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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Apr 07. 2018

두 개의 도서관

책에 남은 흔적

  실마리다운 실마리를 찾은 건 의외로 도서관이었다. 한국에서 리서치할 때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니잠과 조금만 관련이 있으면 닥치는 대로 찾아가다가 니잠이 지은 도서관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The Central Library, 중앙도서관. 여느 대학이나 있을 법한 그 이름 어디에도 니잠의 향기는 느껴지지 않았고 그래서 사실 큰 기대는 없는 방문이었다.


  도서관에 장서가 많다고 하긴 어려웠다. 영어, 텔루구, 힌디 등 다양한 언어로 섹션이 나뉘어 있으니 우리가 볼 수 있는 책이 더 적다는 걸 감안해도 애초에 책장과 선반의 수가 턱없이 적었다. 책장 근처에서 기웃거리는 우리를 사서가 불러 무슨 책을 찾냐 물었다. 우리 대답을 듣고 그는 몇 권의 책을 꺼내 주었다.


시간 여행을 시켜준 고마운 책

  큰 기대 없이 편 책에는 생각보다 많은 정보가 있었다. Great War가 무슨 전쟁을 얘기하는 거지 생각하다가 불현듯 이때는 아직 "1차 세계 대전"이라는 용어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순간 시간의 흐름이 나를 훅 덮쳐왔다. 서지에서 확인한 책의 발행 연도는 1929년이었다. 아직 2차 세계 대전 발발 전이므로 1차라는 구분도 없을 때였고, 니잠 왕조가 생생하게 살아 있을 때였다. 그래서 왕의 명칭도 시호가 아닌 당대의 경어로 His Exalted Highness라고 적혀 있다. 원래 His Highness였다가 1차 대전 때 영국을 위해 활약한 공로로 Exalted를 붙여 격상시킨 호칭이다. 심지어 왕의 초상화가 나오는 페이지마다 얇은 미농지를 덧대어 놓았다. 고귀한 왕의 사진이니 베일처럼 한 겹 덮어 보호하는 것이다.


  평일 한낮이라 사람이 많지 않았고, 사서들은 그만하면 제법 친절한 편이었다. 도로의 경적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려왔고 바람마저 숨을 죽여, 도서관 안은 적당한 백색소음뿐이었다. 높다란 천장에 달려 있는 조명에서, 구식 창문과 계단에서 20세기의 느낌이 물씬 풍겨 왔다. 비둘기들이 안팎을 부지런히 오가고 있는 건 좀 당황스러웠지만, 그것만 빼면 과거를 산책하기엔 완벽한 오후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책 한 권 덕분에 우리는 닫혀 있는 베일을 살짝 열고 왕의 시공간에 잠시 다녀온 기분이 들었다. 덕수궁을 걸으면서도 고종이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은 한 번도 느껴보질 못했는데, 이렇게 머나먼 곳에서 잘 알지도 못하던 왕의 재위 시기를 생생하게 엿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라니.


  니잠의 시대를 고스란히 살아낸 책을 소중하게 살살 만져 보았다. 책의 저자는 선대 니잠까지의 자료를 간략하게 추리고 당시로선 현재였을 7대 니잠의 사진과 서신 따위까지 많이도 담아 놓았다. 이런 책의 존재를 당시 니잠이 몰랐을 리 없다. 어쩌면 니잠의 지시로 쓴 책일지도 모를 일이다. 찾아보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굳이 거기까지 알고 싶지 않았다. 오래전 성당 천장에서 본 낡은 성화처럼... 아무리 목을 빼고 자세히 보려 해도 멀리에만 있는 그런 그림 같았다. 그 기분으로 그냥 있고 싶었다.


