구들이 공항으로 마중을 나왔고, 나는 아이들이 모여 있는 집에 불쑥 들어가기로 되어 있었다. 차에서 잠시 기다리는데, 그토록 기대하고 꿈꿨던 순간인데 어쩐지 떨렸다.
일단 기숙학교와 상관없이 시간이 너무나 많이 흘렀다. 내가 아이들을 마지막으로 본 지 만으로 2년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산 시간만큼이나 긴 시간이 흐른 것이다. 어느새 나보다 키 작은 아이가 몇 되지 않았다. 어찌나 쑥쑥 자랐는지. 이제는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사진 속 모습보다는 각자의 아버지 모습에 더 가까운 얼굴들이었으니까.
그러나 내가 거실로 들어서는 순간 와아 웃으며 나를 보는 그 미소만큼은 내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심지어 빨리 우노 하게 앉으라며 손을 잡아끄는 것조차 그 시절과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 아이들은 참 다정하고, 풍성하게 사랑받아 그런지 풍성하게 사랑 줄 줄 안다. 이따금씩 아무 맥락도 없는 순간에 마음이 뭉클해지곤 했는데, 그건 아이들의 여전한 면을 볼 때뿐 아니라 달라진 면을 볼 때도 그랬다.
오래전 그 시절처럼 아이들과 함께 밥을 먹고 야채를 썰고 아이들 옷을 꿰매고 같이 앉아서 게임을 하고... 그러다가도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씩 에이즈 환자들을 방문하러 다니는, 그야말로 옛날 그 시절과 똑같은 스케줄이라 기쁘게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저녁나절에 돌아와 조금은 힘이 빠져 멍하니 서 있는 내 뒤통수를 누군가 때렸다.
짜증이 날 정도로 세게 때린 건 아니었지만 소리가 퍽 크게 났기 때문에 옆에서 보고 있던 다른 디디가 깜짝 놀라 아이의 이름을 엄하게 불렀을 정도였다. 돌아보니 S가 있었다. 조금 엉뚱하지만 그래서 더 사랑스러운 S. 너 지금 뭐하냐고 물으니 씩 웃으며 대답한다. "디디, 사고는 하나 둘 셋 하고 오는 게 아니라 갑자기 오는 거야."
그 말에 나는 헛웃음이 터졌다. 그건 내가 자주 하던 말이었다. 아이들이 도가 지나친 장난을 하다 그게 너무 위험할 수 있어 제지할 때 자주 하곤 했다. 사실 자주 하려고 자주 한 게 아니라, 극성맞은 막둥이 반을 맡고 있다 보니 아이들이 무리수가 되는 장난을 할 때가 많아 그랬다. 코코넛 나무는 손 대지도 말라고 큰엄마 큰아빠가 엄포를 놓으셨는데도 코코넛을 떨어뜨려 보겠다고 나무에 돌을 던지고 있다든지, 부엌의 칼을 멋대로 가져가서 그 두꺼운 코코넛 껍질을 벗기려고 휘두르고 있다든지... 뭐 그럴 때. 사고는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거니까 위험한 장난 하지 말라는 소리였다. 이름 하나씩 정답고 우렁차게 불러 내 눈 앞에 데려온 다음 하던 얘기는 늘 그거였다. 나중에는 내가 “사고는 어떻게 오지 않는다?” 물으면 내 눈치를 보며 “하나 둘 셋...” 하고 슬슬 대답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2년이나 지났는데 그 이야기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줄은, 그리고 그 말로 내게 장난을 걸어올 줄은 몰랐다. 어이가 없어 웃으면서 아이를 휘어잡고 우리는 티격태격 몸싸움 같은 장난을 시작했다. "야, 네가 선택해서 벌이는 일은 사고라고 하는 게 아니야. 이거 사고 아니잖아." 하니까 곧 죽어도 사고란다.
왜 그랬는지 "솔직히 말하면 용서해 줄게. 이거 사고야, 아니야?" 물으니 그제야 또 씩 웃으면서 사고 아니란다. 그제야 붙잡고 있던 아이를 놔주면서 또 이러기만 해 봐, 했지만 사실 너무 기분이 좋고 즐거운 순간이었다.
