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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Apr 03. 2018

과거의 영광은 과거에만 있다

시간의 먼지를 털어내야 보이는 것들


  야심차게 시작한 여정은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우선 길잡이가 없었다. 한국에서부터 미리 인근 대학 사학과 교수에게 메일을 보내 두었고 기꺼이 도와주겠다는 답변도 받았지만... 하필 때마침 긴긴 연휴였다. 도움이 될 만한 책도 자료도 없었다. 그나마 가장 많은 정보를 열람할 수 있는 곳이 위키페디아였으면 말 다 했지. 우리는 발 닿는 대로 걸어 일단 가보기로 했다. 거기서 뭐라도 실마리가 되어 줄 만한 걸 찾길 바라며. 그러나 허탕과 허탕의 연속이었다.


  개중 가장 실망스러웠던 기억은 역시 킹 코티King Kothi 궁전이다. 아니, 킹 코티 궁전‘이었던’ 곳이다. 사실 여기서 허탕친 건 영어 읽기 귀찮다며 제대로 안 읽고 훌렁훌렁 글을 읽은 우리 탓이긴 하다. 그러나 아무튼 이름이 궁Palace으로 되어 있던 데다가 구글 지도에 오픈 시간이 나와 있었으므로 그 아래 “이 곳은 이상 궁이 아니며, 니잠 후손들은 이 집이 팔려나가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라는 누군가의 리뷰나 오래된 신문 기사까지 읽을 생각은 안 한 것이다.


구글에 킹 코티 치면 나오는 사진(출처 위키미디어)... 가서도 이것밖에 못 볼 줄은 몰랐다.

  주소를 정확하게 찍고, 택시 기사도 내비게이션을 몇 번이나 확인해 가며 도착한 곳인데 아무 것도 없었다. 큰길 바로 옆에 바리게이트를 치고 자물쇠로 단단히 잠가 둔 대문이 있었다. 그 대문이 궁으로 이어지는 길 같기는 한데... 때가 낀 자물쇠를 보아하니 이건 열었다 닫았다 하는 걸로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다른 쪽에 다른 문이 있겠지, 하고 벽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구글 지도 어플에 올라온 후기 중에는 멀리서 찍은 것이나마 궁전 사진이 있긴 했으니까. 비록 유리창도 깨져 있고 건물벽도 시커매진, 손길이 닿지 않은 건물 같았지만 뭐라도 있었으니까, 뭐가 될진 몰라도 뭐라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냥 그렇게 믿고 싶었는지도.


  그러나 현실이었다. 심지어 사진으로 본 것보다 훨씬 더 먼지에 뒤덮여 있어 온통 회색인 벽은 종종 노상방뇨 장소도 되어왔던 듯했다.


  우리는 당황해서 택시 기사는 물론 지나가던 젊은이까지 닥치는 대로 붙들고 킹 코티 궁전의 입구를 물었다. 다들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택시를 보내고 인근을 더듬거리듯 걷는 것밖에 달리 할 수가 없었다. 회색 벽을 따라 부지런히 걷고 있는데 갑자기 벽이 끊기고 웬 병원 대문이 나왔다.


  오래 전 에이즈 환자를 데리고 한 차례 와본 적이 있었던 공립 병원이었다. 아니 병원이 왜 여기서 나와? 당황스러웠지만 궁전 입구가 분명 여기 어디 있을 터였으므로, 우리는 갈팡질팡하며 병원 일대를 한 바퀴 돌았다. 걸으면서 자세히 보니 이 병원 건물도 그 즈음에 지은 것처럼 보였다. 대강 시멘트로 지은 건물이 아니라 제법 고풍스러운 건물이었다.


  병원 건물 뒤에는 높은 벽이 있고, 그 위에 그나마 고궁이라고 추측할 법한 지붕이 보였다. 주변 지대보다 높은 데다가 지붕 모양도 고풍스러웠다. 저기가 아닐까? 지붕 너머에 빨래가 펄럭이는 게 보였다. 누군가 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분명 누군가 오가는 문이 있다는 건데... 높은 벽에는 아무 문도 없어 외부인을 차단하겠다는 의지가 명확해 보였다.


  근처를 서성이다 만난 간호사에게 물어보니 한참을 갸우뚱거리다가 큰길로 돌아가면 노란 대문이 나오니 그리로 들어가라 말해 주었다. 우리는 결국 그 당황스러운 회색 벽으로 돌아갔다. 벽을 타고 반대방향으로 걷기 시작하니 이내 노란 대문이 나왔다. 여기일까. 문을 두드려 보았다. 아무 대답이 없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킹 코티(King Kothi) 궁전'이었던' 곳의 노란 대문


  노란 대문 안은 바깥과 전혀 다른, 아주 조용하고 시공간이 멈춰 있는 듯한 세계였다.

