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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Feb 22. 2018

진부한 단어의 신비로움

웃음을 꽃에 비유하는 이유


  가끔 그럴 때가 있다. 너무 자주 쓰다 못해 아예 단어로 자리까지 잡아버린 비유들을, 그래서 신선하게 그 의미를 음미할 일도 좀처럼 없는 그런 말들을 물끄러미 보게 될 때. 그러다 새삼스럽게 그 말이 가진 맛이 와 닿는 그런 순간.


  이제는 비유로 보지도 않는 “웃음꽃”도 그렇다. 요즘 쓰기엔 조금 올드한 느낌마저 드는 것 같다. 그러나 달리 말하자면 누군가 웃음을 처음으로 꽃에 비유했을 그 어느 순간부터 이 말이 아예 하나의 복합어가 되어 사전에 등재되기까지, 그 무수한 세월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 비유에 동의하고 공감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니 사용 빈도의 부침이 있다한들 말 자체의 힘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 순간이 항상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이 단어가 진부해지도록 쓰면서도 단어의 그 힘을 잃지 않는 것 같다. 그 예쁘고 사랑스러운 순간을 담아내기에 “웃음”이라는 말만으로는 도저히 부족한데, 그런 하얀 웃음이 도처에 계속 있으니까. 그만큼 편안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짓는 웃음은 꽃에 비하기도 아쉬울 만큼 예쁘다. 아이들의 웃음은 더욱 그런 것 같다.


  내가 살면서 들어본 수많은 아이 웃음소리 중 가장 맑고 예쁜 소리도 인도 우리 집에서 들었다. 주변에는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다들 그냥 내가 애정을 갖고 하는 말이라고만 들었겠지만 나는 정말 말할 때마다 진심이었다.


  E가 웃을 때마다 세상 어딘가가 한 톤 더 밝아지는 기분이 들곤 했다. 얼마나 좋았는지 그냥 슬쩍 스쳐 가는 순간의 감정으로 흘려보내기 너무 아쉬워 일기에 쓰곤 했다. 세상 고운 것 모두 모여 있는 별이 가루 되어 반짝이는 것 같다고. 이런 간지러운 표현을 쓰지 않고선 못 배길 만큼, 그만큼 인상 깊은 웃음이었다.


  복작복작하게 아이들이 한가득 모여 있을 때 E는 쉽게 눈에 띄는 편은 아니었다. 제일 앞줄에서 씩씩하게 손 들며 시선을 잡아채는 성격도 아니고, 장난기는 있지만 다른 아이들에 비하면 까불거려서 지적을 많이 받는 축에 속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언제나 조금 느린 듯 뒤쪽에, 그러나 맨 뒤도 아닌 곳에 앉아 있는 편이었다.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도 조금 벌린 채로, 아주 신기한 걸 처음 접하듯이 천천히 듣고 소화했다. 그러다 보니 마음이 급해선지 그 입에서 말이 나올 때는 차분하게 흘러나오지 못하고 마구잡이로 굴러 나왔다. 매우 천천히 듣고, 급하게 말하느라 더듬거리는 말투. 초면에 깊은 인상을 남기는 편은 아니지만 오래 함께 있다 보면 잔잔한 개울 물 같아 좋은 아이였다.



  아이들을 전부 다 앉혀 놓고 뭔가 설명하다가 중간중간 작은 질문을 던지면 재미있는 모습들을 보게 된다. ‘제발 내 대답을 들어!’ 하는 것처럼 이글이글 타오르는 표정으로 날 보며 필사적으로 목소리 높여 대답하는 아이도 있고, 다른 대답이 나올 때마다 내 눈치를 살피며 정답을 찾으려 애쓰는 아이도 있다.