책에 실린 도서관 정면 그림과 실제 도서관 정문


  도서관에서는 정숙하라는 메시지가 붙어 있었다. 행여나 책이 구겨질까 조심하는 우리는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큰 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때 저기 복도 끝에서부터 왜소한 남자 하나가 걸어왔다. 남자의 손에는 종이컵 한 줄과 보온병 하나가 들려 있었다. 짜이 파는 사람이었다. 인도 사람들은 보통 하루 몇 번씩 따스한 밀크티를 마시기에, 공공장소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행상이었다. 혹 기차에서 마주치면 목에 확성기라도 숨겨 놨나 싶을 만큼 힘차고 커다란 발성으로 “짜이 짜이 짜이 짜이~ 짜이!”를 외쳐 외국인들이 감탄하게 만드는, 그런 이들이었다.


  그런데 정숙해야 한다는 이 도서관에서 짜이 아저씨요? 얼추 보던 책을 다 보았을 때였으므로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그 정적인 방에서 유일하게 동적인 그를 눈으로 좇고 있었다. 과연 그도 놀라운 발성을 보여줄까? 아니면 아무 말 없이 지나갈까?


  그는 힘차게 외치지도, 말없이 지나가지도 않았다. 대신 목 안에서부터 힘껏 누른 듯한 목소리로, 작지만 모두에게 들릴 만큼 선명하게 “짜이.”라고 한 번씩만 말하며 돌아다녔다. 짜이 아저씨 나름의 ‘정숙’이었다. 우리는 마주 보고 키득키득 웃었다. 정숙의 기준보다 중요한 오후의 차 한 잔... 그래서 우리도 커피를 마시러 떠났다. 니잠의 궁을 떠나 오는 기분이었다.





오스마니아 대학 본관, 그때 당시 지어진 그대로다.

  연휴가 끝나고 우리의 일정도 끝나갈 즈음 우리는 가까스로 오스마니아 대학교를 찾아 역사학과 교수를 만나볼 수 있었다. 교수는 인도의 그리고 한국의 수많은 어른들이 그러하듯, 적당한 프라이드에서 나오는 관대함으로 젊은이들을 맞아 주었다. 머나먼 외국에서 웬 학생들이 와서 자신이 존경하는 왕을 주제로 논문을 쓰고 싶다 한 상황이니, 방송국 인터뷰라도 응하듯 한껏 말을 곱게 고르는 태도가 이해되었다.


  학과장을 겸하고 있는지라 아침부터 제법 많은 사람들이 교수실을 바삐 드나들었는데, 다들 우리에게 잘 찾아온 거라면서 교수를 한껏 올려 세웠다. 우리에게 하는 말이되 사실 우리에게 하는 말은 아니었다. 이 상황에 교수는 제법 뿌듯해하며 향긋한 차를 한 잔씩 내주었다. 모든 장면이 너무나 인도다운 여유와 존중의 표현법이다. 그는 언젠가 학회 때문에 한국에 간 적이 있다며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다. 정장과 어울리지 않는 하늘색 털모자가, 외람된 표현이지만 귀엽기도 했다. 다소 과장된 어투로 하던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런 교수가 싫지 않았다.


오스마니아 대학 본관 내부. 당시 얼마나 잘 지었는지 볼 수 있다.


  오스마니아 대학교는 7대 니잠이 세운 학교다. 그가 꿈꾼 패권 국가의 청사진에서 젊은이들을 키우는 일은 당연히 중요했을 것이다. 초등교육은 의무교육이자 무상교육으로 진행했다면, 고등교육인 대학은 여럿 세우고 물심양면 지원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당시 오스마니아 대학교의 기본 언어는 우르두(인도 무슬림들이 쓰는 언어. 구어로는 힌디와 거의 비슷하지만 아랍어로 표기함)였는데, 자기 색깔을 잃지 않는 인도 사람의 소신이 엿보인다. 하지만 동시에 우르두-영어 사전을 빠르게 간행한다든지 학습 교재를 낸다든지 하면서 젊은이들이 영어 실력을 갖출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갔다.


