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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Apr 17. 2018

온기가 머물던 자리

남는 건 결국 그뿐

2013년 1월 초, 구시가지를 처음 갔을 때.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아마 더 오랜 세월 그 모습 그대로였겠지.


  단기봉사 팀으로 하이데라바드에 처음 왔을 때 구시가지는 얼마나 날 당황하게 만들었는지. 내가 지금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엄벙덤벙 차에 올라 한참을 가다가 도착해서 본 그 정신없는 광경에 어안이 벙벙했다. 사람도 너무 많고 릭샤도 너무 많고... 꼭 누가 타임랩스로 촬영해 빠르게 재생시킨 장면처럼 모든 게 나를 휙휙 스쳐갔으며 그와중에도 작은 거지 아이들이 우리 발치에서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돈을 주지 않을까 하는 눈빛으로.


  그런 정신없는 관광지에서 아이가 불쌍하다고 함부로 돈을 내주면 정말 위험하다. 외국인이라 가뜩이나 눈에 띄는데다가, 그런 아이들 모습이 한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지라 우리는 모진 눈빛을 하지 못한다. 그 눈빛만으로도 아이들에게는 충분한 기대감이 되는데, 거기다가 돈 줄 마음이 있다는 것조차 캐치하면 여지껏 있는지조차 몰랐을 만큼 수많은 거지들이 우르르 몰려든다. 차에 타고 있어도 고사리 손으로 차창을 쾅쾅 두드리는 일이 있을 정도이니, 그러다 보면 상황이 얼마든지 위험하게 번질 가능성도 있다. 당시의 나는 안쓰러운 눈빛을 아이들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눈을 돌리려고 애쓰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동네에서 마주치는 거지 아이들에게 현금 대신 먹을것을 사 쥐여주는 생활을 배운 건 아직 한참 나중의 일이었으므로.


차르미나르와 바로 이어지는 시장. 여기 가면 늘 정신이 없다.

  하필 우리가 가기 몇 주 전 폭탄 테러였던가 무슨 사건이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제복을 빼 입은 경찰들이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철조망 같은 작은 바리케이트까지 쳐 놓아 분위기가 유난히 뒤숭숭했다. 차르미나르Charminar는 나름대로 멋진 건축물이고 하이데라바드의 랜드마크라고도 할 수 있는데, 첫인상이 그랬기 때문인지 나는 딱히 정이 가지 않았다. 그 뒤에 모스크가 있는 것까진 보았어도 바로 옆에 궁전이 있다는 것도 아주 나중에야 알았다.


  그리고 이제야 그 궁을 가 본다. 장식이 반짝이는 화려한 예복, 진주와 금붙이, 무슬림들이 쓰는 예식 도구부터 싸구려 찻잔과 향유까지 온갖 것들을 다 파는 시장 한 구석에, 마치 거짓말처럼 입구가 있었다.


  입구로 들어서니 그곳은 전혀 다른 세계였다.




  쵸마할라 궁Chowmahalla Palace은 우리에게 익숙한 용어로 말하자면 법궁이다. 차르미나르 바로 뒤에 있기도 하지만 그 이름도 비슷한 뜻이다. 힌디로도 '차르(짜르)Char'는 4를 뜻하지만 우르두와 페르시아어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차르미나르는 '4개의 미나렛'이라는 뜻이다. (외래어 표기법으로는 '미너렛'이 맞지만 나는 밸런타인, 핼러윈, 미너렛 이런 표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냥 미나렛으로 쓰겠다.)


  미나렛은 모스크 건축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부분으로, 우리가 보기에는 뾰족한 첨탑 같은 느낌이다. 무슬림들은 하루 5번의 예배를 드리므로 그 시간에 맞추어 '아잔'이라는 알림을 한다. 멋모르는 한국인 귀에는 구성진 노랫가락처럼도 들리는데, 이 아잔을 미나렛에 올라가서 한다. 요즘은 스피커를 쓰기도 하지만 원래는 육성으로 외치곤 했으니 높은 곳에 올라 크게 외치는 게 중요했을 테다.


