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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Mar 08. 2020

아주 평범해서 특별한 발자국

발자국이 무수히 찍히면 길이 된다


  기묘한 사진 한 장을 보았다. 각자 본인 국가의 전통 복식을 한 세 사람이 나란히 앉아있는 사진. 아직도 미래의 숫자처럼 보이는 2020년에 아주 생경한 광경은 아니다. 그래도 저렇게 앉아있는 세 사람을 본다면 대체 무얼 하는 건지, 무슨 촬영이라도 하는 건지 궁금해서 한 번쯤 돌아보게 될 것 같다. 그런데 2020년도 아니고 1980년도 아니고, 1885년에 찍은 사진이다.


  1885년. 바야흐로 "팽창"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해였다. 베트남 종주권을 놓고 청나라와 프랑스가 전쟁을 벌였고, 비스마르크는 프러시아 시민권이 없는 유대인과 폴란드인을 국외 추방했으며, 미얀마를 호시탐탐 노리던 영국은 3번째로 미얀마와 전쟁을 벌였다. 미얀마에게 1885년은 식민 지배를 당하기 직전이었던 해다. 땅따먹기를 계속 하던 영국이 오늘날의 아프간 국경에서 러시아와 아슬아슬하게 갈등 위기를 맞은 것도 같은 해의 일이었다. 그러는 동안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는 아프리카에서 콩고 자유국이라는 나라를 사유지처럼 세웠고, 이 나라의 짧은 역사는 훗날 수탈과 학살로 기록된다.


  한편 전화기를 발명한 알렉산더 벨이 세계 최대 통신 기업 AT&T사를 설립한 해, 프랑스에서 미국에 보낸 선물로 자유의 여신상이 뉴욕에 도착한 해이기도 하다. 나이아가라 폭포 방문 예약을 받기 시작했고, 영국에서는 프로 축구가 합법화되었으며, 미국 곳곳에서 어떤 대학들이 활기차게 문을 열었다.


  그러나 이면에 버려진 이야기들도 있었다. 미국의 록스프링스라는 도시에서는 중국계 이민 광부들에 대한 백인들의 불만이 쌓여, 결국 백인 폭도들이 중국인 광부들을 학살하고 집을 태우는 일로 폭발했다. 사라 구드는 아프리카계 미국 여성 최초로 특허를 따냈다. 태어날 때는 노예였으나 남북 전쟁 이후 자유를 얻고, 좁은 공간에서 유용한 침대를 설계한 사람이다. 엄밀히 "아프리카계 미국 여성으로서 최초로 특허를 따낸" 것은 그 전해 주디 리드라는 사람이었지만, 그는 서명을 할 줄 몰라 X라고만 기입했으므로 아프리카계 미국 여성 중 최초로 특허장에 이름자를 적었다고 해야 맞겠다.


  같은 해. 펜실베니아 의과 대학에서는 여성 셋이 모여 독특한 졸업 사진 한 장을 찍었다. 일본에서, 인도에서, 시리아에서 처음을 기록한 여성들. 서양 세계에서 외과의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돌아온 최초의 여성들이었다.



  이들이 공부한 곳, 펜실베니아 여성 의과대학은 1850년에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미국에는 의과대학도 병원도 있었지만, 애초에 지을 때부터 의학을 목적으로 지은 건물은 처음이었다. 이런 '처음'들이 이곳에는 많이 녹아 있다. 비록 합병을 거치면서 역사 속에만 남았지만.


  사진 속 세 여성이 같은 해에 졸업한 것은 아니다. 일본인 오카미 케이코는 1889년에 졸업했고, 이때 아메리카 원주민 여성 중 최초로 외과의사가 된 수잔 라플레쉬 피코트도 졸업했다. 인도인 아난디 고팔 조쉬는 1886년, 유대계 시리아인 사바트 이슬람불리는 1890년에 각각 졸업했다. 그러니 이 사진은 단순히 졸업사진이라기보다는, 백인도 아니고 남성도 아닌 주제에 '감히' 제국주의 시대에 제 갈 길을 가던 세 사람이 남겨둔 발자국에 가깝다. 언젠가는 시대의 농담이 될 발자국.



20세기 초 시리아 수도 다마스커스 모습. (출처 https://www.flickr.com/photos/library_of_congress/29609000952)

  사바트 이슬람불리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졸업 후 다마스커스로 돌아갔고, 1919년에 이집트 카이로로 향했으며 1941년에 사망했다는 짤막한 기록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시리아는 20세기에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았고, 1차 세계대전 얼마 후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 복잡한 시대를 살았으리라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인도 뭄바이(봄베이) 시내 모습. 20세기 초로 추정되는 사진.