그러고 끝일 줄 알았는데 다음 날 S가 갑자기 엄숙한 표정으로 나한테 와서 오른손을 스윽 내민다. 사실 사람과 사람이 같이 있다 보면 굳이 말로 설명 안 해도 비언어적 표현이 더 빨리 와 닿는 거라서, 바로 알아듣고 나도 똑같이 엄숙한 표정으로 그 손을 잡아 악수를 했다. 그랬더니 갑자기 손에 힘을 팍 주어 내 손을 쥐어짜는 것이다. 아프다고! 소리를 치니 놓으면서 또 씩 웃는다. "야, 이건 솔직히 사고 아니다. 그렇지?" 하니까 이번에는 순순히 사고가 아니란다.
"사고 아니니까, 그리고 내가 어제는 너 용서해 줬으니까 오늘은 용서 안 해준다." 하면서 씩 웃었는데 갑자기 정색을 하고 눈살을 찌푸린 채로 나를 본다. 그러더니 역정을 내셨다. 성경에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했는데 누나는 왜 나를 용서해 주지 않겠다는 거냐고. 으응? 거기서 갑자기 성경이 나올 줄이야... 또 헛웃음이 터졌다. 사실 너무 맞는 말이라 뭐라 반박할 말도 없긴 한데 그냥 어이가 없었다. 그러더니 또 씩 웃고 가 버린다. 아무튼 정말이지 같이 있으면 지루한 순간이라곤 한 순간도 없다.
그렇게 유쾌한 순간이 지나가는가 하면 좀 감동적이었던 순간도 있다. 가기 전에 나는 시간을 쪼개 아이들에게 편지를 썼더랬다. 차마 긴긴 편지지를 24장 채울 시간은 없어 작은 쪽지에 하나하나 편지를 쓰고 간식과 함께 담아 이고 지고 갔다. 편지 내용은 별 게 없었다. 보고 싶었고 다시 만나게 되어 너무 좋다는 말, 어떻게 지내고 있었는지 궁금하다는 말, 내가 아는 너는 이러이러한 장점이 있는 사람인데 그 모습이 참 좋다는 말... 조금씩 차이는 있었지만 대체로 그런 내용이었다.
다짜고짜 들어가 아이들과 웃으며 인사를 하고 곧바로 나눠 주었다. 그간의 경험상 이 편지와 선물은 정말 가벼운 것일 뿐 아이들에게 큰 의미로 다가갈 일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냥 받자마자 바닥에 굴러다니게만 안 해줬으면, 간식 먹고 포장 쓰레기도 바닥에 두지 말고 잘 버려 줬으면... 정도를 바랐을 뿐이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얼마 안 되어 J가 내게 다가왔다.
디디가 써 준 편지를 읽고 '맞아,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야' 하는 생각을 했단다. 안 그래도 요즘 생각이 많았는데 고맙다고. 그 말이 내게 더 감동이었다. J는 상대 기분 좋을 말을 적당히 찾아서 해 주는 성격이 아니라 정말 자기가 느낄 때만 진중하게 말하는 성격이라 더욱 감동적이었다. J가 하는 말은 그 신중함 덕에 늘 빛나는데, 그 빛나는 말이 나를 향하니 황홀할 정도로 행복했다. 바삐 가느라 전날 밤늦게까지 피곤한 눈 치떠가며 쓴 편지였는데, 내가 한 노력은 사르르 녹아 버리고 흐뭇한 감동만 가득 남아 오히려 내가 선물을 받은 셈이 되었다.
같이 지내는 동안 우리는 많은 대화를 했다. 깔깔거리며 나눈 잡다한 수다부터 진지한 이야기까지. 기숙사에서 만난 친구들이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입에 못 담을 욕을 해댈 때, 그러면 안 된다고 배운 아이들은 욕이 어느새 스스로의 입에서 나오지 않도록 무척 애를 쓴다 했다. 그래도 또래 친구의 영향력이란 게 무서워서 한 번씩 잘못하기도 한다 했다. 같이 살 때는 큰엄마 큰아빠의 말은 고이 들었을지언정 누나 형들이 하는 훈육의 말 바깥 정도까지는 빠져나가려 해 보는 시기였다면, 지금은 오히려 큰엄마 큰아빠의 가르침과 누나 형들이 해온 말들 안에 머물려고 애를 쓰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건 어쩐지 내 태도와도 닮아 있었다.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과 별개로, 그 시절에 우리가 배운 좋은 덕목들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는 것. 뚜렷한 답 같은 걸 줄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다만 나도 같은 싸움 안에 있고, 삶은 타성으로 굴러가는 게 아니라 그렇게 치열하게 이어져 가는 것이겠지. 항상 그런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런 때였다.