  미나렛의 수가 많을수록 중요한 모스크인데, 성지 메디나에 있는 모스크의 미나렛이 6개다. 터키에 있는 블루 모스크는 그 제작자가 “금” 미나레를 만들라는 말을 “여섯 개” 미나레를 만들라는 걸로 잘못 알아듣는 바람에 '감히' 메디나의 모스크와 똑같이 미나렛을 6개나 세운 모스크가 되었다고 한다. 잘못 알아들은 게 아니라 그런 척했다는 말도 있지만.


  아무튼 차르미나르는 모스크가 아니라 한 바퀴 돌아볼 수 있을 정도의, 개선문 비슷한 구조물일 뿐이다만, 그 의미 자체가 “4개의 미나렛”이라는 뜻이다. 역병이 물러간 것을 기뻐하며 지은 건축물이라 하는데, 그 기쁨이 얼마나 컸을지 혹은 자기 힘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얼마나 컸을지 대충 예상이 간다. 그 바로 옆에 있는 쵸마할라는 “4개의 궁전”이라는 뜻이다. 차르미나르보다 좀 더 후대에 지어졌으니 차르미나르의 위엄까지 묶어서 다 니잠의 위엄으로 소화하려고 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쵸마할라 궁전은 고풍스럽고 아름답기 그지없다. 원래는 45에이커였다고 하니 평수로 치면 대략 55,000평 정도였는데 지금 남아있는 공간은 12에이커로 대략 15,000평 정도다. 숫자를 뭉텅뭉텅 잘라내서 이야기해도 얼추 4분의 1 정도밖에 남지 않은 셈이다. 그럼에도 기품이 줄줄 흐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원래는 얼마나 화려하고 위엄 넘치는 공간이었을까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나마 아쉬운 대로 지금 모습을 볼 수 있게 된 것도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공식적으로는 7대 니잠이 마지막이었지만, 니잠 일가는 그들만의 즉위식을 진행하며 8대 니잠을 추대하는 등 공식적인 행사를 진행하고 여전히 쵸마할라를 궁궐로 여겼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을 언제까지고 역행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결국 니잠 일가는 궁궐을 보수하고 박물관처럼 꾸며 2005년부터 일반에 공개하기 시작했다.


  니잠이 탔던 롤스 로이스 자동차부터 니잠이 입던 옷, 니잠이 신던 신발과 궁궐에서 쓰던 식기들까지 잘 보관하고 있어 구경할 만하다. 차르미나르만 보아도 너무나 정신이 없고 더위에 지치지만, 조금 더 힘을 내어 쵸마할라 궁전까지 보고 가야만 하이데라바드가 역사에서 현재로 넘어오는 고리를 제대로 구경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쵸마할라 궁전의 시계탑. 저 시계는 250년 넘는 시간 동안 부지런히 침을 옮겨 왔다.


  과거에서 현재로, 역사에서 시사로... 그 부산한 흐름 속에서도 조용하고 고고하게 앉아 있던 궁이었다. 궁에게도 인격이란 게 있다면 아마 모든 것을 체념한 이처럼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노인의 얼굴이 아닐까 싶다. 수없이 많았다던 별궁 대부분이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려울 만큼 사라져 버렸고, 흔적이나마 남아 있는 곳도 큰 호텔 체인의 소유가 되거나 도시 구석에서 이끼를 뒤집어쓰고 있으니. 그 모습을 지켜보느니 그냥 가만히 눈 감는 게 속 편했을 것이다. 지상 최대의 부를 소유했던 왕좌는 이제 비어 있다. 도시와 백성이 부요하기를 꿈 꿨던 왕의 야망도 잠들어 있다.


비어 있는 왕좌


  새들이 날아오르고 사람들은 그늘에 앉아 바람을 맞는, 고요하고 아름다운 오후였다. 과거의 영광은 다 흘러갔고, 오래 전 꾸었던 단꿈은 저물었다. 다만 그 인간적이었던 온기만은 아직도 여기 남아 구시가지 한켠의 휴식 공간이 되어 주고 있다. 이곳의 나무그늘 아래 앉아 있는 사람들은, 이곳을 거니는 사람들은 그 니잠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쵸마할라 궁에 있는 기록화와 사진, 서신들


  그는 당대에 사랑 받는 왕이었고 그의 기품과 야망은 멀리 다른 나라에까지 알려졌다. 그는 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그 생전의 명성이 무색할 정도로 사후에는 조용히 잊혔다.


