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이후에는 권력이 없다
왕은 주목 받는 자리 그 중에서도 중심에 있고, 자연히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긴다. 세상은 넓고 또 왕도 많았기 때문에, 역사학자 외에는 아무도 들춰보지 않는 기록에만 겨우 자리한 왕도 있고 그런 기록조차 남지 않은 왕도 있는가 하면, 본인과 무관한 땅까지 널리 이야깃거리를 퍼뜨리고 떠난 왕도 있다.
• 루이 14세 •
태양왕 루이 14세는 그 중에서도 유독 많은 이야기를 남기고 떠났다. 습지였던 외딴 지역에 그 웅장하고 화려한 베르사유 궁전을 지은 사람, 하이힐과 가발을 비롯한 화려한 옷차림의 근원, 수많은 여성과 염문을 뿌렸던 사람, 절대왕정기를 빛낸 태양왕, 심지어 오만 병력까지 다 알려진 왕이 얼마나 될까.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은 많지만, 비교적 덜 알려진 사실은 그가 놀라운 춤꾼이었다는 사실이다. 왕이 다른 이들 앞에서 덩실덩실 춤을 춘다니 체통이 없어도 한참 없는 일이라고 여겨질 것 같은 우리 상상과는 달리, 루이 14세에게 춤은 자신을 과시하는 도구일 뿐 아니라 정치적 메시지를 담아 전달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절대왕정기. 갈기갈기 찢어진 중세 봉건 유럽에서 왕이 권력을 잡기 시작한 시기다. 보통 절대왕정기의 특징 하면 상업을 중시해 국가의 부를 쌓는 데 집중했다는 의미의 “중상주의” 등 교과서에서 본 용어들이 먼저 떠오른다. 그러나 루이 14세가 절대왕정기의 태양왕이라는 별명을 얻은 데에는 그의 정책들 못지않게 그의 춤이 큰 역할을 했다.
금빛으로 번쩍거리는 옷을 입고 태양신 아폴로를 상징하는 분장을 한 채로 춤을 추는 그 모습을 본 이들이 태양왕이라는 별명을 붙였다고 한다. 예술을 사랑해 마지않는 왕이 몸소 춤을 추기까지 하는 분위기이니 여태까지 이름을 알릴 정도로 굵직한 예술가들이 프랑스의 절대왕정기에 많이 나타난 것이 놀랍지 않다. 몰리에르, 라신 등이 다 이 시대 사람이었다.
그들에 비해서는 덜 알려져 있지만 루이 14세의 춤이라고 하면 연관 검색어처럼 떠오르는 인물이 장 밥티스트 륄리라는 인물이다. 루이 14세, 태양왕, 춤, 하면 그 다음 단어는 륄리가 떠오르게 만든 것은 어디까지나 영화 <왕의 춤Le roi danse>의 힘이다. 영화는 번득이는 황금색과 그림자의 짙은 색 위주의 색감으로 이루어져 있어, 바로크 그 자체를 떠오르게 한다.
바로크는 "일그러진 진주"라는 뜻의 단어에서 출발했다. 바로크 시대는 그래서 웅장하고 화려하지만 한편으로는 기괴하고 어둡다. 섬세한 로코코 시대에는 그림자 위로 옅은 햇살이 아른거린다면, 바로크 시대는 극도의 양달과 극도의 응달이 바로 옆에 공존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달까. 실제로 바로크 미술은 빛과 어둠의 대비를 강조하니 영 틀린 비유도 아닌 것 같다.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면 어둑한 배경 속에 묻히듯 있는 사람들 사이 누군가는 꼭 빛을 발하는 것처럼 빛나고 있거나, 얼굴만 조명을 받은 것처럼 환하게 동동 떠 있다. 바로크 시대도 꼭 그런 모습이었다.
그 시대를 타개하고 운명을 개척해 보고자 장 밥티스트 륄리는 고향 이탈리아를 떠났다. 그는 태생으로는 그저 평범한 소년이었으나, 탁월한 실력에 부단한 노력을 더해 프랑스에서 낚아챌 기회가 없는지 찾아 헤맸다. 그러다 궁정 발레에서 루이 14세를 만나 기어코 스스로의 운명을 일구고 야망을 불태웠다. 왕실 작곡가가 되고 루이 14세의 총애를 한껏 받으며 그는 루이 14세의 음악적 파트너가 되어 간다. 오케스트라 연습을 하며 박자를 맞추다가 지휘봉을 발에 떨어뜨린 상처가 곪아 사망했다는 일화 또한 영화를 통해 유명해졌다.