  다들 착해서 엄청나게 집중한 채로 들어준다는 것만 빼면 공통점이라곤 없는 때, 24쌍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고루 보기란 참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고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도 않는 E와 가끔씩 세상에 둘 뿐인 것처럼 눈이 마주치는 때도 있었다. 다른 아이들의 아우성을 뚫고 대답하지는 않지만 답을 알고 있어서 속삭이듯 입술만 달싹거리는 그 얼굴을 보고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여 준 적이, 많지는 않지만 더러 있었다. 그럴 때 E가 짓는 환한 웃음은 절대 쉬이 잊힐 수 없는 그런 시원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한때는 조용했던 E. 다른 한편으로 참 속이 깊은 아이였다. 언젠가 E를 후원해 주시는 분께서 가방을 보내 주신 적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아이들이 아직 학교를 다니기 전이었기 때문에 책가방은 동경의 대상이었을 뿐 일상품이 아니었다. E를 특별하게 떠올리며 선물을 준비해 주신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감사했으나, 24명이 같이 사는 집에서 누구 하나에게만 딱 책가방을 내주기는 좀 어려웠다. 나중에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모두가 책가방을 살 때 E에게는 선물 받은 책가방을 전달해 주는 걸로 어른들끼리는 조율을 마친 다음, 큰엄마가 아이에게 선물 받은 것부터 쭉 상황을 이야기해 주셨다. 그렇게 해도 괜찮겠니, 하고 동의를 구했을 때 E는 예의 그 미소를 지으며 흔쾌히 대답하고는 포로롱 가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놀았다. 같이 사는 형 동생 친구들을 두루 헤아려 참은 것이었는데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절제한 것이었는데도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일처럼 넘길 만큼 마음이 깊었다. 학교의 상징이었던, 그래서 더 특별했던 책가방의 가치를 생각하면 그 마음 씀씀이가 더욱 사랑스럽다.


  한 번씩 허당 같은 의문의 행동을 하는 것도 매력 있었고, 그러다 눈 마주치면 헤벌쭉 웃는 것도 귀여웠지만 E는 언제까지나 그런 해맑은 아이로만 있지는 않았다.


  친해질수록 장난꾸러기 같은 성격이 더욱 드러나는 편이기도 했고, 실제로 커 가면서 더욱 꾸러기가 되기도 했다. 한편 언젠가 내가 난생처음으로 인도 전통 의상인 사리를 입은 날, 부끄럽다고 사진은 됐다는 내게 오늘 예쁘니까 꼭 사진 찍으라고 말해줄 때 E는 얼마나 단호했는지. 여전히 E의 웃음은 말갛지만 이제 E에겐 다른 모습들도 켜켜이 쌓여 가는구나 새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자라면서 드러나는 그의 새로운 매력....


  그래도 그렇지 우리 E가 행동대장 스타일로 자라게 될 줄은 누가 알았을까. 이제는 목소리 높여 농담을 하고, 여전히 급하게 더듬거리는 말투지만 큰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그냥 그 말투만으로도 웃겨서 아이들 다 같이 와 웃으면 저도 씩 웃는다. 조금은 뒤편에 앉아 있던 아이가 어느새 중간에서 웃고 있다. 자라면서 성격은 계속 변하는 게 당연하지만, 그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입장에선 그 변화가 참 새삼스럽고도 재미있다.


  이사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어떤 이유로 무척 뻗대다가 큰엄마께 된통 혼나고 벌로 온 바닥을 혼자 걸레질하던 그 뒷모습이 눈에 선하다. 제법 야무지게 잘 해내고 있었는데도 왜 그 모습에 그렇게 웃음이 났는지. 뒷모습만 봐도 불퉁해져 있는 모습이 큰엄마 눈에도 귀여우셨던지 사진을 찍어 보내주셨더랬다.


