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이정 May 11. 2018

기억은 족쇄보다 강하니

묶인 모든 것 풀고 날아오른다


  역사는 결국 사람이 살다 간 이야기이다. 그 무수한 이야기를 다 남길 수는 없기에 이따금 우리는 이름 몇 개씩을 묶어 기억하기도 한다. 때로는 부부를, 때로는 막역지우를, 때로는 세기의 라이벌을. 이런 이름들은 묶어 부르는 게 너무 익숙해 가끔은 외따로 부르기가 어색할 정도다. 오성과 한음, 다윗과 골리앗, 헬렌 켈러와 설리번 선생님 등등... 당사자 간에 주고 받은 다양한 감정과 업적을 후대 역사가들이 뜨개질하듯 부지런히 엮어 낸 결과물들이다.


  그러나 어째서일까. 당사자들끼리 접점이 거의 없음에도 온전히 후대의 편의에 의해서만 묶이는 이름들도 가끔 있다. 단단한 공통점을 가운데 두고, 일부러 양쪽으로 벌리기라도 한 것처럼 대치되는 삶을 산 이들이 종종 그런 기억으로 남는다. 같은 시기 같은 방향으로 같은 문학으로, 그러나 전혀 다른 느낌으로 살았던 육사와 동주가 그렇게 느슨하게 묶인 대표적인 예다.


  마찬가지로 어쩐지 묶여 있는 이름들이 난설헌 허초희와 사임당 신씨(어린 시절 위인전에서 '신인선'이라 읽었지만 사실 이름이 정확히 기록된 문헌은 없다고 한다)다. 여성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당대의 예절로 인해 우리에겐 허난설헌, 신사임당이라는 호칭으로 더 익숙한 이들이다.


  우리가 이들을 비교/대조하며 묶어 보는 이유는 우리에게 전해져 오는 여류 문학가의 이름이 많지 않은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빼어난 예술가였으며 동향이기까지 한 공통점에 비해 두 사람의 인생이 너무나 극과 극처럼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생가 터에 있는 난설헌 허초희 동상


  난설헌 허초희의 생애를 아는 이라면 누구나 그 인생의 비극성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허난설헌의 아버지 허엽은 서경덕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동인 중에서도 중추적인 인물이었다. 당대에도 나름대로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지만 그의 호인 '초당'이 순두부 앞에 붙어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걸 생각하면 의외로 우리에게도 가까운 인물이다. 그 본인을 비롯해 그 자식인 허성, 허봉, 허초희 그리고 허균 모두 글에 재능이 있었다. 오죽하면 다섯 모두를 묶어 5문장으로 불렀을까. 지금도 이들의 생가 터에 가면 다섯 개의 시비가 나란히 서 있다. 그 중에서도 허균이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건 두 말 하면 입 아픈 이야기다.


  허엽은 여자인 허초희를 포함해 집안 모두가 글을 배우도록 했고, 이때 서자 출신 학자인 이달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안티테제'를 허하지 않는 조선 사회에 들어맞지 않는 인물들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율곡 이이를 탄핵하다 유배길에 오른 허봉이나 왜란 중에 이름 없이 고생하고 사망한 허엽까지야 그렇다 치더라도, 진위야 어떻든 역적 이름이 붙어 능지처참으로 사망한 허균 이야기까지 듣고 나면 마음이 편치가 않다. 허균이 죽기 1년 전 죽은 허초희 이야기까지 살펴보고 나면 대체 이 집안에 무슨 마가 끼기라도 했나 간담이 서늘해진다.

허난설헌의 <묵조도>

  허난설헌은 8살 때 지은 시로 신동 소리를 들었고, 그가 지은 시는 중국까지 흘러가 여러 사람 입에 오르내리며 격찬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그가 쓴 유선시(遊仙詩)가 유명했다 하는데, 신선이 노니는 도교적 느낌이 얼마나 환상적인지 그의 시를 읽어내려가다 보면 허난설헌의 머릿속이 궁금해진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얼마나 많은 색채가 펼쳐지고, 얼마나 자유로운 동물들이 뛰놀며, 얼마나 아름다운 선녀들이 세상을 주사위판 삼아 노닐었을지. 그러나 넓고도 푸른 상상력은 곧 힘을 잃었다.