  아난디 고팔 조쉬는 인도 마하라슈트라 주의 칼리얀이라는 도시에서 나고 자랐다. 브라만 계급 지주의 딸이었지만, 집안이 휘청하면서 9살 어린 나이에 등 떠밀려 결혼했다. 당시 인도 여자아이들에게 조혼은 일반적인 일이었지만, 아홉 살짜리가 본인보다 스무 살은 족히 연상이었던 남성과 결혼했다는 이야기는 역시나 불편하다. 아동 조혼은 여자아이들의 삶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는다. 어린 나이에 임신과 출산을 경험하면서 건강을 잃기 쉽고, 남은 일생의 선택권을 박탈당한다. 교육을 받거나 직업을 갖는 것도 남편의 선택이며, 절대 다수는 가사 노동과 육아로만 내몰린다.


  그나마 조쉬의 남편은 어린 아내가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14살 어린 나이에 낳은 첫 아기가 생후 열흘 만에 숨을 거두는 것을 보고 조쉬가 의학에 마음을 품었을 때, 남편은 편지를 써서 적절한 사람을 연결해 주고 유학 준비까지 한다. 거의 육아하듯이 조쉬의 교육에 힘썼다. 당대는 물론 오늘날 남성들에게서도 보기 힘든 모습이다. 19세기에 요리 안 하고 책 읽는다고 화를 내는 남편은 있어도, 책 읽어야 할 시간에 요리한다고 화를 내는 남편은 분명 거의 없었을 것이다. 건강이 좋지 않은 편이었던 조쉬를 부득불 미국까지 보내는 데서는 대한민국 학부모들의 정신마저 느껴진다.


2019년에 <아난디 고팔>이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나왔다.


  날씨도 환경도 모든 것이 달라 쉽지 않았겠지만 조쉬는 최선을 다했다. 결핵을 앓으면서도 끝내 졸업장을 손에 넣고,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인도로 돌아왔다. 계급과 종교가 같은 여성이 진찰을 해야 치료받을 마음이 들었을 당시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지역의 큰 병원에서 조쉬를 의사로 두고 싶다고 했지만 조쉬는 끝내 근무는 하지 못했다.


  불과 21살에 결핵으로 세상을 떴기 때문이다. 인도 전역에서 조쉬의 죽음을 애도했고, 조쉬의 남편은 아내를 화장하고 나온 재를 미국으로 보내고 묘비를 새겼다. 당대 인도에선 이 또한 파격적인 일이었지만, 남편은 조쉬의 짧은 생을 규정할 수 있는 모든 정체성을 묘비에 담았다. 아난디 조쉬, 힌두교도이자 브라만 계급의 여성, 외국에서 의학 학위를 취득하고 돌아온 첫 인도 여성.



20세기 초 일본 여성들의 모습

  오카미 케이코는 다른 두 여성과는 달리 일본 최초의 여성 의사는 아니었다. 일본에서는 이미 오기노 긴코라는 여성이 1882년에 의사 학위를 취득했기 때문이다. 오카미 케이코가 사진을 찍던 1885년, 오기노 긴코는 의사로 등록하고 병원을 열었다. 하지만 외국으로 유학가서 학위를 취득한 여성은 오카미 케이코가 처음이었고, 서양 세계를 깊이 선망하는 일본 사회에서는 나름대로 큰 의미가 있었다.


  교사 생활을 하다가 미술교사였던 남편과 결혼을 하고, 오카미 케이코는 미국으로 옮겨간다. 부부는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교회에서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졸업 후 일본으로 돌아와서 병원에 취직했지만 이내 그만둔다. 오카미 케이코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천황이 진료 받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일본 황실은 여성 천황을 인정하지 않는데다가, 황실 여성이 결혼하면 황족 지위를 박탈하고 있으니 별로 놀랍지도 않다.


  오카미 케이코는 결국 본인 병원을 차려 자기 길을 가기 시작했다. 앞의 두 여성에 비하면 오카미 케이코의 인생은 비교적 평탄해 보인다. 병원과 학교를 오가며 부지런히 일을 하다가 유방암으로 은퇴한 후에는 조용히 일본 국내 선교에 힘쓰며 살았다고 한다. 간호학교나 여성 요양원을 세우는 등 사회적으로 족적을 남기는 방향이었던 듯싶다.



오마하 인디언 보호구역 인근에 있는 미주리 강

  졸업 사진에 함께 찍히지는 않았지만 오카미 케이코와 같은 해에 졸업한 수잔 라플레쉬 피코트는 흔히 인디언이라고 부르는 아메리카 원주민 중 최초로 의사 면허를 취득한 사람이다. 결핵을 몰아내고 공중 보건 의식이 자리잡을 수 있도록 왕성한 활동까지 벌였다. 수잔의 부모님은 인디언 보호구역 바깥에도 연결고리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혼혈이거나 외부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그들은 스스로를 아메리카 원주민으로 규정했고 그렇게 살았다.