  우리가 방문한 교수실에도 7대 니잠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학교의 창시자이기도 하고 교수가 존경하는 인물이기도 한 것 같았다. 우리도 내심 7대 니잠을 좋아하면서도, 논문의 밸런스를 위해 한계로 기록될 만한 걸 조심스레 물었지만 그의 입에서는 좋은 말만이 줄줄이 나왔다. 전에도 언급했듯 기록이나 자료가 충분히 남아있지 않아서 약점이나 한계까지 충분히 반영되지 못한 건 좀 아쉽다. 그런 말을 해줄 법한 사람들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주요 정치인들의 기록만이 남아 있으니 니잠에 대해 비판하는 이야기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가 정말 좋은 사람이었던 것도 맞지만, 사람은 다 다면적이고 정치인은 더욱 그럴 테니 다양한 면면을 보고 싶었는데... <조선왕조실록> 같은 느낌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도 아무튼 현대 역사학자들의 의견을 직접 인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우리는 감사의 표시로 미리 준비해 간 선물을 내밀고 작별을 고했다. (여담이지만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문화재 굿즈라고 해도 될 만큼 예쁘고 퀄리티 높은 물건들이 많다. 일상에서 쓰기도 좋은 아이템들인 데다가, 독특하면서도 고급스러워 선물하기 좋다.)



  우리는 오스마니아 대학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100루피였던가를 내면 일일 패스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쓰면 간단해 보이지만 사실 도서관 카운터에서 보내는 대로 관장을 만났다가 어디를 갔다가 하여튼 나도 모르고 관계자도 잘 모르는 듯한 행정 절차를 따르며 한참 기다린 끝에 발급받은 것이었다.


  로비에 테이블을 깔고 책을 늘어놓으며 장식하는 사람들이 가득해 기다리는 동안 저건 뭔가 하고 들여다보니 다 UN 관련 자료였다. 더듬어 보니 그 날이 10월 24일, 국제연합 설립 기념일이었다. 과거를 헤매고 다니다 갑자기 젊음과 현재를 느끼는 순간이었다. 나도 대학 떠나온 지 오래되지는 않았는데... 바로 얼마 전까지 UN의 구조 같은 걸 공부하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그 모습에서 신선함을 느끼다니 기분이 묘했다.


국제연합일을 기념해 로비를 장식하고 있었다.


  책장이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옛날 영화에서 자주 본, 서지가 들어있는 작은 서랍과 검색용 컴퓨터를 이용해 필요한 책이 이 도서관에 있다는 건 확인했는데... 아무리 그 안을 들여다 보아도 학생들이 앉아서 공부하는 공간만 보일 뿐 책장은 통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쓰레기장인가 싶었을 만큼 책상을 온갖 책들로 뒤덮어 두고 학생들은 자리를 비운 열람실을 몇 개나 지났다. 자리에 앉아있던 학생들 중 몇몇이 우리를 의아하게 보며 도와주었지만, 그들도 역사책이 있는 서고를 알지 못했다. 우리는 도서관을 다 뒤진 끝에 마지막으로 한쪽 구석에 있는 작은 계단을 내려가 보았다. 서고가 지하에 있었다.


서고에는 책이 가득했지만 상태가 썩 좋지는 않았다.


  규모가 크지 않은 서고는 두어 칸이었는데 그중에 한 칸은 아예 불이 꺼져 있었다. 공포 영화에서 저런 데 들어가면 죽던데... 다행히 우리가 찾는 900번대 역사 서적들이 있는 칸은 거기가 아니었고, 그나마 밝은 칸에 있었다. 우리는 그때부터 말없이 책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니잠 자체를 다룬 책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아주 조금이라도 근거가 잡힐 만한 책이면 일단 펴서 뒤적여야 했으므로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영화 <러브레터>나 <귀를 기울이면>을 보면 책마다 붙어 있던 도서 카드를 정리하는 장면이 나온다. 두 영화는 1995년 영화이니, 도서관에 바코드 시스템이 자리잡기 시작한 게 일본 기준으로 그즈음이란 뜻이다. 우리나라도 아마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도는, 언제나 태고와 최첨단을 동시에 보여주는 이 나라는 도서관 시스템도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어떤 책은 바코드가 붙어 있고 어떤 책은 도서 카드가 꽂혀 있었다. 어떤 도서 카드에 마지막으로 쓰여 있는 날짜가 1961년이었다. 1961년이면 아직 우리 아빠가 태어나시기도 전인데 그때 이후로 대출되지 않은 책이라니 놀랍다. 책은 군데군데 좀먹어 구멍이 나 있기도 했고, 그렇게 몇 권 뒤적이다 보니 손에 지문 모양으로 새카만 먼지가 묻어 어디다 푹 찍으면 도장처럼 자국을 남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중에서도 우리가 참고할 만했던 책.


