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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Apr 02. 2018

우리 동네 여행기

하이데라바드, 낯익고도 낯선


  아이들과 같이 살면서 같이 놀고먹고 자는 시간도, 에이즈 환자들을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이야기 나누는 시간도, 영화 보고 쇼핑하며 보낸 휴일도 모두 지나갔다. 나는 다시 공항에 와 있다. 아직 집에 가려면 일주일이 남았지만, 그 일주일을 함께 지낼 내 동생을 마중 나왔다.


  애초에 이번에 하이데라바드로 여행을 온 건 그리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역사학을 전공한 동생이 졸업 논문으로 하이데라바드를 담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학기 중에 시간을 내서 오는 것이라 일주일 이상 오기 힘들었던 동생은 나중에 합류해, 먼저 와 있던 나와 현지답사를 다니고 같이 집에 돌아가기로 했다. 하이데라바드에 살기야 했지만 그 역사에 대해 무지했던 나도 여기저기 다니며 이 도시를 더 알아갈 생각에 잔뜩 설레고 있었다.


차르미나르 근처 구시가지 (사진출처: https://www.flickr.com/photos/ryanready/6111054896)


  하이데라바드. 한국 사람들에게 익숙한 이름은 분명 아닌 것 같다. 인도 하면 대부분 델리와 뭄바이 정도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여기에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은 바라나시를, 신문의 경제면을 열심히 읽는 사람들은 우리 기업들이 많이 진출해 있는 벵갈루루나 첸나이를 떠올린다. 유적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카주라호나 아그라를 떠올리기도 하고, 인도가 친숙한 사람들은 각자의 기억 속 더 많은 도시를 생각하겠지만... 하이데라바드를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하이데라바드는 우리에게 그다지 친숙한 도시가 아니다. 일단 들어도 기억에 잘 남는 음절의 조합이 아닌 것 같다. 얼마 전 이방카 트럼프가 인도를 방문했다고 뜬 기사를 읽은 사람들도 하이데라바드라는 이름을 새겨듣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 또한 하이데라바드를 처음 가던 때 도무지 그 이름이 외워지지 않아서 "나 어디 간다고?"라고 같이 가는 이들에게 몇 번이나 묻곤 했으니까.


  그러나 하이데라바드는 인도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큰 도시다. 적당한 비유라 보기는 어려울 것 같지만, 아주 러프하게 뭉뚱그려 표현하자면 우리나라의 대구나 대전 정도 느낌이랄까? 광역시라서 내국인은 그곳을 모르는 이가 없는, 그러나 모든 외국인이 알지는 못하는 그런 곳. 하이데라바드는 중남부 정도에 있는 데다가 덥기로 악명이 높고, '하이테크 시티'로 불리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주변에 설명해야 할 일이 있으면 하이데라바드는 한국으로 치면 대구 정도의 도시라고 어렴풋하게 말하곤 했다.


  하이데라바드의 위상을 얼추 아는 사람들도 그 이면에 빛나는 역사가 있었다는 것까지는 잘 모른다. 인도는 인더스 문명부터 시작해 분명 독특하고 개성 있는 문화를 가진 나라이고, '인도 문화'라고 하면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특정한 색깔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타지마할과 갠지스 강의 강렬한 경험에 비하면, 규모로 보나 색채로 보나 하이데라바드에는 뭐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검색해 보아도 기껏해야 개선문 비슷하게 생긴 차르미나르, 탁 트여 풍광이 좋긴 하지만 다 무너진 요새일 뿐인 골콘다 포트 정도가 제일 먼저 나오니까. 아름다운 곳이고 한때는 코끼리 부대를 막아설 만큼 강한 요새이기도 했다지만... 과거의 영광일 뿐이다. 골콘다 포트를 만들던 시절, 하이데라바드의 군왕이었다는 하이덜(지금 도시의 이름은 그 명칭에서 따왔다)은 영국의 앞잡이 역할을 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골콘다 포트는 최근에서야 관리를 시작한 느낌이 좀 드는, 오랫동안 반 폐허 상태로 방치된 유적이다.