  유선시를 쓰던 사람과 규원가를 쓴 사람이 같은 이라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을 정도다. 신선 세계를 노래하며 구슬 같은 시를 짓던 이가 "삼춘화류 호시절의 경물이 시름업다(버들잎 돋는 좋은 시절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아도 아무 생각이 없다)"고 한탄하기까지 대체 허난설헌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정확한 사정은 당사자들만 알겠지만 후대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만 들어도 그의 시집살이가 녹록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남편 김성립은 본인보다 글재주가 뛰어난 아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소인배였으며 자연히 시집 전체적인 분위기도 그러했다. 규원가에서 묘사하는 바대로라면 집은 나몰라라한 채 새 기생이 들어왔다고 호사스러운 옷차림으로 놀고 있는 남편의 모습도 모습이지만, 그런 남편에게 응수할 때조차 시를 써서 보내는 잘난 여자는 시어머니에게도 눈엣가시였다.


  본인의 재능이 얼마든지 인정 받았던, 자유롭고 행복했던 친정이 얼마나 그리웠을까. 그러나 그리움에는 이내 우울한 시름이 더해진다. 아버지의 사망 소식은 허난설헌의 어딘가를 무너뜨렸다. 불행은 혼자 오지 않는다 했던가, 자식들마저 앞세우게 되면서 허난설헌의 세계는 날이 갈수록 서글퍼진다. 두 무덤 나란히 앞에 두고 두 아이의 넋이 밤이면 같이 놀 것이라 생각하며 시를 쓰는 어미의 심정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줄줄이 이어지는 친정 식구들의 불행한 소식을 듣다가 뱃속의 아이마저 잃고, 허난설헌은 유언 같은 시를 미리 남겨둔 다음 27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다.


碧海浸瑤海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靑鸞倚彩鸞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芙蓉三九朶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紅墮月霜寒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왜 하필 스물 일곱 송이였을까. 동생 허균은 누나가 분명 죽음을 예견하고 남긴 시라고 생각했다. 정확한 이유는 허초희 본인만이 알겠지만 아무튼 그의 시처럼 '차갑기만' 한 죽음이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할 말을 잃게 하는 삶이다. 그나마 허균이 능지처참 당하는 꼴만은 보지 않아 다행이라는 게, 또 그렇기 때문에 그 동생이 난설헌의 시를 묶어 문집으로 만들 수 있었다는 게, 그렇게 조선 최초로 여성이 쓴 문집이 우리에게 전해졌다는 게 유일한 위안이라면 위안이랄까.




  그에 비하면 신사임당의 삶은 매우 안정적으로 보인다. 사임당 신씨 또한 어린 시절부터 충분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부터 시와 그림에 재능을 보였는데, 신사임당의 화훼초충도는 오늘날의 눈으로 보아도 섬세하고 아름답다.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아름다운 그림이다. 시와 그림뿐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글 공부를 하여 성리학에도 밝았다고 한다.


신사임당의 그림들. 현대의 눈으로 보아도 아름다운 디자인들이다.


  허난설헌과 얼핏 비슷해 보이는 삶이 달라지기 시작하는 것은 결혼부터다. 나름대로 뼈대 있는 안동 김씨 집안에서 대대로 과거에 합격해온 집안 출신의 김성립에 비하면, 신사임당의 남편 이원수는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가문이 나쁘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어릴 적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즉 조선에서 이렇다 할 사회적 울타리가 없는데다가 그 자신도 아직 관직이 없는, 존재감조차 미미했을 선비였다. 신사임당의 부모는 아마 신사임당이 대단한 남자의 옆에서 숨죽이고 살기보다는 그 재능을 썩히지 않을 수 있을 만큼의 집안에서 하고 싶은 걸 하며 살기를 원했던 것 같다. 이미 신사임당의 부모부터가 그런 삶을 살았기에 충분히 가능한 그림이었다. 친정에 남자 형제가 없이 딸만 있었으므로 친정을 남들보다 자주 오가도 크게 흠이 되지 않았다. 여러 모로 운이 좋았다.


