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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Mar 22. 2018

인도 영화관 체험기

써니디디 이야기 번외 편


  대학 다닐 때 일주일에 한 번씩은 극장을 찾곤 했을 만큼 영화관 가는 걸 좋아하지만 인도에 사는 동안은 영화관을 한 번도 가 보지 못했다. 인프라가 없기 때문은 아니었다. 인도는 명실상부 자타공인 영화 강국이고, 내가 살던 하이데라바드는 그중에서도 '필름 시티' 소리를 듣는 동네다. 발리우드의 힌디어 영화 몇 편에만 익숙한 우리 눈에는 조금 낯설지만, 하이데라바드 인근 지방에서 쓰는 언어인 '텔루구 Telugu' 영화 시장이 제법 탄탄한 편이다. 곳곳에 극장이 있음은 물론 아이맥스 극장까지 있었다.


  다만 무슨 영화가 언제 개봉하는지 신경 쓰지 못할 만큼 정신없는 날들이기도 했고, 판에 박힌 일상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기도 했을 뿐이다. 아침에 아이들 학교 보내고 오후에 아이들이 돌아올 때까지, 그 사이에 청소도 해야 하고 스태프 회의도 해야 하고 야채도 썰어야 하는 등등... 할 일이 언제나 줄줄이 땅콩처럼 있었다. 일주일에 하루씩 쉬는 날을 정한 후에도 갑작스러운 연락이 올 가능성은 언제나 있었고, 스스로도 영화 한 편보다는 한 토막 낮잠이나 커피 한 잔을 택하곤 했다. 정 영화가 보고 싶을 때는 방에 앉아서 한두 편 보는 정도였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야 인도 영화관을 처음 가 보았다. 아이들과 복닥복닥 지내다가 연휴가 끝나고 아이들이 학교로 돌아가자마자 쉬는 날이었다. 늦잠 자고 일어나서 동당거리다가 맛있는 점심 먹고, 카페에 앉아서 내일 방문할 에이즈 환자들 정보를 되짚어보고, 음악도 듣고 책도 읽고 쇼핑도 하고, 그러다가 마침내 영화 시간이 되었다. 팝콘을 한아름 사들고 영화관에 들어섰다.



  아이맥스 영화관은 아니었지만, 시내에 있는 여러 영화관을 다녀 본 친구가 개중에 제일 좋다고 했던 곳이었다. 영화관의 첫인상은 모든 게 극단적으로 크고 강하다는 것. 에어컨이 엄청 세게 틀어져 있었고, 스크린이 정말 어마무시하게 컸으며, 사운드도 무척 빵빵했다. 의자 높이보다 낮거나 비슷한 위치에 스크린이 걸려 있는 우리나라 영화관과는 반대로 거기는 스크린이 시야보다 높은 쪽에 있었다. 목 아플 정도로 높은 건 아니었고, 단차가 거의 없는 의자에서도 스크린 보는 데 지장이 없도록 높여 둔 정도였다. 그 덕분에 홀려 들어갈 듯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영화 시작 전에는 인도 국가가 나온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던 사실임에도 순간 놀랐다. National Anthem이라는 글씨가 뜨면서 반주가 나오면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 노래가 인도 국가라는 정도만 어렴풋이 알 뿐, 부를 줄도 모르고 부를 이유도 없는 외국인은 주섬주섬 일어난 채로 멀뚱히 서 있다.


  90년대에 태어난 나는 영화관에서 애국가를 불러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런 경험에서 생각할 수 있는 건 황지우의 시구밖에 없다. 애국가에는 새떼가 나왔다지만 여기 스크린에는 윈도 98 로고 같은 느낌을 주는 저화질 CG로 인도 국기가 스크린에서 펄럭거린다. 화질뿐 아니라 음질도 영 별로다. 한 번쯤 업데이트를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공익 광고로 곧바로 이어진다. 담배로 무슨 암인가에 걸린 사람들이 눈물짓는 모습 따위를 보여주며 협박 반 호소 반으로 담배를 끊자 하는 공익 광고 또한 놀라우리만큼 저화질이다. 어린 시절 비디오를 볼 때마다 '호환 마마가 뭘까' 궁금해하던 시간과 좀 비슷한 기분.


영화 티켓은 이렇게 생겼다. 가격 150루피(약 3천원).