영화는 륄리와 루이 14세의 관계에 중점을 두고 있지만, 루이 14세의 이야기를 그의 춤에 상당 부분 녹여냈다.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의 동의어처럼 느껴지는 루이 14세의 이름이지만, 그에게 그 이름이 주어진 것은 현재로 치면 초등학교도 못 갈 만큼 어린 나이였을 때다. 루이 13세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오른 왕위이니 안전할 리 없었다. 반란이 터지고 이 작은 꼬마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어머니 손을 붙들고 여기저기 피난을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태양왕이 되는 것은 먼 훗날의 일로, 스무 살이 넘어서까지 그는 섭정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당시 국사를 주무르던 것은 재상이었던 마자랭인데, 다행히도 루이 14세의 목을 옥죄는 인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탁월한 외교 실력을 발휘하고 반란을 무사히 진압한 덕에 루이 14세가 절대왕정기의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었다. 반면 탄탄대로를 후세에도 더 물려주지 못하고 프랑스 혁명으로 가는 도화선을 차곡차곡 쌓는 데에 루이 14세가 책임이 없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는 분명 특이한 인물이다. 절대왕정기라는 엄청난 때의 빛나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으면서도, 엄청난 조롱과 무시를 동시에 받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의 구강 상태가 어떠했고 그래서 어떤 악취가 났으며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까지 잡지 구석이나 영어 문제집 지문에서조차 읽을 수 있다. 그만큼 그의 모자라고 어수룩하고 지저분한 면들은 참 잘 보이는 곳에 놓여 있는데, 또 한편으로는 그의 치세와 별칭이 여전히 빛난다. 영화 <왕의 춤>처럼 황금빛으로 번득이는 면면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져 오니까. 말 많고 탈 많은 시대의 중심이었던 그는 어쩐지 이 사실조차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우쭐댈 것만 같다. 그는 존재 자체로 참 “바로크”적인 인물이었다.
• 라마 4세 •
왕실은 먼 역사 뒤꼍으로 흘러간 우리와는 달리, 태국에서는 왕가의 존재감과 그들에 대한 애정이 여전히 뚝뚝 묻어난다. 호텔 로비부터 큰 리조트 홀까지 어디서든 국왕의 사진이 꽃과 함께 걸려있는 걸 쉽게 볼 수 있고, 불과 2년 전인 2016년 10월 국왕이 서거했을 때 태국 국민들이 보여준 모습은 가히 놀라웠다.
6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위치를 지켜온 왕이 떠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온 나라의 검은 옷이 동났고, 사람들이 섧게 우는 모습이 외신으로 보도되었다. 내가 12월에 방콕을 찾았을 때에도 슬픔과 애도의 흔적은 여전히 곳곳에 있었다. 그때 세상을 뜬 왕은 라마 9세로, 아마 지금 누군가에게 태국 왕을 아냐고 묻는다면 태국에서 심심찮게 본 그의 어진 속 안경 낀 지적인 얼굴이나 그의 장례식을 많이들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나 서구의 누군가에게 태국 왕 누구를 아냐고 묻는다면 라마 9세 못지않게 많이 나올 이름이 라마 4세일 듯하다. 이는 순전히 <왕과 나>라는 연극 때문이다. 라마 4세의 이름을 널리 알린 연극이건만 정작 태국에서는 학을 뗄 작품이다. 왜일까?
라마 4세는 태국이 아직 '시암'이라 불리던 1804년 라마 2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형이 라마 3세가 되고 본인은 종교에 귀의하는 길을 택했는데, 운명은 다시 그를 왕실의 중심으로 데려다 놓았다. 여느 왕이라고 태평성대를 물려받았으랴만은, 라마 4세가 즉위하던 당시의 세상은 그야말로 천지개벽이었다. 잔혹하고 미개한 제국주의의 물결이 서서히 몰려오기 시작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라마 3세가 이미 미국과 조약을 맺었고, 이제부터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몰랐다.