  김성립에 비해 이원수가 그런 아내를 잘 받아들인 편이기는 하지만, 그도 '잘난 아내'를 온전히 사랑할 만큼 생각이나 도량이 넉넉한 사람은 아니었던 듯하다. 결국 이원수는 나중에 외도를 하면서 신사임당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이원수는 끝내 외도 상대 여성을 첩으로 들여 신사임당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신사임당은 자신이 죽어도 그를 본처로 들이지 말라 하고, 두 사람은 언쟁을 벌였다. 신사임당이 조목조목 하는 말에 이원수는 반발할 말을 찾지 못했지만, 어차피 죽은 사람은 말을 할 수 없으니 신사임당 사후 결국 첩이었던 권씨를 본처로 들였다. 주막집에서 일하던 권씨는 신사임당과는 전혀 결이 다른 인물이라 자식들이 고생을 좀 했다. 이런 집안 분위기 때문에 훗날의 대학자 이이도 한때는 가출 청소년이었다.


율곡 이이

  이이의 심경이 충분히 이해가 가는 것이, 이이를 길러낸 건 8할이 신사임당이었다. 어린 시절 고사리 손 잡고 강릉 오죽헌과 파주 율곡리를 오가며 함께 시를 말하고 이이의 재능을 꽃 피웠다. 그런 어머니를 사랑한 이이는 아버지의 재가를 끝끝내 반대하며 아버지와 갈등을 겪었다. 신사임당의 병이 깊어질 때 이이가 보이지 않아 가족들이 찾아보면 사당에서 매일 어머니를 위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지금 들어도 마음이 뭉클하다. 이이뿐 아니라 '작은 사임당'이라 불렸다는 큰딸 매창을 비롯해 다른 자녀들 모두 신사임당의 먹물 끝에서 자라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린 아이들을 죄다 앞세운 허난설헌에 비하면 비교적 풍성해 보이는 삶이다. 게다가 신사임당의 자식이 훗날 구도장원공 대학자가 되면서 그 어머니로서 자연히 칭송을 받았다. 우암 송시열을 비롯한 당대의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과연 그 율곡의 어머니”라며 한껏 치켜세웠다. 오늘날까지도 현모양처의 대명사는 두말할 것도 없이 신사임당이라 이야기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허난설헌만큼은 아니어도 신사임당 또한 후대의 틀에 갇힌 인물이다. 재미있는 것은 틀에 갇히는 방식조차 두 사람이 정반대라는 점이다. 허난설헌은 당대 질서에 걸맞지 않은 인물이어서 갇혔다 한다면 신사임당은 당대 질서를 표방하는 틀에 갇혔다고 볼 수 있다.


  신사임당을 '율곡의 어머니'에 가두지 말고 그 스스로가 훌륭한 예술가였다는 점을 강조하는 이야기는 이제 조금씩 들려오는 것 같다. 예상외로 폭삭 망하긴 했지만 <사임당, 빛의 일기> 같은 드라마도 결국 신사임당을 신사임당이라는 사람 자체로만 보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었던 것 같다. (안 봐서 모르지만 대충 보도자료나 예고편 보면서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다만 예술가 신사임당을 이야기하는 이들조차 신사임당에게서 '현모양처'를 벗겨내는 데에는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현모양처가 뭐가 나빠? 아무튼 현명한 어머니, 좋은 아내였던 건 사실인데?"라는 게 주요 논리다. 사실 단어 자체의 뜻만 보면 맞는 말이다.


  다만 현모양처가 정말로 신사임당을 일컫는 말이었는지는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조선 시대의 이상적 여인상은 현모양처가 아니었다. 생각해 보자. 기억할 만한 여인이 생기면 열녀문을 세웠지 현모양처문을 세우지 않았다.


이전까지 우리가 알던 신사임당의 모습

    현모양처는 조선 때는 없던 개념이다. 개화기에 현모양처라는 개념이 처음 생겨났을 때까지는 말 뜻 그대로라서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1930~40년대 일본이 황국 신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의 여성들을 "현모양처"로 만들어, 그 여성들이 키우는 자녀들도 "바르게" 자라는 걸 목표로 삼았다는 게 문제였다. 1930~40년대의 "올바름"이란 곧 일제에 충성하는 황국신민이었고, 이렇게 대놓고 말하면 너무 티나니까 현모양처가 조선에서 온 개념인 '척'을 했다.


