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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Aug 25. 2020

어떤 경계선에서

잊히지 않는 어딘가에 사는 사람


    "시골 출신이시죠? 시골에서 어린 시절 보내신 분들은 백이면 백 첫 글 배경을 시골로 쓰시더라고요."


  수업 시간에 첫 시나리오의 초안을 제출하고 들은 첫마디였다. 글은 쓴 사람을 비출 수밖에 없고, 시골 출신인 사람이 한둘도 아니니 얼추 그렇겠다 싶은 말이었는데도, 그 말을 실제로 듣는 시골 출신의 기분은 아주 묘했다. 뒷산의 부드러운 둔덕을 베고 자란 사람들은 그 내음을 지워낼 수 없는 것일까?


  어쩔 수 없이 내 안에서는 계절의 작용이 부단히 일어난다. 여름이면 산에서 내려오는 바람이 불고 옥수수 잎이 스삭이는 소리가 들린다. 겨울이면 눈 끝에 닿는 오리온자리와 발 끝에 닿는 눈밭의 뽀드득 소리가 떠오르며 그 순간의 고고한 공기가 코 끝을 맵싸하게 만든다. 온 세상이 봄이면 환해지는 것도, 가을 산과 논이 물들 때 얼마나 풍성해지는지도 나는 존재 전체로 안다. 한두 가지 감각이 아닌 내 전부로써 안다.


  언젠가 세상에 내놓을 글을 쓴다면 거기에도 자연스레 내 안에 흐르는 배경이 담길 것이다. 그 날을 기다리며 내 안 어딘가에서 무르익고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을 둘러싼 세상은 으레 다 그렇다. 유년의 기억은 우리의 취향이나 기호와 경험과 심지어 국적보다도 훨씬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내가 어디 살았는지, 라는 질문만으로는 다 퍼올릴 수 없을 만큼 깊은 곳에.


  내가 시나리오를 보여주고 처음 들은 말에 기분이 묘했던 것도 결국, 그 깊은 곳을 단순히 출신지 지명으로 답하려는 데서 오는 어긋남이었던 것 같다. "시골 출신이시죠?"라는 말에 네, 어디 출신이에요,라고 답하면서 스스로가 정확하지 않은 대답을 하고 있다는 기분이었다. 끝이 뭉툭한 질문에 답하고 있는 기분이랄까.


  그걸 뭐라고 부를까. 그건 분명 '고향'이라는 단어만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무언가였다. 나는 그것을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인생에서 본다. 정다운 말 하나 없이도 그리워하면서, 그렇게 다양한 시공간을 휘뚝휘뚝 걸어 다니는 그의 삶에서. 거기 비치는, '고향'이라는 단어보다 더 깊고 복잡한 무언가에서.



  마르그리트 뒤라스(1914~1996)는 20세기 프랑스 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지만, 그 작품 세계와 뿌리는 베트남에서 보낸 어린 시절에 박혀 있다. 당시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반도에 오늘날의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를 아우르는 큰 식민지를 "경영"하고 있었다. 마르그리트의 부모는 둘 다 교직에 있었는데, 인도차이나로 발령을 받아 캄보디아와 베트남 등지를 오가는 생활을 했다. 그러던 1914년의 어느 날 베트남 호치민(당시 사이공) 근처의 한 마을에서 마르그리트가 태어났다.


  마르그리트의 부모는 둘 다 재혼이었는데, 결혼 생활은 길지 않았다. 아버지가 전염병에 걸려 프랑스로 돌아갔는데, 그곳에서 세상을 뜬 것이다. 당시 마르그리트는 고작 4살이었고, 그때부터 마르그리트의 어머니는 세 아이를 기르며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소설 "연인"의 배경이 되는 사덱(Sa Dec) 지역

  그는 낯선 땅의 특징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토지를 불하받았고,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뇌물을 쓰는지도 몰랐다. 그곳에서 나고 자란 이들처럼 그곳을 잘 알지도 못하고, 식민지에 사는 다른 본국인들처럼 그걸 만회할 만큼 약삭빠르거나 돈 냄새를 잘 맡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저 외국인일 뿐인 결코 넉넉하지 않은 가족, 아이 셋을 홀로 먹여 살려야 하는 여성, 발령에 따라 민들레 홀씨처럼 흩날려야 하는 생활. 식민 치하를 사는 사람들에 비할 정도의 절대적인 가난으로 치닫지는 않았겠지만, 마르그리트의 어머니는 일종의 정신적인 가난 속에서 살았던 것 같다.


마르그리트의 어머니가 운영했던 학교라고 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어머니는 1932년에 베트남을 떠났다.


  그 시절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 곳곳에 녹아 있다. 그게 그의 작품 세계 특징이다. 줄거리 없이 정신세계를 헤매며 거미줄 같이 문장을 제 안에서 뽑아내는 누보로망(nouveau roman), 마르그리트 뒤라스 소설은 그 장르의 중심에 있으니까. 그러니 소설 <연인>에 묘사된 가족의 모습을 중심으로 마르그리트의 가족 모습을 되새겨봐도 틀리지는 않을 것 같다.


