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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Nov 06. 2022

함께 얽히고 각자 걸어가기

역사의 어떤 순간과 그 후의 장면들

<에놀라 홈즈 2>가 공개되었다. 셜록과 마이크로프트 아래 가상의 여동생을 만들어낸 소설을 원작으로, 자립과 연대를 배워 가는 한 소녀의 여정을 매력 있게 담아내는 동시에 19세기 영국이라는 격동기를 시의적절하게 비추었다.전작의 그 매력이 그대로 이어지는 동시에, 전편보다도 더 흡입력 있는 이야기를 통해, 제작진이 어떤 주제에 주목하고 싶었는지 명확히 드러낸다.


*이 아래로 <에놀라 홈즈 2>의 모티프가 된 실화 사건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스토리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문구로 시작했음에도, 배경지식이 없어서 전혀 모르고 봤다. 그러나 크레딧이 올라가자마자 찾아보게 되었다. 이 영화 이후로 펼쳐질, 사라 채프먼과 직공들의 시간에 대해서.




19세기 런던. 도시는 급속도로 팽창했다. 인구가 늘어났고, 철도나 교량 공사가 날로 이어졌다. 일자리를 찾아온 사람들이 공사 현장에 투입되면서 인구 증가세를 더했다. 공장이 돌고 도시는 매연에 덮였으며, 그 굴뚝 안에는 체구가 작다는 이유로 아이들이 청소를 하고 있었다. 1837년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가 출간되었고, 1851년 만국 박람회를 위해 유리와 철골만으로 수정궁을 지어 올렸다.


양방향의 팽창이 계속 이루어졌다. 그러나 모두에게 유리한 방향이 아니었다. 공장의 직공들은 점점 '값싼' 노동력이 되어,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소품처럼 취급되었다. 풍경은 점차 대조적이 되어 갔다. 19세기 후반, 런던의 서쪽 끝 웨스트엔드는 부촌의 상징, 동쪽 끝 이스트엔드는 빈민촌의 상징이 되고 있었다. 급기야 1888년에는 이스트엔드 일대에서 '잭 더 리퍼'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에놀라 홈즈 2>에서도 배경으로 등장하는 화이트 채플 일대 지역이다.


그러나 1888년 이스트엔드에서는 잔인한 연쇄 살인마와 노동에 시달리는 아이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 상황에 문제를 제기하며 손에 손을 얽고, 말에 말을 얽으며 일어난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이 <에놀라 홈즈 2>에 모티프를 제공한 사라 채프먼이다.


사라 채프먼


사라 채프먼을 비롯한 수많은 이들의 직장은 브라이언트 앤 메이(Bryant & May)라는 성냥 공장이었다. 노동자의 권리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아동 노동과 중노동과 매연에 덮인 도시 런던에서도 이 공장은 유독 눈에 띄었다. 열악한 작업 환경, 하루 14시간의 노동, 적은 급여에 벌금제까지 적용했다. 성냥을 떨어뜨리거나 옆 직원과 잠깐 이야기만 해도 벌금이 불호령처럼 날아들었다. 어떤 노동자들은 집에서 일했는데, 이 경우 급여는 더욱 적었고 작업에 필요한 풀이나 고무줄 같은 소모품까지 자기 돈으로 사야 했다.



성냥을 만드는 데에는 기본적으로 인, 황 등 신중하게 다루어야 할 물질들이 필요하지만, 안전 수칙이 존재했을 리 없다. 게다가 인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안전한 붉은인 대신 백린을 사용했다. 붉은인은 공기 중에서도 백린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데, 붉은인보다 백린을 사용할 때 재료비가 더 적게 들었다. 백린은 이따금 공기 중에서 자연 발화하기도 하고, 독성이 매우 강하다.


우리 같은 일반인이 오늘날 백린이라는 단어를 접할 곳은 전쟁에서 백린탄을 투하했다는 뉴스를 들을 때 정도다. 그러나 공장 직원들에게는 일상에 묻은 물질이었다. 이들은 아무 보호구 없이 백린이 들어간 물질에 나뭇조각을 담가 성냥을 만들고, 그 성냥을 맨손으로 상자에 담았다.


그 위험성은 곧 몸으로 드러났다. 가벼운 몸살 혹은 치통으로 시작된 증상이 이내 잇몸과 턱의 괴사로 이어졌다. <에놀라 홈즈 2>에도 턱이 퉁퉁 부어 공장에 들어가지 못하는 직원 모습이 지나간다. 산재 처리 같은 게 있었을 리 없는 19세기 런던에서, 직원들은 이를 뽑아 가며 버티거나 일자리를 잃거나 둘 중 하나를 할 수밖에 없었다.


백린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이미 동시대에도 지적되었다. <올리버 트위스트>의 작가 찰스 디킨스는 1852년 이미 성냥 산업에서 백린으로 인한 위험에 관해 썼다. 붉은인이 더 안정적이라는 것도 이미 동시대 동종 업계에 알려진 사실이었지만, 브라이언트 앤 메이 공장은 백린 사용을 고집했다.



쉽지 않은 노동 환경에서도 직원들은 자기 삶을 착실히 꾸려 나갔다. 일만 하는 게 아니라 삶의 소소한 색깔들도 놓치지 않았다. 돈을 모아 모자에 달 깃털을 사고, 같이 웃고, 춤을 추고, 토요일 밤이면 뮤직홀에 가서 쇼를 즐겼다. <에놀라 홈즈 2>에 나온 파라곤 뮤직홀은 실제로 많은 직공들이 즐겨 찾던 공간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까지 그들을 몰아세웠다.