  유신 독재 시기에는 한 술 더 떠 여기다 집안 생계를 꾸려가는 이미지까지 밀어넣었다. 원래도 훌륭한 인물이었던 이순신을 '장군'이라는 호칭으로 묶기 위해 더욱 올려세우던 때의 일이다. 이때 자기들의 목적을 위해 신사임당의 이름도 같이 올려세웠다. 5만원권이 나오기 전까지 우리가 신사임당 하면 떠올리던 그림도 사실은 이때 그려진 것이었는데, 머리 모양이며 한복의 고증이 맞지 않는다. 심지어 그린 사람은 친일 논란이 명백히 드러난 친일파다. 어딜 보나 신사임당을 위한 신사임당은 아니었던 것이다.


5만원권

  5만원권에 신사임당의 얼굴이 실릴 때 일각에서 반대의 목소리가 나왔던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반대의 목소리를 낸 쪽에는 여성 단체들도 있었다는 게 얼핏 보면 아이러니해 보이지만, 사실은 이제라도 신사임당을 오롯이 신사임당으로만 보고자 하는 이들의 목소리였다. 이순신을 더 이상 우리가 군사 독재기의 이미지와 묶어 보지 않듯, 신사임당 또한 잘못된 역사의 그림자에서 놓여나게 해주자는 것이다. 신사임당이 율곡의 어머니로만 기억될 게 아니라 한 사람의 당당한 예술가였다고 인정한다면 현모양처라는 단어로부터도 신사임당을 기꺼이 놓아주어야 한다.




허난설헌 생가 터, 기념관.


  강릉에는 오죽헌과 허난설헌 생가 터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허난설헌이 원래 살던 집은 추후 허물어졌고, 지금 있는 건물은 다시 지어 올린 것이라, '생가 터'라 부른다.) 허난설헌 생가 터에 가면 허난설헌 동상과 시비는 물론 작은 기념관도 꾸며져 있다.


  관리자 중 누군가 캘리그라피 연습삼아 열심히 적은 듯한 시구나 예쁜 인사말들이 전시관 곳곳에 붙어 있다. 꽃이 색색깔로 가득 피어 있는 정원도 정성어린 손길을 받은 티가 물씬 난다.



  한쪽에는 자수 전시나 전통 차 실습을 위한 공간도 있고, 그곳을 모두 한복 곱게 입은 여성들이 지키고 있어 '여성 친화 도시 강릉'이라는 표지판의 글씨가 결코 흰소리만은 아니어 보인다.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기에 독특한 지방색으로 발전했다는 영동 자수 문양을 보여주시거나, 한과와 차를 내어주시는 모습에서는 자부심마저 느껴져 보기 좋았다.


  그 강릉에서 나고 자란 두 여인을 기억해 본다. 실상 한국사에서 가장 유명한 여인을 말해 보아도 넉넉잡아 20명 안에는 들 것 같은 이들이지만, 당대에도 이후에도 필요에 의해 이런저런 족쇄에 묶였다 풀렸다 하는 신세였다. 우리가 이순신의 우직하고 단단한 마음을 볼 때 임진왜란은 이야기의 배경이 될 뿐이듯, 정조의 유쾌하면서도 너른 시선을 기억할 때면 어지러운 정세는 정조가 헤쳐가야 할 장애물이 될 뿐이듯... 이제 신사임당의 야무진 손끝과 허난설헌의 고고한 상상력에서 풀어져 나오는 이야기에 좀 더 집중하여, 두 사람을 둘러싼 배경은 배경으로 물러나게 하자. 기억은 족쇄보다 강하니, 묶인 모든 것 풀어내고 날아오른다.




* 허난설헌 시 역 출처: 위키백과

* 사진 출처

5만원권 https://www.flickr.com/photos/137346712@N07/27780279061


* “현모양처” 어원 설명은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 (박은봉 저, 책과함께)를 참조하였습니다. 가벼운 줄글이다 보니 직접 인용하지 않고 기록하였는데, 혹 문제될 경우 알려주시면 내용을 지우겠습니다. :-)

 (+글 내용과 별개로 이 책은 정말 추천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