  어머니가 갖고 있던 가장으로서의 중압감, 그로 인해 장남에 품은 높은 기대, 그 안에서 유아독존으로 자라난 장남, 그 사이에 숨죽인 둘째 아들, 마치 삶이 자기 것이 아니기라도 한 것처럼 관조적으로 살고 있는 화자 소녀까지. 가족들 모두가 스스로를 어떤 존재로 규정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듯 보인다. 계급의 뚜렷한 선 위도 아래도 아닌 어딘가에 어정쩡하게 위치한, 어떻게 보면 이방인들.


영화 <연인> 스틸. 기둥을 중심으로 양쪽에 서로 다른 세상을 사는 이들이 서있다.

   그나마 소녀가 사랑했던, 다정하고 유약한 작은오빠까지 사망하면서(실제로 마르그리트의 둘째 오빠는 중일전쟁 중에 사망했다.) 소녀는 어머니와 큰오빠를 더더욱 견딜 수 없어진다. 여기에도 저기에도 속하지 않는 또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은 그때였다. 부유한 중국인 청년이 접근해 왔을 때 소녀는 그를 거부하지 않고, 둘은 연인 관계가 된다. 세간의 스캔들밖에 되지 못한 만남이었다. 중국인 연인은 소녀에게 마음을 드러내지만 집안에서 정한 혼인 상대가 있어 소녀와 결혼할 수 없고, 소녀는 짐짓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군다.


영화 <연인> 스틸


    얼기설기 만든 뗏목 같았던 두 사람의 관계는 결국 어정쩡하게 부표를 넘어선다. 남자에게는 돌아가야 할 집안이 있고, 소녀는 베트남을 떠나 프랑스로 가서 대학을 다녀야 한다. 그러나 소설의 마지막에서 한참 시간이 흐른 후 남자는 부인과 함께 프랑스를 방문하고, 옛날의 연인은 전화 통화로 엉성한 재회를 한다. 중국인 남자의 뜨거운 사랑 고백과 함께 이야기는 끝이 난다. 지금도 베트남 사덱 지역에는 실존인물의 화려한 생가가 남아있다.


   얼핏 보면 소녀가 단지 그 시절을 버티기 위해 그저 그 남자를 붙들었을 뿐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 소녀가 먼 훗날 죽음을 굽어다보는 노년을 맞았을 때, 한참 연하였던 당시의 애인과 드문드문 나눈 대화를 책으로 엮어냈을 때에도 이 중국인 연인은 다시 등장한다. "내 연인의 중국 이름. 나는 그에게 그의 언어로 이야기한 적이 한 번도 없다."라는 문장으로.


영화 <연인> 스틸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고 건강이 날로 악화되고 있던 때, 심각한 혼수상태로 몇 해를 보내고 났을 때, 성큼 다가온 죽음의 냄새를 맡을 때. 그때 곁에 있던 애인에게 마지막 사랑의 말을 담은 책. 그러나 그 책, <이게 다예요>에는, 자기 삶을 돌아보며 던져보는 독백이나, 따지자면 더 이상 이 세상 존재가 아닌 과거의 누군가들에게 하는 말처럼 느껴지는 내용도 많다. 깊은 사랑을 말하지만 죽음이 곰팡이처럼 배어 있다. 그런 책에 암시되는 중국인 연인의 존재는 마치 마르그리트 자신 같아 보이기도 한다. 이루지 못한 사랑은 결국 상대보다도 자신으로 남는 법이니까.


  그의 언어로 이야기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는 말이 과연 중국인 연인에게만 해당되는 말일까. 두고 온 세계와 돌아온 세계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던 마르그리트가, 과연 어느 세계에선들 그들의 언어로 이야기를 했을까. 마르그리트는 경계선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프랑스어보다 베트남어에 익숙했던 어린 시절뿐 아니라 평생을 그랬다.


   대학을 다니고, 결혼을 하고, 국제 전쟁포로 해방기구에서 함께 활동하던 남편이 체포되면서 강제수용소에 끌려가고, 공산당 활동을 하고, 레지스탕스에 가입하고, 정권에 맞서고, 소설을 쓰고, 혁명에 참여하고, 영화 제작에 참여하고... 베트남을 떠난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철저히 "프랑스스러운" 활동을 하며 산 프랑스 사람이 되었음에도, 그의 이야기에는 메콩 강가의 습한 공기가 흐른다. 작은오빠나 중국인 연인처럼 무의식 저편에 감춰둔, 잃어버린 이들의 유약한 애정이 강물과 함께 너울거린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평생 경계선에 살며 거기서 보이는 것을 세밀하게 기록했다. 그런 그의 머릿속, 거미줄 같은 모든 골목마다 사는 이가 있다면. 쉼 없이 흔들리고 부유하는 그의 시선 속, 무엇이라고도 이름 붙이고 싶지 않은 어떤 마음이 섬처럼 떠 있다. 그곳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우리는 노스탤지어라고 부르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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