최근에야 관리를 시작한 골콘다 포트(Golconda Fort)


  당시 인도는 우리가 아는 커다란 한 나라가 아니라 조각조각 도시국가들이었다. 엄연히 주권을 가진 다른 나라들이었다. 하이데라바드보다 남부에 있는 마이소르의 군주가 영국과 끝까지 싸울 때, 하이데라바드는 영국과 공수 동맹을 맺고 "마이소르의 호랑이"를 사냥하려고 하였다. 단일민족 통일 왕조였던 조선과 일본의 관계와는 다르다는 걸 감안하며 이해해야 하지만, 그렇다한들 별로 좋아 보이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래서일까 골콘다 포트는 높은 곳에 올라가 시원한 바람을 맞을 수는 있을지언정 웅장하고 거대한 역사의 그림자가 느껴지지는 않는다.


  내가 하이데라바드의 역사에 대해 아는 건 이 정도였다. 식민지의 역사를 가진 나라에서 온 내가 이 정도 알았으니 당연히 반감이 들면 들었지 별로 매력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하이덜이라는 왕들이 역사의 그림자에 묻힐 때쯤 이곳에 '니잠'이라는 명칭을 쓰는 왕들이 들어섰다. 이들의 왕조는 북부의 무굴 왕조에서 갈래를 뻗어 나온 이슬람 왕조였다. 이때부터 하이데라바드는 이슬람 군주 아래 피지배층은 대부분 힌두교도인, 특이한 구조의 국가가 된다. 니잠은 우리가 이슬람 왕조 하면 흔히 상상하는 느낌의 화려한 부를 가진 왕들이었다.


오스만 알리 칸 (재위 1911-1950, 생몰 1886-1967)


  그중에서도 7대 니잠인 오스만 알리 칸은 1-2차 세계 대전으로 격동을 맞던 시대를 살았는데, 당시 시시콜콜한 가십을 실어나르던 어떤 서양 잡지들에서 그를 "세계 최고 부자"로 칭할 만큼 부요했다. 1차 대전 때부터 영국군에게 전투기 두 대를 구입해 헌납하고, 이집트나 터키 등의 격전지에 파병하여 승전에 힘을 보탰다. 그리고 2차 대전이 끝나고 1940년대에 인도 공화국이 세워질 때, 인도에 속하고 싶지 않고 차라리 파키스탄에 속하고 싶다며 격렬하게 거부했다.


  내륙 한가운데 파묻힌 나라가 파키스탄으로 갈 수 있을 리가 없기에,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말이 돼?” 하며 어이없어 한 기억이 난다. 결국 무력으로 정복당해 인도에 편입되지만 끝까지 인도의 도시보다는 하나의 독립국이 되고 싶어 하는 걸 숨기지 않았다.


  이렇게 들으면 한국인 입장에서 그가 썩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아무리 조선-일본 관계와 인도-영국 관계가 다르다고 해도 그렇지... 자기네 나라를 정복하겠다고 달려든 이들에게 전투기를 헌납하고 그들의 승전에 자발적으로 협력한 게 아닌가? 강제로 끌려가고 수탈당한 우리네 역사에서 그런 비슷한 모습을 보인 이들이 너무나 끔찍했기에, 이 모습을 좋게 보기 어려웠다. 그래서 동생도 논문 주제를 엮는데 난항을 겪었다. 의의를 찾을 수 없었으니까.


  국내에는 니잠을 다룬 논문이 단 한 편도 없다. 그럴 만도 하다. 인도사 중에서도 구석에 박힌 이야기니까. 몇 권 되지 않는 해외 논문과 책을 다 뒤적이며 동생은 한동안 골머리를 앓았지만, 그래서 조금이나마 그 짐 덜어주려 논문 몇 꼭지 번역을 도왔지만, 우리의 고생은 가치가 있었다.



  7대 니잠 오스만 알리 칸은 그 놀라운 부에 비해 검소한 생활을 하는 편이었다고 한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공치사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의 재위 기간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giving”이라 할 만큼 굉장히 백성들을 위하는 왕이었다. 말뿐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했다.