니잠이 쓰던 물건과 식기, 당시의 연회 풍경


왕조를 지키기 위한 무기들. 그러나 진짜 왕조를 무너뜨리는 건 이런 무기로 막을 수 없었다.


  모든 역사의 사건과 문서는 시간이 가면 의미가 바랜다. 당대엔 가장 숨막히는 첩보전이었을 비스마르크의 조약문들은 이제 외교를 공부하는 이들의 연구 자료일 뿐, 케케묵은 종이가 되었다. 한때엔 살을 베어내는 현실의 고통이었을 크고 작은 전쟁들은 이제 이야기로만 우리의 피를 뛰게 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이야기를 인물로 기억한다. 철과 혈을 힘주어 이야기했을 비스마르크를 본 적도 없지만 단호한 칼날 같았을 그 눈빛을 상상하고,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다는 이순신을 본 이가 이젠 더 없건만 우리는 그 놀랍도록 올곧은 투지를 어렵지 않게 그려본다.


  모든 사건과 의미가 뼈대만 남기고 흘러간 자리에 남는 것은 사람이다. 시간의 방향이 반대여도 마찬가지다. 1945년 8월 15일이 우리의 광복일이었지만 그전부터 제 삶을 던진 독립운동가들에게서 미리 꾼 광복의 꿈을 볼 수 있으니. 결국 사람의 온기가 남아 있는 한 어느 한 조각의 역사도 온전히 다 흘러간 게 아니며, 미래를 꿈 꾸는 것도 여기 머무는 사람의 온기 덕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니잠이라는 인물도 그 역사도 다 옛 이야기가 되었지만 아주 가버리진 않은, 그래서 그 온기가 머물러 따스한 오후 산책이었다.



<베일을 쓴 레베카>와 살라르 정 3세


  살라르 정 박물관Salar Jung Museum의 “살라르 정”은 가문 이름이다. 니잠 곁에서 대대로 재상 직을 도맡았던 가문이었다. 큼직한 주요 회의 기록마다 정Jung이라는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니잠만큼은 아니어도 이 가문 또한 어마어마한 부를 누렸다. 7대 니잠이 “세계 최고의 부자”라고 서양 가십지에 오르내릴 때 그 재상인 살라르 정 3세는 수집광으로서 자기 콜렉션 만들기에 열심이었다. 20대에 재상 직을 물려받은 후 35년간 결혼도 하지 않고 골동품부터 예술품까지 부지런히 모아들이는 데에 일생을 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중에 하이데라바드를 인도 정부가 무력으로 정복한 후, 당시 인도의 총리였던 자와할랄 네루는 이 공간을 그대로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인도에서도 손 꼽히는 규모인 데다가 그 보유물도 여간한 것들이 아니다. 아우랑제브 대제의 검, 인도 근대 미술사의 전설 같은 인물인 라자 라비 바르마의 그림들, 타지마할을 만든 샤 자한 황제나 그 아버지인 제항기르 황제의 단검 같은 것들이 있다...고 위키페디아가 알려주긴 했는데. 내가 그런 걸 봤다고? 전혀 모르겠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라, 아우랑제브와 샤 자한을 “아 그래 세계사 시간에 그런 이름의 왕이 있었지” 정도만 아는 나로선 그런 걸 본 기억이 없다.


  그보다 기억에 깊이 남은 건 세밀화다. <내 이름은 빨강>에도 많이 묘사되는 바로 그 그림이다. 무굴 왕조는 사실 외래 왕조이다 보니, 이런 세밀화도 인도 전통 예술이라기보다는 이슬람 왕조의 예술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고운 직물을 생산하고 화려한 장식을 좋아하는 인도 사람들답게, 자기 왕조의 인물들부터 일상의 인물들, 더 너머 힌두 신화 속 인물들까지 섬세한 붓끝으로 그려냈다. 옷 위의 꽃무늬와 나뭇잎 하나까지 대충 뭉갠 곳이 하나도 없다. 금박 장식은 금색 물감으로, 진주 장식은 흰 물감을 콕콕 찍어서 질감을 살려 그려냈다. 보석보다 빛나는 그림들이었다.


진주와 금박의 질감마저 살려 그렸다.


감격하며 본 세밀화들


꽃과 나뭇잎 하나 뭉개지 않았다.