라마 4세는 담대하게 서양 문물을 배우려는 쪽이었다. 그의 재위 기간이 1851년부터 1868년이었으니, 비슷한 시기의 조선은 아직 세도 정치에 휩쓸리다가 이제 막 흥선 대원군이 집권(1863)했을 했을 즈음이다. 흥선 대원군이 군함 제작에 관심을 보였던 것이나, 서양 문물을 배우는 데 우호적이었던 고종이 친정을 시작한 것이 1873년이었음을 생각하면, 조선의 실패가 꼭 시기를 놓쳤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역사가 고꾸라지지 않으려면 훌륭한 사람이 때를 잘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맞춰 바람이 잘 불어오는 것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당시 시암 제국에는 다행히 둘 다 있었다.
라마 4세는 성년이 된 1824년부터 왕위에 오르는 1851년까지 종교의 옷을 입고 살았음에도 왕위에 오르자마자 굉장히 빠르게 제 역할을 척척 해내기 시작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시암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금방 캐치한 그는 복식부터 바꿨다. 당시 궁정에 드나드는 이들이 암살용으로 무기를 숨길 수 없도록 상의를 입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그는 즉위하자마자 모두 상의를 입도록 했다.
입든 입지 않든 문화의 결일 뿐이지만, 서양인들이 태국을 "야만인"이라고 얕보지 않게끔 하겠다는 단호한 결정이었다. 겉으로 드러난 옷뿐 아니라 서양의 기술과 체계도 들여왔으며 이 역시 엄청난 추진력으로 진행되었다. 이 덕분에 그는 추후 태국의 "과학기술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다.
조선의 경우를 보아도 알겠지만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건 단순한 명제 하나가 아니라 세계관이 뒤집어지는 일이었으므로. 아무리 제국주의 시대라 해도 서양이라고 무조건 우월한 게 아니니 충분히 심사숙고하여 온고지신이라는 말처럼 취사 선택할 수 있다면 최선이겠지만, 누구에게도 그럴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라마 4세는 사회 곳곳을 빠른 속도로 개혁했고, 동시에 불만을 느낄 만한 세력들에게 적당한 권력을 내어주면서 내부도 다독였다.
또한 그는 불교에 오래 귀의한 사람답게 인간과 인간이 보다 평등한 사회로 성큼 한 걸음을 옮겼다. 부채를 감당할 수 없을 때 아내를 넘기는 풍습을 딱 잘라 금지했고, 왕실의 후궁들도 대폭 줄여 그들이 각자의 여생을 살 수 있도록 놓아주었다.
그가 유럽 세력에게서 배울 것을 많이 들여왔지만 맹종이 아니라 실리를 생각한 결정이었음은 명확하다. 동시에 그 동안 깊이 연결되어 있던 청나라와의 고리는 그만큼 줄였다. 이미 청나라는 세력을 잃었음을 알고 내린 판단이었다. 이렇게 라마 4세가 나라 안팎을 골고루 다독여둔 덕에 그 아들 라마 5세는 "라마 대왕"이라는 호칭으로 불릴 만큼 나라를 잘 이끌어갈 수 있었다.
라마 5세는 아버지가 물려준 기반 위에서 또 멋지게 한 걸음을 내딛었다. 라마 4세는 자기 자식들은 물론 아내들까지 영어와 외국 문화를 배우게끔 했고, 그가 만들어 놓은 일시적인 무풍 지대에서 라마 5세는 "온고지신"할 시간을 벌었다. 왕위에 오른 라마 5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근대화를 계속해서 빠르게 진행하는 한편, 노예제를 폐지하는 등 아버지 못지않게 멋진 사회적 변화들을 이끌어냈다. 제국주의 서구 열강들이 주변국을 땅따먹기 하듯 난도질하고 있을 때에 시암 제국이 지역 내 유일한 중립국으로 탄탄하게 서 있을 수 있던 건 상당 부분 이들의 역량 덕이었다. 아름다운 이야기다.
그러나 그놈의 오리엔탈리즘은 이 아름다운 이야기에도 끼어들었다. 라마 4세가 라마 5세를 비롯한 자식들과 아내들에게 영어와 서구식 풍습을 가르칠 이를 데려왔는데, 이 안나 레오노웬스라는 교사와 라마 4세 사이에 로맨스 요소로 갖은 양념을 다 쳐서 각색한 것이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이었다. 1946년 <안나와 시암 왕Anna and the King of Siam>이라는 영화로 시작해서 1951년에는 뮤지컬로 무대에 올렸는데 그때부터 <왕과 나the King and I>라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그 제목이 쓰였다. 이후 뮤지컬 영화, TV 시리즈, 애니메이션, 심지어 영화 리메이크까지 여러 번 우려먹었다.