  1906년에 큰 홍수로 도시 전체가 아수라장이 되었을 때에도 그의 묵묵한 행동은 빛을 발한다. 그 아버지인 6대 니잠이 “전형적인 좋은 왕”의 아이콘처럼 여기저기 다니며 사람들을 위로하고 토닥이는 역할을 했다면, 아직 왕세자였던 7대 니잠은 그때부터 댐 공사를 해서 차후의 홍수를 예방함은 물론 도시 내 식수가 모자라지 않도록 신경 쓰기까지 하는 주도면밀한 일꾼이었다. 그는 부요한 왕조에서 나고 자란 사람답지 않게, 그 출신 배경이나 남다른 재산 규모를 생각하면 참 놀랍게도, 다른 이들을 위할 줄 알았다.


  그가 집권 당시 한 일들 중에는 오늘날 복지 사회에서나 이루어진 일들도 꽤나 많다. 공립 교육을 무료로 제공해서 가난한 집 어린아이들도 학교를 다닐 수 있게 했고, 대학도 세웠다. 자기들이 쓰는 말과 영어를 대조해 볼 수 있도록 사전도 편찬해 젊은이들을 부지런히 키웠다. 커다란 도서관을 짓고 시장을 보수하고 설탕 공장을 운영했다. 그가 당시 지은 병원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열려 있었고, 반듯하게 잘 지어둔 덕에 그 건물은 오늘날까지도 공립 병원이다. 그는 여러 사업에 감각이 있는 편이었지만 그 열매를 독식하는 게 아니라 도시 전체로 흘러가도록 했다.


  사실 굳이 돈 욕심을 낼 필요가 없을 만큼 그 자신이 물려받은 부가 유난스럽기는 하다. 온갖 진귀한 것들로 가득한 궁이 몇 채나 있었고, 도시 전체에 그의 소유라 부를 만한 공간이 셀 수 없이 많았다. 1930년대라는 우울한 시대에 하이데라바드 공항까지 만들었다. 그의 이름을 붙인 최고급 기차도 있었다. 서구의 잡지에는 그가 큼직한 다이아몬드를 문진으로 쓴다는 이야기가 가십거리로 실렸다.


  하지만 그는 그 유난스러운 부를 얄밉지 않게 쓸 줄 아는 사람이었다. 몇 안 되는 연구 결과들은 모두 그를 좋은 군주로 기억하고 있다. 너무 일면만 담으면 안 될 것 같아 비판거리를 찾으려 온갖 논문이며 오래된 책까지 다 뒤져 보았지만 그에 대한 비판은 찾을 수가 없었다. 물론 그가 좋은 사람이기도 했지만 그에 대한 자료 자체가 빈약한 탓도 있다. 그러나 역사가들을 만나 보아도 그에 대해선 칭찬을 늘어놓으며 여전히 그를 깊이 존경하고 있으니, 그 정도면 제법 좋은 사람이라 평해도 될 것 같다.


  그는 신중하고 사려 깊은 정치인이었고, 배포도 있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기억하는 친일파 누구누구들처럼 야비하게 영국에 들러붙는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말이 맞다면 그는 왜 영국에 전투기를 헌납했을까? 왜 자기 사병까지 동원해가며 죽을힘 다해 참전했을까?


  하이데라바드에 찾아온 유럽의 '거물급' 인사들을 만나 식사하고 대화하고 편지를 주고받은 기록까지 찬찬히 꺼내 읽으며 그의 행보를 천천히 좇다 보면, 그가 따라간 건 개인의 부와 명예가 아니었음이 명확해진다. 1차 세계 대전에 일본이나 중국, 미국 등이 끼어들어 세계 대전이 되긴 했지만 사실 그 시작도 격전지도 유럽에 있다. 7대 니잠은 아마도 유럽 열강들 사이의 패권 다툼이라는, 그 전쟁의 본질을 이해한 것 같다.


  그는 구차하게 저 자신만을 챙기기 급급해 영국에 들러붙은 날파리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패권 다툼에 어엿이 끼어들려 했던, 국제적으로 위상을 인정받고자 했던 한 용맹한 독립 군주였다. 자기 나라 국민들을 굶기면서 패권 다툼을 한다면 문제가 있겠지만 그는 자기 백성들의 먹고사는 문제는 물론 의료와 교육 서비스까지 철저하게 챙긴 왕이었다. 그 열매가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을 만큼 풍성한 나무를 몇 그루나 심어놓고, 그렇게 단단히 총알을 장전한 총을 들고 전쟁터에 나가려 한 것이었다.