  말로만 들어본 상아 공예품도 있었다. 상아 하나를 들고 어떻게 저렇게 깎아낼 수 있을까? 공 안의 공 안의 공 안의 공...으로 만들어냈는데 그 장식이란 것이 참 화려하면서도 일정하여 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장인의 일평생을 바쳐야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작품을 이렇게 순식간에 스쳐가는 건 예의가 아닐 듯해 한참을 바라보았다. 작살에 찔린 코끼리의 고통스러운 얼굴이나 술 한 잔 걸쳐 불콰해진 노인의 미소 같은 감정 표현조차 생생하여 더욱 놀라웠다.


공 안의 공 안의 공 안의 공...
어르신 약주 한 잔 하셨어요? 어딘가 도교적인 느낌이 들었던 조각품.


  중국이나 일본에서부터 수입한 공예품도 있었지만 그런 건 그냥 지나쳤다. 살라르 정이 가구와 시계를 유독 좋아했던지 가구와 시계에만 어마어마한 공간을 할애했는데, 나폴레옹 시대의 귀한 것들도 있다고는 하나 뭣도 모르는 내 눈엔 그냥 고급 가구점처럼 보여 적당히 보고 지나쳤다. 좋아 보이긴 했지만 박물관이 워낙 넓어 그것까지 다 들여다볼 시간이 없었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다.


이런 공간... 흥미로웠지만 그래도 급히 훑어만 보고 지나쳤다.
이런 것도 굉장히 귀중하겠지만 우리는 훌렁훌렁 지나쳤다.


  대신 살라르 정 박물관에서 제일 유명한 시계는 보았다. 매시간 한 번씩 남자 모형이 튀어나와 망치로 때리고 들어가는 복잡한 모양의 시계였는데, 몇백 년째 한 번도 멈추는 일 없이 계속 가고 있는 시계란다. 이 시계가 박물관의 명물인지라 아예 앉아서 구경하도록 앞에 의자가 쭉 깔려 있고, 모형을 잘 볼 수 있도록 영상으로 따로 확대해 띄워 주기도 한다.

 


  운 좋게 우리는 모형이 나오는 시간에 거길 지나간 덕에 자리 잡고 앉아 모형을 보았다. <귀를 기울이면>에서나 보던 시계였는데... 얽힌 이야기가 더 있을 것 같아 궁금하지만 알 길이 없으니 그 몫은 상상에 넘겨 두고 박물관에 있는 또 하나의 명물을 찾는다.



  <베일을 쓴 리브가>는 분명 돌로 만든 조각임에도 실제로 천을 뒤집어쓴 것처럼 부드러워 보이는 질감 때문에 유명하다. 저게 만두 피가 아니라 돌이라니 놀라울 뿐이다. 둘레에도 사계절을 상징하는 요정인지 여신인지 하는 다른 조각상들이 함께 놓여 있고, 이 또한 특별히 따로 방에 전시해 두었다.


베일 아래 표정마저 눈빛마저 보일 것 같은 기분.
손끝에서 흩어지는 천은 밀가루 반죽처럼 고울 것만 같지만... 돌이다. 뒤에 계절의 요정 석상도 보인다.


  별로 인도다운 느낌도 아닌, 유럽 느낌이 물씬 나는 이런 물건들을 인도에 와서 보고 있는 게 처음에는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내 마음이 바뀌었다. 모든 문화재를 자기 자리로 돌려주고 나면 대영 박물관이나 루브르 박물관이 절반 이상 비어 버린다지, 아마.

  인도나 아프리카의, 심지어 그들의 식민지도 아니었던 한국의 유물도 유럽에 있는 경우가 있는데 역으로 유럽의 유물이 인도에 있는 게 안 될 건 또 뭔가. 그 격랑의 시기에 국적을 잃은 것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니잠에 이어 살라르 정 또한 당시 패권에 뒤지지 않는 모습으로 내게 신선한 관점을 던져 준다. 인물의 온기는 여기에도 남아 있었다.




  견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하이데라바드가 이제는 달리 보인다. 쇠락한 영광, 앞잡이의 땅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내가 영 모르던 하이데라바드를 알고 보니 더욱 이곳이 좋아진다. 그러나 이제는 이별이 코앞이었다.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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