  언젠가는 연휴라서 학교를 가지 않는 아이들과 집에 다 같이 있었던 때였는데, E가 창고에서 몰래 멋진 옷들을 꺼내 다른 아이들과 다 같이 돌려 입다가 혼난 일도 있었다. 아이들에게 한 번에 모든 옷을 다 주면 관리가 안 되는 걸 알기에, 잘 보관하다 필요에 맞춰서 옷을 주곤 하는데 한창 옷에 신경 쓰는 사춘기 청소년께서는 멋진 옷 몇 벌로는 만족이 안 되어 몰래 창고에서 꺼내 온 것이다. 그럴 나이기도 하거니와 그때 집에만 있던 게 아니라 매일 청소년 캠프에 다닐 때였어서 유독 신경이 쓰이기도 했을 것이다. 뭐 다 알 만한 감정이라 혼내는 사람이나 혼나는 사람이나 딱히 심각해지지는 않는 일이었기에, 그냥 나는 그 순간이 너무 웃겼다. 전통적으로(?) 말썽 부리던 녀석들은 정작 얌전히 옷을 배급 받고 있고, 비교적 조용하던 E가 옷을 끄집어 내다가 돌렸다는 것도 웃기고. 이걸 알아챈 디디는 못 보던 옷이 너무 많은 데다가 창고에 박혀 있던 옷 특유의 쿰쿰한 냄새가 나서 잡아냈다니 이 허술함도 웃기고. 그냥 한 장면 시트콤을 보는 기분이었다.


 사람 사는 건 사실 어디 가나 다 비슷해서, 70년대의 중학생이나 90년대 중학생이나 오늘날 중학생이나 공통으로 갖고 있는 것이 무언가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 나이 때가 지났어도 대강의 마음을 웬만한 정도까지는 서로 알음알음 느낄 수도 있고... 다 혼나고 나온 아이가 그 오래 전 어린 시절처럼 히 하고 웃어 보이면 우리는 또 약속이나 한 것처럼 눈 마주치고 사르르 웃는 것이다. 아이는 많이 변했지만 또 변하지 않았다. 웃음꽃이라는 단어는 이렇게 시간이 지나도 지지 않는 꽃으로 우리와 함께 있다.

 



  팔다리가 어마어마하게 긴 아이, 겁먹은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가도 재미있으면 킬킬 웃는 아이, 말이 많지는 않지만 한번 입을 열었다 하면 허스키한 목소리로 조용히 할 말을 하는 아이. M의 어린 시절을 그렇게 기억한다.


  언제부턴가 키도 훌쩍 자라고 장난기도 많아진 M이 와서 자기 이름이 뭔지 아냐고 넌지시 물어 왔다. 네 이름이 뭐긴 뭐야 M이지... 신종 답정너인가 하고 있는데 아니라며 자기 이름은 모로모로란다. 모로모로가 무슨 뜻이냐 물으니 heart heart 같은 거, 하고 대답한다. 아무래도 “두근두근” 정도의 어감이 아닐까 싶다. 어디서 또 뭘 듣고 와서 저런 별명을 멋있다고 주워섬기고 있는 걸까, 하며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웃었다.


  이 녀석의 별명은 그렇게 하나씩 늘어 갔다.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주변에서 부르면서 만들어 주기도 해서 다 모아 부르면 웬만한 풀 네임보다 길었다. 별명이 많다는 건 그 나이 때에는 인기의 척도이기도 했던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아이들이 M에게 툭툭 편안하게 장난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워낙 성격이 무던하여 이렇게 장난치고 저렇게 장난쳐도 화내는 법 없고 오히려 같이 킬킬 웃어주니 인기가 많을 수밖에. 재미있는 농담을 던지는 편도 아니고 나서서 눈에 띄는 성격도 아닌데 저렇게 사람 끌어 모으는 것도 참 대단한 재주고 매력이다 싶었다.


  말이든 행동이든 크게 하지 않고 많이 하지도 않는데 그 속속들이 착하다는 걸 주변이 다 알 수 있다는 것도 M의 특이한 점이었다. 특히나 가족들을 생각할 때면 M의 마음 깊은 곳 굉장히 뜨거운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방학을 맞아 집으로 돌아가기 전, 부모님께서 M을 데리러 오시면서 M과 똑같이 생긴 여동생 둘을 데려오셨는데 나이 차이가 제법 나는 동생 둘을 어찌나 살뜰하게 챙기는지, 하도 동생들을 안고 다녀서 동생들이 땅에 발 디딜 틈이 별로 없을 정도였다. 그 동생들은 오빠 품에 안겨 있는 게 너무나 당연한 얼굴로, M과 똑 닮아 감정 표현이 크지 않은 대신 큰 눈을 더욱 뜨며 가만히 있었다. 어찌나 얌전한지 처음 보는 외국인인 내 품에서도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사부작 거리고만 있었다. 불과 사흘 같이 지내면서 얼마나 안고 다녔는지 모른다. 내 마음도 이러한데 M의 마음이 저렇게 뜨거울 수밖에 없겠다 싶었다.