  필요한 페이지를 핸드폰으로 찍거나 노트에 적으면서 한참 시간을 보냈다. 한편으론 볼 만큼 봤다 싶고 한편으론 너무나 지쳐 우리는 서고를 나왔다. 오스마니아 대학교 내부는 어쩐지 인터넷이 잘 터지지 않아 택시를 부르기 어려웠으므로 할 수 없이 후문까지 털레털레 걸었다. 후문의 구멍가게에서 사이다 한 병과 물 한 병을 사고 집까지 돌아오는 택시 안 우리는 김장 배추처럼 절어 있었고 별로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가 걸어 다닌 서고는 현재의 공간인가 과거의 공간인가. 현재다운 것보다 과거의 것들을 더 많이 보고 듣고 매만지면서, 기묘한 기분을 느낀다. 그건 시간을 걸어 다니며 그 흔적을 주의 깊게 살피는 사람이라면 느끼는 피로감일 것이다. 유적지나 유물이 아닌, 하필 책이라 더했는지도 모르겠다.


  책은 읽는 사람에게 어마어마한 족적을 남기지만, 책을 읽은 사람도 그 책에 크고 작은 족적을 남긴다. 밑줄을 긋거나 메모를 한다면 말할 것도 없거니와 꼭 그렇지 않더라도, 책 페이지를 거칠게 넘겨서 미세하게 구겨진 자국이라든지, 끝까지 읽으면 책등에 남는 줄이라든지,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모서리가 살짝 해진다든지 그도 아니면 책 아랫면에 남는 손때라든지... 어떻게든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때문에 평소에 나는 아주 깨끗한 것이 아니라면 중고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며, 같은 이유로 도서관의 책들에도 큰 애착을 느끼지 못한다. 이상하게 책은 새것을 사서, 내 손에서 어떤 흔적이 남든 부담 없이 편하게 보아야 그 책에 애착이 생겼다.


  그런데 아주 오래 전의 학생들이 적어 둔 제 이름을, 그 이름 위를 벌레가 오르내리며 파 먹은 흔적을, 왕이 살던 시대에 덧대 붙인 미농지를, 그 왕이 죽은 지금까지 고이 보관한 책의 종이를 만져 보면서 너무 많은 사람의 흔적이 한 번에 몰려오니 피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쓸데없는 상상력마저 발휘하게 만드는 이야기들 때문에 아주 많은 사람들과 함께 걸어 다닌 기분이었다.


  니잠이 만든 두 개의 도서관은 둘 다 이제 어언 백 년쯤 된 공간들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오고 갔으며,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뒤를 쫓아 그곳으로 달려갔을까. 평소에는 느끼지 못하는 세월을, 기묘한 여행 안에서 실감하고 간다.


  이제 이 도시가 니잠의 흔적을 가장 잘 보관해둔 곳으로 갈 차례였다. 구태여 기억하려 애쓰지 않은, 그러나 흔적이 남아있는 이런 자리에서 더 니잠이 가깝게 느껴졌지만, 아무튼 보관된 기억이 훨씬 많으므로 그걸 다 훑어보아야만 했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니잠을, 그리고 그가 살아생전 가까이했던 물건과 사람들과 사진을 보러 떠났다. 다음 목적지는 니잠의 법궁인 쵸마할라 궁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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