  바깥의 소음이 무색하도록, 들꽃 산들거리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먼지와 오물에 뒤덮인 칙칙한 회색 벽도, 클랙슨을 울리며 오고가는 수많은 차들도, 병원 앞에 지루하리만큼 길게 늘어서 있는 환자들의 줄과 그들의 푸념도, 병원 문앞에서 과일이나 간식 따위를 팔고 있는 무수한 장사어치들의 우렁찬 목소리도... 그 안에는 없었다.


  다만 거기에는 아주 오래된 건물이 하나 있었다. 보수되지 않았음에도 어딘가 기품이 느껴지는 건물이었다. <비밀의 정원>에 처음 들어설 때 기분이 이러할까. 오래 전에는 붉은 색이었을 나무 덧창이 거의 떨어지다시피 매달려 있었고, 커다란 석조 건물에는 덕지덕지 이끼가 끼어 옛 영광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오토바이 한 대가 서 있었다. 그건 궁궐이라는 장소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골목길에서나 보던 생활의 모습이었다. 그 모든 부조화에도 무너지지 않는 어떤 당당한 기운이, 살랑거리는 나뭇잎 그림자에서조차 느껴졌다.


  조금 더 발을 떼어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어쩐지 그러면 안될 것 같아 머뭇거리는 사이 어디선가 수위가 나타났다. 미안하다 인사하며 이러이러한 이유로 들어왔는데 혹시 여기가 킹 코티 궁전이냐 물었으나 수위는 사무적인 얼굴로 우리를 내보냈다. 수위는 맡은 일을 할 뿐 딱히 위협적이지 않았다. 우리도 이 장소가 완전히 금지된 곳이라는 걸 눈치채며 불만없이 나왔음에도, 쉴 새 없이 먼지 일으키는 차가 쌩쌩 지나가는 도로에 서서 망연자실했다. 그제야 킹 코티 궁전에 대한 최신 정보를 더 꼼꼼하게 읽기 시작했다. 궁으로 개방되어 있는 곳이 아님을 이때야 알았다.



  킹 코티 궁전은 애초에 카말 칸이라는 사람이 지은 저택이었는데, 7대 니잠이 이를 구입해 곳곳에 새겨진 '카말 칸K. K' 이니셜을 '킹 코티K. K'라는 의미로 바꿨다. 킹 코티는 왕의 저택이라는 뜻이다. 그가 13살이었을 때 들어와서 그의 재위 기간 내내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선대인 6대 니잠까지 역대 니잠들은 대부분 쵸마할라 궁전에 살았으니 그곳이 말하자면 법궁이다. 우리 논문 주제는 7대 니잠인 오스만 알리 칸이었으므로 이곳을 먼저 찾아온 거였다.


  하지만 궁과 그 영광은 이미 옛날에 조각조각 찢긴지 오래였다. 궁을 삼분했다고 한다. 왕이 집무를 보던 동쪽 건물은 병원으로 바꿨고, 서쪽 건물은 니잠의 개인 재산으로 남겨두어 오늘날까지 니잠의 후손들 소유라 했다. 나머지 한쪽은 아예 1980년대에 철거해서 모자란 병원 건물을 짓는 부지로 삼았다 한다. 원래 니잠이 궁을 비울 때마다 커다란 대문을 들어올려 니잠의 부재를 표시하곤 했다는데, 이제 니잠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대문도 영영 닫혀 버렸다.


아직 니잠이 살아있던 시절. 벽도 건물도 먼지 하나 타지 않아 새하얗다.


  니잠 후손들의 소유인 서쪽 건물도 그들 손에서 팔려나가기만 기다리는 신세라 했다. 인도 공화국 안으로 편입되고 나서도 명목상의 8대 니잠을 세우고 나름대로 니잠의 명성을 이어가고자 했지만 잘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잘 될 리가 없다.) 다만 이들의 자존심만은 여전하여 가공할 만한 금액을 제시했고, 이 건물은 매입해봐야 상업적으로 이용해 먹기 쉽지 않은지라 영 팔리지 않아 애를 먹고 있다고 한다.


  2011년 기사에 나온 내용이었는데 이제야 읽었다. 이 기사 하나만 더 읽었다면 오지 않았을 곳이었는데... 이렇게 왔으니 이건 행운일까 불행일까. 오래 전의 모습이라도 보고 싶어서 우리가 뒤질 수 있는 자료는 모두 뒤졌으나 킹 코티 궁전의 사진은 물론 그림조차 나오지 않았다. 완전히 감춰진 공간이었다.


이 모든 건물이 지금은 벽 뒤에 꽁꽁 숨어 있다.