동생들을 살뜰하게 챙기는 M


  오래전 우연히 기회가 닿아 산골 깊은 곳에 있는 아이들 집에 방문했을 때, 어느 날엔가 마지막 방문해 저녁을 먹은 곳이 M네 집이었다. 집 앞에 아주 커다란 망고 나무와 잭 프루트 나무가 있었고, M의 가족들 모두 그 나무처럼 키가 길쭉길쭉 크고 얼굴도 똑같이 생겼으며, 그전에 만난 M의 두 여동생이 수줍어하면서도 아는 얼굴이라고 우리를 반가워해 주었다. 그렇게 신나게 웃으며 인사를 나누는 순간 갑자기 정전이 되었다.


  한국에서와 달리 인도에서는, 특히 여름에는 흔한 일이기 때문에 딱히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히 방금 앞을 보고 M의 아버지께 인사를 드렸는데 걸걸한 목소리로 뒤에서 대답이 들려오는 건 좀 놀라웠다. 산골의 맑은 달빛 아래, 급하게 켜 놓은 간이 전등 아래 본 그 얼굴은 분명 방금 온 M의 아버지 얼굴과 똑같았다. 의아한 얼굴로 다시 앞을 보니 거기도 아버지가 계신다. 우리는 M에게 물었다. 너희 삼촌이시냐고. 사실 질문이긴 했지만 서울 한복판에 떨어뜨려 놔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얼굴이었으므로 거의 확신을 가진 의문문이었다. 우리는 그다음에 쌍둥이시냐고 여쭤 볼 참이었다.


  그런데 M이 아니라는 것이다. 삼촌이 아니시라고? 얼굴이 핏줄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허스키한 목소리까지 똑같은데? 우리는 의아해하며 그럼 누구시냐고 물었다. M이 대답했다. "우리 아빠 동생." 누나 형들이 자기 집에 놀러와 부모님과 만나고 있으니 나름대로는 긴장을 해서 그랬던 것 같은데 우리는 어이가 없어 한참 웃었다.


  이제는 사춘기를 지나면서 M 또한 E와 마찬가지로 예전보다는 변죽이 좋아진 편이다. 가장 최근에 나와 헤어질 때 M은 내 손을 꼭 붙잡고 말했다. 디디, 제발 머리 자르지 말라고... (아이들이 사는 곳에서는 짧은 머리가 아직 드물다.) 머리를 자를 생각을 하고 있었던 나는 흠칫했다. 내 표정을 보더니 M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한 마디 더 덧붙였다. 디디, 지금보다 더 살찌지 말라고... 지금이 딱 좋다고는 말했지만 우리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해 내가 살이 많이 올라 있었으니 한 소리일 것이다. 다른 사람이 했다면 기분이 무척 나빴을 말 같은데, M이 해서 그런지 하나도 기분 같은 거 나쁘지 않았다. 다양한 미의 기준을 받아들이렴, 하고 그 손을 도닥여 주었지만 사실 잘 알고 있다. 내가 머리를 자르다 못해 삭발을 해도, 살이 지금보다 두 배는 찐다고 해도 M이 누나를 보는 그 미소는 변하지 않을 거라는 걸. M의 은은한 미소는 언제나처럼 매우 충직하다.