"미개한", "외방" 세계의 뛰어난 왕이 "우월한" 문화를 배우기 위해 교사를 데려왔다는 인식도 우습긴 하다. 당시 군주들 중에 배워서 남 주려고 배운 군주가 어디 있었을까. 아시아를 진심으로 벗어나고 싶어했던 일본은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대부분은 서구 문화를 배워 “우리가” 어떻게 할 지를 고민하다 성공하든지 실패하든지 했다. 그걸 백인 여성에게 더듬더듬 춤 스텝을 배우는 맨발의 왕, 맞잡은 손에서 살짝 감도는 로맨스 요소 같은 걸로 뭉개버리니 태국에서 불경죄라고 보는 게 십분 이해가 간다.
라마 4세와 라마 5세의 걸출한 업적을 온전히 평가하지 않는 시선이다. 서양인들이 많이 궁금해할, 또 흥미를 느낄 만한 화려한 동양의 궁정을 그려 놓고 거기서 백인들이 활개 치고 다니는 주제 의식도 우스운데 사실 안나 레오노웬스는 백인과 인도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당대 최고 미인이었던 "백인" 배우가 허리를 꼭 죄는 코르셋을 입고 눈을 반짝거리면서 나온다.
오리엔탈리즘은 그 이름과는 반대로 오리엔탈을 지워버리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왕과 나>가 내부적 요소들만 고려한 작품성으로는 널리 또 오래 사랑받을 만한 것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외부적 요소까지 생각해 보면 편치만은 않는 이야기다. 라마 4세는 <왕과 나>보다 그 자신의 업적으로 더 기억되었으면 한다.
• 광해군 •
고등학교 때 역사 시간을 즐거워하는 사람보다 지루해하는 사람이 더 많았지만 대부분 광해군이 나올 때에는 조금 힘을 냈던 것 같다. 답답한 선조의 일 처리와 왜란을 보며 힘 쭉 빠지고 민족의 비분강개가 일어날 때쯤 속 시원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해가 유독 깊이 기억되는 데에는 그 말년의 비극성도 한몫 한다. 받드는 시종 아이조차 그를 무시했다는 그의 말년을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쓸쓸해진다. 나라 위한 이 마음을 뉘 알아줄쏘냐 하면서 부지런히 시조를 쓴 유생들은 차라리 행복했다. 그는 시조차 쓸 수 없는 몸이 되어 있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에 대한 평가는 늘 두루두루 갈릴 수밖에 없지만, 하나의 캐릭터로 잡혀 인기를 얻는 건 또 별개의 문제다. 역사학자들은 선조를 다각도에서 평가하겠지만 보통 대중은 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왜란이 터지고 준비가 되지 않은 채로 도망간 것도 그 이유에 제법 비중을 차지하는 것 같다. 당시 선조는 몸을 피하면서 광해군에게 분조를 맡겼다. 분조分朝는 문자 그대로 조정을 나눈다는 뜻으로, 나는 갈테니 차마 나와 같이 떠날 수 없는 것들과 함께 너는 여기 남으라는 소리였다.
그런데 이 분조 동안 광해군이 생각보다 너무 잘한 것이다. 선조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을 국민 정서를 상당 부분 수습했다. 선조와의 관계는 불편해질 수밖에 없는 길을 걷게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애년(艾年)을 넘긴 선조가 광해군보다도 열 살 가까이 어린 인목대비에게서 영창대군을 얻으면서 광해군의 입지는 더욱 불편해졌다. 결국 이는 나중에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 인목대비를 폐위시켜 가두고 영창대군의 목숨을 빼앗는 강경한 무리수로 이어진다.
왜란 이후 경복궁을 중건한 일이나, 폐모살제(廢母殺弟) 등은 광해군의 당시 입지를 생각하면 그 방향성에 대해서는 이해가 가면서도 너무 과했다는 결론을 종종 듣는다. 그러나 더한 일을 벌이고도 천수를 누린 이들도 있음을 생각할 때 역사에는 영원한 정답도 영원한 오답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광해군의 치세에 분명 폭정이라 기록될 만한 일도 있었지만 사실 그 암울했던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면 그는 그 정도로 피폐한 말년을 맞을 정도의 왕은 분명 아니었다. 특히 그 빛나는 외교 감각은 명분에 짓눌려 있던 조선 사회에서는 흔치 않은 것이었다.