  이 날 본 영화는 <킹스맨 2>였다. 킹스맨 전작을 못 본 나로서는 그 흐름을 따라갈 수 있을까 조금 걱정됐지만 멀티플렉스가 아니라 달리 선택권도 없었다. 다만 내겐 너무 생소하고 신기한 극장 분위기 때문에 염려도 금세 잊어버렸다. 속삭이는 소리마저 삼가야 하는 한국 극장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라, 모두가 웃고 싶을 때 깔깔 웃고 환호하고 싶을 때 환호하며 영화를 본다. 군무가 등장하는 인도 영화를 본다면 다 같이 일어나 춤을 추는 모습을 볼 수 있다던데 정말 그럴 것 같다.


  주요 캐릭터가 등장할 때마다, 스크린 속에서 제작비가 펑펑 터질 때마다 사람들은 마치 콘서트장에 온 사람들처럼 환호를 했다. 환호가 절정에 이른 건 Manner maketh man이라는 전작의 명대사가 등장한 때였다. 배우는 세 단어를 한 단어씩 끊어 천천히 발음했고, 한 단어가 끝날 때마다 환호와 박수, 휘파람 소리가 이어졌다. 그건 어쩐지 정말 유쾌하고 재미있었다. 나는 한국에서 소위 말하는 '관크'에 치를 떠는 사람이지만 여기는 아예 뮤직 페스티벌이라도 온 것처럼 소리치고 노는 분위기니까 그냥 같이 즐거웠다. 시끌시끌한 덕에 전편의 정보가 필요할 때마다 옆에서 친구가 귓속말로 상황 설명을 더해주기도 하여 즐겁게 보았다.


  인도 극장에는 인터미션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정말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예고도 없이 훅 끊기고 곧바로 광고를 내보내 줄 줄은 몰랐다. 유명 브랜드의 호화로운 광고부터 동네 가장 큰 보석상 사장님의 반질반질한 대머리까지 한참을 보고 있노라면 또 예고 없이 영화가 시작한다. 시작 전 광고와 중간 광고를 합치면 족히 30분은 잡아먹지만,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나오니 한밤중이 되어 있었지만 영화관을 나오는 사람 중 그 누구도 불만 없는 얼굴을 하고 있다. 나도 흐뭇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대기업의 멀티플렉스 영화관부터 인디 영화를 주로 상영하는 작은 극장, 단편 영화를 상영하는 6석짜리 극장까지 다양한 극장을 다녔지만 이 날만큼 독특한 경험은 없었던 것 같아 보석을 하나 주운 듯 흐뭇했다. 심지어 스리랑카에서 영화관에 갔을 때에도 이렇지는 않았다. 다른 극장들이 어떻다기보다는 인도의 영화관이 워낙 특이해서 그렇다. 인도의 영화관은 영화 보는 곳 이상의 의미를 갖는 곳 같다.


  하기야 영화의 의미 자체가 다르기도 한 것 같다. 한국도 영화 시장으로는 규모가 상당하지만, 규모 문제가 아니다. 인도는 그냥 모든 대중문화의 중심이 영화인 것 같달까. 한국은 영화와 가요가 분리되어 있되 그걸 넘나드는 아티스트들이 있는 느낌이라면, 인도는 인기 가요 목록이 곧 인기 영화 음악 목록과 진배없다는 느낌? 그래서인지 어딜 가나 영화 음악이 들려온다. 텔레비전을 켜도, 동네 아이들이 모여서 노는 옆을 지나갈 때에도, 택시를 탔을 때에도. 그 힘이 영화관에서 생생하게 느껴졌다.


언젠가 택시를 타고 지나갈 때 들은 이 흥겨운 음악도 유명한 옛 영화 음악이었더라. 복잡하지만 멋스러운 구시가지를 잠시 음악과 함께 걷고 싶으시다면. :-)


  다음엔 한 마디 못 알아먹는다 해도 인도 영화를 한 편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군무 팍팍 들어가 있고, 간드러진 여자의 미성과 눈을 능글맞게 치뜨는 남자의 허밍이 듀엣을 이루는 그런 전형적인 인도 영화로다가. 언젠가 다음번에 인도 여행을 올 때는 영화관도 꼭 코스에 넣어야겠다. 벌써 다음을 기대하며 설렌다. 인도는 늘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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