과거의 소중함을 생각하며 그때를 회상할 수 있을 만큼은 자란 것일까. 누나 형들에 비해 애정 표현을 무척이나 부끄러워하던 아이들은 이제 냉큼 먼저 애정을 표현해 오기도 한다. 한 번은 내일 아침에 머리 자르러 미용실 가야 하고, 돈은 얼마를 내줘야 하고, 아침 식사를 위해서 뭘 준비해야 하고, 같은 일정을 나에게 줄줄 이야기하다 말고 갑자기 말을 뚝 멈추고는 진지한 얼굴을 하는 것이다. 왜? 물으니 씩 웃고 I love you. 하고는 말을 이어갔다.
어디서 사람 기분 좋게 하는 방법이라도 배워 오는 걸까. 나도 씩 웃으며 I love you, too. 하고 그 순간은 쓱 지나갔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는 굉장히 깊이 남았다. 나뿐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하구나 느껴져서 그랬다. 매일매일 고만고만하게 이어지는 시간처럼 살다가도, 잠깐의 선물이라는 걸 문득 깨닫고 갑자기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현실감 없이 느껴져 뭉클해지는 그런 기분을 혼자 느끼는 게 아니어서 참 기뻤다.
나중에 한 달의 시간을 마치고 아이들과 마지막 인사를 할 때도 비슷했다. 뭉클하고 다정다감한, 알록달록 예쁜 말들로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다가... "디디 이거 어떻게 풀어?" 하며 수학 문제집을 가지고 오면 주저앉아서 항등원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거나 일차방정식 푸는 법을 보여 주었다. 단면을 딱 잘라 리본처럼 예쁘게 매듭지어지는 건 없었다. 관계는 계속되기에 관계이고, 우리는 너무 오랜 일상을 같이 살았다. 산뜻한 안녕 같은 건 없다. 안녕하고 돌아서도 수학 문제를 같이 풀어야 하고, 수학 문제를 풀다가도 비행기 시간을 계산해 급히 차에 오르면서 한 번 더 손을 맞잡아야 한다.
말끔한 이별의 의식 같은 건 없지만 슬프지도 않았다. 우리 벌써 여러 번의 인사를 나누어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간을 넘어 공간을 넘어 언젠가 어디선가 다시 만난다는 일이 가능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 아이들은 나보다도 더 잘 안다. 이렇게 보내고 다시 만난 사람이 한 둘도 아니니까.
주고받은 사랑이 우리를 탄탄하게 묶는다. 다만 떠나는 길의 아쉬움만은 어쩔 수 없어 질척 질척 흘러내린다. 다 애정의 조각이려니 하고 한 달 동안 아이들과 주고받은 대화를, 함께한 시간을, 같이 걷던 길을, 마음에 잘 갈무리하며 아쉬움마저 감사하게 누린다.
우리 참 오래 알았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이제는 제법 햇수가 되었다고 지난 시절을 회상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음이 감사하고, 또 언젠가 오늘을 회상할 미래를 기대할 수 있음이 감사하다. 내 20대에 가장 잘 한 선택은 인도에 간 것이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데, 인도에 무사히 뿌리내리고 인도를 좋아하며 산 건 정말이지 아이들이 준 애정 덕택이었다. 그 덕분에 에이즈 환자들이나 다른 사람들을 만나서 보낸 시간도 모두 가능했다. 돌아올 곳이 아이들 있는 집이었기 때문에 늘 "디디 어디 가?" 물어 올 때마다 늘 같은 대답을 하며 "이따 보자!" 손 흔들고 에이즈 환자들을 만나러 다닐 수 있었다.
이번에도 그렇게 환자들을 만나러 간다. 아이들을 만날 때와 비슷한 설렘 한편으로, 어쩐지 조금 더 떨리는 마음이 한구석에 있었다. 이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