명나라가 지고 있음을, 이후에 청나라가 될 후금이 서서히 떠오르고 있음을 남들이라고 보지 않았을 리 없다. 보이는 것은 다 같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거나 그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광해군은 적어도 명분보다 실리를 추구했으며, 임진왜란으로 쑥대밭이 된 조선에선 그런 군주가 분명히 필요했다. 그만큼 많은 기대를 받았을 것이고, 그만큼 어려운 상황에 있었으며, 결국에는 삐끗한 걸음들이 족쇄가 되어 그를 끌어내렸다. 그러나 그의 일대기는 극보다 더 극적인 요소가 많아 추후에 그는 미디어에서 몇 번이나 되살아났다.
드라마 <화정>의 차승원이나 영화 <대립군>의 여진구 등 수많은 배우들이 광해군 역할을 맡아 그의 청년기를, 중장년기를, 말년을 표현했다. 그러나 아마 대중에게 가장 크게 다가온 광해군의 모습이라 하면 역시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이병헌이 분한 모습일 것이다.
이병헌의 역할은 광해뿐 아니라 노비 하선도 있었지만 아무튼 극중 광해군이 하는 말들은 지극히 당연하지만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던 말들, 그래서 입바른 소리임에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대사가 많았다. 그래서였는지 천만을 훌쩍 넘는 관객을 동원하고 각종 영화제에서 상도 많이 받으면서 사랑 받은 영화였다. 당시 나도 코를 훌쩍거리며 영화관을 나선 기억이 난다. 이 영화로 이전에 광해군을 잘 모르던 사람들도 광해군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영화 그 자체로도 관심을 많이 받았지만 정치계에서도 이 영화를 두고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일선에서는 <광해>의 제작과 배급을 맡은 CJ그룹 부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게 된 것이 이 영화 때문이라는 말이 돌았고, 박근령씨는 2017년에 한 인터뷰에서도 여전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본다"며, 이 영화가 "이념성을 띤 영화"로 "어떻게 보면 국가보안법에 걸리"는 영화라고 언급했다. 당시 사람들은 <광해, 왕이 된 남자>가 고인이 된 노무현 대통령을 표현하는 영화라서 그럴 거라고 많이들 수군거렸다.
이런저런 평가에 늘상 내맡겨져 있던 광해군은 여태까지도 설왕설래의 중심에 서 있다. 광해군의 이야기를 우리가 그저 흘러간 이야기로만 보내주지 못하는 건 왜일까. 그의 일대기가 유독 파란만장하기도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가 느끼는 여러 가지 감정들과 굉장히 맞닿아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첨단의 최첨단을 달리는 시대라 해도 결국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으니. 조선의 왕 중에 이렇게 많이 얼굴을 바꾼 왕도 드물 텐데, 살아서도 평범할 날이 없었던 광해군은 사후에도 바람 잘 날이 없다.
왕이라 하면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는 자리처럼 느껴지지만 그렇지만도 않았다는 걸, 치열한 정쟁과 아귀다툼의 자리라는 걸 이제 우리는 제법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왕의 자리에 놀라운 크기의 권력이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상대를 날려버릴 수 있는 권력, 그 권력을 위해 상대를 날려버리는 행위가 빙글빙글 수레바퀴처럼 굴러가는 왕실의 날들이 그리 녹록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다툼을 성질로 하는 권력이란 과연 무소불위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도 든다.
그러나 화무십일홍이라고,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힘의 날들도 언젠가는 스러진다. 누구든 죽음 이후에는 권력을 가질 수 없다. 파라오든 진시황이든 고인돌 아래 잠들었을 누군가든 다 마찬가지다. 물론 권력을 가졌기에 그들 삶의 파편이나마 후대까지 기억되었고 오늘날까지 그들의 이야기가 토막토막 흘러왔다. 이야기 속에서, 문화 속에서 그들은 몇 번이고 되살아났다. 정작 본인이 그것을 원치 않는다 해도 후대의 누군가가 붓끝을 드는 일을 막을 힘이 그들에게는 없다. 이야기는 후대의 몫이니, 어쩌면 권력 다툼을 도모하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이야기를 놓고도 한바탕 아귀 다툼을 하는 이들의 소리 없는 전쟁 속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