  하긴 그렇다. 패권 다툼은 유럽 백인들만의 몫이 아니었다. 현실 국제정치가 언제나 패권 다툼이었다 한다면 어느 나라든 거기 끼어들 수 있는 것이다. 오래전 수나라의 멱살을 쥐고 흔들고, 당나라 군주의 눈에 화살을 쏘아 맞히던 고구려처럼, 니잠 또한 푸르고 너른 꿈을 꾸었던 것이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임에도 이 사실이 새삼 충격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아마 시대가 시대였기 때문이리라. 일본 같은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유럽 열강이 아시아와 아프리카 곳곳을 다니며 무고한 피를 흘리는 미개한 짓을 하던 시절이라, 식민지의 군주가 그들에게 당당히 맞서는 건 대개 실패로 돌아가던 시절이라.


  당시 많은 인도인들은 영국 손에 아프리카로 끌려가 중간 마름 역할을 했다. 당시 영국인들이 제 손 더럽힐 일을 인도인에게 많이 시킨 탓에 한편으로는 아프리카에서 중인 정도의 신분으로 자리 잡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반감을 많이 샀다고 들었다. 그 시절을 배경으로 한 문학 작품 속에서도 인도인들은 언제나 대사의 8할이 “사힙,”인 하인 역할이다. 영국인 뒤에서 묵묵히 충실한 하인이거나 몰래 음흉한 짓을 하는 범죄자이거나 뭐 거의 그랬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과 문학적 이미지가 '대체로' 혹은 '대다수'라는 말로 당대 인도인을 어떻게 규정하든, 인도 사람들의 자부심과 자긍심은 꼿꼿하게 살아남아 여태까지 흘러왔다. 그중에는 남들과 조금 다른 방법으로, 자기가 가진 재물과 배경을 도구 삼아 더 큰 꿈을 꾸었던 니잠도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도 만주 벌판을 호령하던 고구려의 기억이 남아 있는데 그럼에도 이 이야기가 낯설고 놀라운 건 어쩌면 내게도 잘못된 편견이 뿌리 깊게 박혀 있기 때문인 듯하다. 타인의 패권 다툼에 휘말리지 않고 제 나라가 스스로가 제 길을 가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는 어느 왕의 이야기가 한편으론 놀라우면서도, 그 이야기에 놀라는 나 자신이 충격이었다. 제3세계보다 유럽에 초점이 맞춰진 세계사를 배운 게 다여서...라고 변명을 해 보지만, 아무튼 이럴 때마다 찬물을 끼얹기라도 한 것처럼 정신을 화드득 차리고 반성하게 된다. 역사에서는 주어가, 그리고 행위 이면의 콘텍스트가 아주 중요하니까.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고는 하지만, 그 말은 그 뒤에 누군가가 최선을 다해 남겨 둔 기억을 무시하고 넘어가는 무책임한 태도를 방어하기 위해 쓸 말은 아니니까.




  우리는 니잠의 흔적을 찾아 하이데라바드 구석구석을 빙빙 돌았다. 한국에서 못 다 찾은 것들까지 여기서 찾으려면 일주일의 시간에 그다지 여유가 없었다. 7대 니잠의 생몰연도를 기준으로 보면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지만 그의 흔적이 잘 보존되어 있을지 기대하긴 어려웠다. 의도가 어떻든 인도 공화국으로부터 벗어나려 한 사람이었다. 군대를 몰고 와서야 가라앉힐 수 있었던 꿈을 꾸던 사람이었다. 그런 군주의 존재가 인도 중앙정부에게 달갑지는 않았을 테니 그 유적 보존 상태가 어떠할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도 모든 흔적은 여기 남아있을 테니 여기서 끝을 봐야 했다. 니잠의 도시, 이곳에서 찾지 못한다면 세상 어디서도 찾지 못할 자료를 찾기 위해 우리는 발걸음을 뗐다.


 

델리에서 왕과 왕비에게 인사하는 니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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