  어쩐지 속이 쓰렸다. 잘 정돈하고 보수해서 박물관처럼 보고 싶은 마음은 그냥 스쳐 지나는 나그네의 마음일 뿐이다. 니잠은 당장 몇십 년 전에 사라진 왕조고, 몇십 년 전이면 아직 지역 해방을 꿈꾸는 이들의 폭탄 테러가 신문에 나던 시절이었다. 아니 최근에도 그런 뉴스는 알음알음 있었으니, 사실 지역색 다툼이 여전히 현실에 남아있는 나라였다. 그런 곳에서 자신을 벗어나려 했던 옛 왕조의 유물을 어마어마한 돈 들여 정돈해줄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니잠 소유의 궁이 이 도시 안에 몇십 개나 되었다는데 궁 하나쯤 잊히는 건 일도 아닐 터였다. 그러나 이 도시의 구석구석을 돌아보던 이의 흔적이 그 어디보다 짙게 남은 곳인데, 지금은 이 도시의 누구도 그를 돌아보지 않는 현실이 어쩐지 씁쓸했다. 뭐 어쩌랴. 날고 기었던 이들 모두 잊히는 게 응당 인간사인 것을. 인생무상이고 화무십일홍. 그저 중얼거리며 돌아설 뿐이었다.




  아쉬운 대로 다른 궁을 찾아보기로 했다. 우리의 다음 목표는 팔락누마Falaknuma 궁전이었다. 가서 뭘 보게 될 지 알 수 없었던 킹 코티 궁전과 달리, 팔락누마 궁전은 도착하면 무엇을 보게 될 지 확실했다. 팔락누마 궁전은 인도의 대형 호텔 체인인 타지Taj 그룹에서 인수해 호텔이 된 지 오래였다.


오늘날의 타지 팔락누마 팰리스 호텔, 1900년의 팔락누마 궁전


  팔락누마 궁전은 니잠의 기록을 훑다 보면 단락 건너 단락마다 나오는 곳이다. 팔락누마라는 단어는 "하늘의 거울" 혹은 "하늘 같은" 이라는 뜻이란다. 궁전 이름부터 천상의 장소로 만들고자 한 의지가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화려하다 싶은 행사는 죄다 배경이 팔락누마 궁전이다. 거물급 인사들과의 만찬도 죄 이곳이라 책 속의 웬만한 일화는 다 팔락누마 궁전을 배경으로 적혀 있었다. 당시 영국 왕이었던 조지 5세와 그 아내였던 메리 여왕을 비롯해 왕가의 일족 여럿이 다녀갔다고 한다. 이 궁궐의 벽은 온갖 중요한 일을,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빠르게 주판을 굴리는 대화를 다 지켜보았을 것이다.

  

팔락누마 궁전 내부


   정보를 영 찾기 힘든 킹 코티 궁전과는 달리 팔락누마 궁전은 호텔이 되어 있기 때문에 인터넷에 그 내부 사진도 제법 많이 있었다. 가격이 만만할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찾아 봤다가 하룻밤에 50만원을 훌쩍 넘는 가격을 보고 마음을 접었다. 대신 호텔 레스토랑이 있을 테니 거기서 차라도 한 잔 하고 와야겠다 싶어 택시에 오른 참이었다. 북적거리는 시장 거리에서 방향을 꺾어 한 블럭 정도 가니 아무도 없는 숲길이었다. 공기가 달라졌다.



  하지만 아쉽게도 팔락누마 호텔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그 길에서 돌아서야 했다. 숲길 모퉁이에 벌써 커다란 게이트가 있고 직원들이 예약자 번호를 확인했다. "숙박할 게 아니어도 예약해야만 하나요?" 그렇다고 했다. 스리랑카의 마운트 라비니아 호텔 같겠거니 생각하고 그냥 온 게 화근이었다. 아무튼 결론은 또 허탕이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애프터눈 티 세트도 20만원을 호가하는 가격이었던 데다가 다음 날로 미룰 시간도 없었다. 우리는 조용히 팔락누마 궁전 견학을 포기했다.




나중에 쵸마할라 궁전에서 발견한 안내판


  7대 니잠의 흔적은 아직도 도시에 가득하다. 에이즈 환자들을 데리고 갔던 공립 병원도, 지나가는 길에 본 법정도 모두 그의 작품이었다. 신공항이 들어서기 전인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그가 지은 공항으로 비행기가 오고갔으며 그가 지은 대학교는 물론 동명의 비스킷까지 있을 정도다. 그럼에도 정작 그 자신의 기록을 찾기란 너무나 힘이 들었다.


  아니 그래도 기록은 차라리 나았다. 정말 힘이 빠졌던 건 길 가던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젊은이나 대학생들조차도 그를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불과 100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역사였다. 이 정도로 도시와 사람들을 위해 헌신한 왕이라면 후대에서 기억할 법도 한데... 그는 너무 빨리, 너무 쉽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역사의 뒤안길"이라는 입에 밴 비유가 이렇게 씁쓸하게 들어맞는 상황도 없었다.


  우리는 답답한 마음을 안고 더위와 맞서 싸우는 심정으로 실마리를 찾아 헤맸다. 다행히 이후로는 조금씩이나마 순조로워지는 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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