수잔 라플레쉬 피코트(1865-1915)


  가족부터가 공부와 연이 깊은 분위기였을 하다. 아버지도 교육을 마치고 보호구역으로 돌아온 것이었고 어머니도 영어를 포함한 외국어를 할 줄 알았다. 훗날 수잔의 이복동생도 민족학자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보호구역 내부에 백인들이 만든 학교에서도, 흑인들을 위해 만든 보호구역 밖의 학교에서도... 수잔은 곳곳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그러나 수잔이 의료인이 되기로 결심한 건 그런 분위기 때문이 아니었다. 백인 의사가 진료를 거부해 끝내 죽음을 맞은 원주민 여성을 보고서였다.


  원주민들 사이에서는 여성이 치료사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아주 파격적인 생각은 아니었다. 그러나 원주민들의 세계 바깥에서 서양 의학을 공부한다는 건 다른 문제였다. 가족끼리 아는 사이였던 민족학자 앨리스 플래처의 도움을 받아서 수잔은 공부를 이어갔다. 공부하던 중 고향에 홍역이 유행해서 잠시 공부를 멈추고 고향을 돌보러 가기도 했고, 돌아와서도 고향에 계속 편지를 쓰면서 공중 보건을 위해 애썼다. 그는 끝까지 치료뿐 아니라 인식 개선까지 힘쓰는 의사로 남았다. 191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1,000명이 넘는 환자를 돌보았다. 아마 실질적인 영향력은 더 컸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기념 병원에도, 구글 로고에도 남았다.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는 "에스더 박"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김점동이다. ("박"은 남편의 성이다.) 아버지가 선교사의 집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서양 문물에 익숙했고, 덕분에 이화학당을 거쳐 미국 유학까지 마쳤다. 물론 쉬운 길은 아니었다. 남편은 미국에서 농장 일을 하다가 결핵으로 일찍 사망했고, 모진 고생 끝에 의사가 된 김점동은 갖은 노력을 다했다.


  인도의 조쉬처럼 김점동 또한 남녀가 유별한 문화에서 더욱 소중한 여성 의사였고, 시리아의 사바트처럼 어지러운 20세기를 살았다. 미국의 수잔처럼 공중 보건 의식과도 맞서 싸워야 했으며, 일본의 오카미처럼 김점동도 간호 학교를 세우고 다양한 사회 활동을 했다. 이들은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차마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고 꿈꾸었다. 꿈꾸고 노력하는 여성은, 역경과 사회적 경계를 뛰어넘는 인간은 그 시절에도 있었다.


  이제는 여성 의료인이 놀랍지도 않은 세상이 되었다. 이렇듯 지극히 당연한 발자국이라도 처음 찍힐 때는 어렵다. 계속해서 발자국이 찍혀야만 그 땅에는 길이 생기니까. 그럼에도 여성 의료인들을 보는 시선은 여전히 박하다. 의사인 지인들은 여전히 병원에서 자신을 "아가씨!"라고 불러대는 소리를 듣는다. 간호사에 대한 시선은 더하다. 간호사인 지인들이 겪은 일을 말해줄 때면, "그런 인간도 치료해서 살려놔야 되니?"라고 싸늘하게 되묻고 싶어졌다. 간호사는 시중 들어주는 여자가 아니라 치료를 돕는 전문 의료인력이라는 간단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200여 년 의사들이 끈질기게 맞서 싸웠을 공중 보건 의식은 상식이 되었지만, 여성 의료인들을 보는 눈은 아직 상식적이지 못하다.



  오늘은 세계 여성의 날이다. 빵과 장미꽃을 드는 날. 불과 몇 년 전까지도 내겐 낯선 날이었는데, 서점은 이 날을 맞아 프로모션을 진행하고, 극장은 이 날을 맞아 상영 시간표를 다시 짜는 등 버젓이 마케팅 수단까지 되어 있는 걸 보면 정말 우리에게 이제는 익숙한 날이 되었나보다.


  200년 전과 지금이 다르듯이, 지금 외치다 보면 200년 후에는 빵과 장미를 들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올까. 지극히 평범한 선택을 하기 위해 별별 유난스러운 소리를 듣는 일들이, 무수한 발자국에 밀려 사라지게 될까. 성별이나 인종처럼 그저 타고났을 뿐인 것들이 차별의 근거가 되지 않는 날이, 오솔길처럼 눈앞에 도래하게 될까. 가끔 물음표가 떠오르지만, 현재를 사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현재를 사는 그뿐이라는 사실을 묵묵히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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