  다시 시계를 돌려 M이 삼촌더러 "아빠 동생"이라 했던 그날 밤, 간이 전등 아래서 M의 여동생 양옆에 앉혀 놓고 저녁을 먹고 집 밖으로 나올 때까지 전기는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M의 가족들과 함께 보낸 시간이 마음을 따스하게 밝혀 주어 불편함도 모르고 즐겁기만 했다. 이윽고 집 밖으로 나왔을 때 무심코 본 밤하늘은 내가 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한 별유천지였다. 펄 섀도처럼 반짝거리는 별의 입자를 바라보고 감탄하는 우리를 보고, 그 하늘을 매일 이고 사는 사람들도 함께 하늘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M의 집이어서였을까, M의 성격과 꼭 닮은 시간이었다.




  때로는 햇살 터지듯 까르르, 때로는 별 가득한 하늘처럼 은은하게... 웃어주는 아이들에게서 천국을 본다. 아마 그래서 웃음을 꽃에 비유하는 것 같다는 생각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24명 모두의 이야기를 한 바퀴 돌렸다. 그러나 모두 단편적인 기억의 조각을 퀼트처럼 이어 붙인 것뿐이다. 수많은 날들 중 스쳐간 한 순간을 모아 둔 것뿐이다. 게다가 아이들의 키가 자라고 마음이 넓어지고 시야가 깊어지고, 그렇게 어른이 되어 가면서 그들의 이야기는 끝없이 확장되어 갈 것이다. 그래서 과거를 보며 감사하고 미래를 기대하는 마음이 끝나지 않는다. 사랑이, 끝나지 않는다.


  아이들과 함께 보낸 그 시간은 지금도 내 마음의 가장 큰 자산이다. 우리는 넉넉하게 사랑받고 또 넉넉하게 사랑할 수 있는 힘을 받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랑을 우리끼리만 품지 않았다. 어린이날 맛있는 저녁을 먹으면서도 세상의 어딘가에서 고통받고 있는 다른 아이들을 생각하며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었고, 날마다 낙으로 삼았던 간식을 꾹 참고 그 돈을 모아 북한으로 보내기도 했다. 갖고 있는 소중한 것, 가장 좋은 것들을 모아 다른 사람들에게 주겠다고 가지고 나오던 때 아이들이 보여준 결연한 얼굴도 잊을 수 없다.


  에볼라가 유행할 때는 그 소식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세상 어딘가에서 분란이 일어날 때에는 또 그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는 세상의 다른 사람들도 같이 웃음꽃을 피울 수 있기를 바라고 이야기했다. 지금도 나는 시리아 내전이 사상 최악으로 치달은 기사를 보면서 우리 아이들이 흙 구덩에 묻힌 것처럼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다. 세상에 더 많은 웃음꽃이 피어나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주변으로 계속해서 가지를 뻗으며 자라 갈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온 후로도 그때처럼 항상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순간순간 아이들이 그리워 견딜 수 없는 때가 있었다. 2년 여를 함께 살았으니 당연했다. 아이들의 사진을 받아 보고 영상통화도 가끔 하지만... 3D로 아이들을 보고 싶다고 농담처럼 자주 이야기했다. 기술이 얼른 발전해서 언젠가 사진을 누르면 홀로그램과 햇살까지 떠오르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 봤다. 기술상 가능한지 어떤지까진 모르겠지만 사진에 동영상처럼 모션이나 음성까지 들어가는데 언젠가 홀로그램도 되지 않을까 막연히 꿈꿔 본다. 그렇게라도 먼발치서 아이들 보고 싶다고 염불 외듯 매일 이야기했다. 같이 다녀온 디디들끼리라 그 이야기는 마르고 닳도록 해도 지치지 않았다.



그러다 한국에 돌아온 지 2년이 되었을 때,

부끄럽지 않은 디디로 열심히 지내자며 부지런히 견딘 일상에 일시정지 버튼을 눌렀을 때.


꾹꾹 눌러 둔 그리움의 둑이 툭 터지고

나는 이 24명과 다른 모든 사랑했던 이들을 만나러 인도로 다시 떠났다.




2017년 9월, 다시 인도로. 이번에는 짧은 여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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