그 열악한 이야기가 암암리에 알려졌다. 영국 페이비언 소사이어티에서는 이 문제를 지적하며 브라이언트 앤 메이 성냥 불매운동을 벌이기로 했고, 다음 날 애니 베전트라는 사회 운동가가 당장 공장 정문을 찾아간다.


사회 운동가 애니 베전트


애니 베전트는 공장 정문 앞에서 직원들을 인터뷰했다. 열악한 작업 환경과 긴 노동 시간, 백린의 위험성, 벌금 제도이야기까지 꼼꼼하게 기록하여 기사를 작성한다. 1888년 6월 23일 발행된 기사 제목은 "런던의 백인 노예제도(White Slavery in London)". 기사는 반향을 얻었고, 애니 베전트는 직원들에게 익명의 감사 편지를 가득 받았다.


공장 측에서는 다 거짓이라며 고소하겠다고 길길이 날뛰었고, 직원들에게 이 보도가 거짓이라는 성명을 내도록 강요했다. 직원들은 여기에 반발해 7월 5일 결국 1,400여 명이 행진에 나섰다. 대부분 어린 여성이었으므로 이들은 matchgirls, 성냥 소녀들로 묶여 불렸다. 동화 <성냥팔이 소녀>도 이런 식으로 공장에서 해고된 여공이었을 거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현실의 소녀들은 다행히도 훨씬 힘차게 걸어갔다.


성냥공장 노동자 조합의 파업 위원회. 사라 채프먼은 제일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


불만에 불씨가 당겨진 것이다. 페이비언 소사이어티와 함께 성냥공장 노동자 조합의 파업 위원회를 꾸렸다. 여기에 사라 채프먼이 있었다. 그는 당시 노동자 계층으로서 쉽지 않은 길이었을,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읽고 쓸 줄 알았고, 1888년에는 특허 관련 부서에서 일하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일을 시작하여 연차도 꽤 되었고, 급여도 공장 노동자들보다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었다. 이후 파업에서도 굵직한 역할을 맡게 된다.


위원회가 내세운 요구사항들은 지극히 당연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벌금을 취소하고, 일에 쓰이는 소모품 비용을 급여에서 공제하는 것을 그만두고... 공장 측이 야금야금 집어삼킨 금액들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마음, 그리고 부당하게 해고당한 직원들을 복귀시키라는 요청 정도다.


소박해 보이는 요구 사항들이지만 이 작은 불씨는 큰불로 번진다. 1901년 브라이언트 앤 메이 공장은 백린 사용을 중단하였고, 1908년에는 백린 사용을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된다. 이들의 이야기는 유럽 전역으로 퍼졌고, 성냥 산업의 안전뿐 아니라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서도 큰 궤적을 남겼다. 비인간적인 노동 환경에 사람들이 함께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선례로 남았다.





브라이언트 앤 메이 공장은 그 후로도 운영되다가, 성냥 산업 자체가 저물어 가면서 함께 시대의 뒤안길로 향했다. 이리저리 인수합병된 끝에 여전히 브라이언트 앤 메이의 흔적이 담긴 물건들이 생산되고 있지만, 런던의 원 공장은 1979년 문을 닫았다.


사라 채프먼은 그 후로 결혼하고 일가를 이루어 산다. 정확히는 몰라도 평이하게 살지 않았을까 싶다. 증손녀 샘 존슨은 증조할머니에 대해 아무 것도 듣지 못했으니까. 그는 가족 기록을 들여다보다가 사라 채프먼이 1888년에 한 일을 알게 되고, 기념회를 조직했다. 여직공 동상을 세우고, 공사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사라 채프먼의 묘지를 유지하기 위해 청원을 받는 등 많은 노력을 했다. 그 결과 사라 채프먼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전해졌고, 새로운 이야기의 숨결마저 받게 되었다.


애니 베전트는 페이비언 소사이어티라는 독특한 이력을 넘어 점점 더 독특한 인생을 살았다. 인간 자유를 무엇보다 중시했던 그는 영국 국민임에도 아일랜드와 인도의 독립을 지지하는 젊은이였고, 마르크스주의를 탐독했다. 나이가 들면서는 신지학이라는 신비주의적 철학 사상에도 집중했다. 1890년대 말에는 인도를 여행하면서 힌두 학교 설립에 관여하고, 아예 인도로 건너가 정치 생활까지 한다. 그 후로도 인도에 살다가 사망하여 화장되었다. 일반적이지는 않은 면모다.



같은 사진 속에 있던 인물들은 1888년 역사에 남을 장면 이후 모두 제각각의 삶으로 다시 뚜벅뚜벅 걸어갔다. 한때 서로 손을 얽고 말을 섞었을 애니 베전트와 사라 채프먼의 여생은 얼마나 다른가. 그들 입장에서 미래인 지금, 그때의 그들이 뭉친 지점과 헤어진 방향들을 바라보는 기분이 묘하다. 주어진 상황에 반응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길이 잠시 겹쳤던 것이다. 방향은 그렇게 일치하다가도 흩어지고, 인연은 그렇게 얽혔다가도 풀어지며, 우리는 잠시 손을 모아 함께하다가 또 멀어지고, 때로는 다시 만난다.


이렇게 다른 서로가 만날 수밖에 없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생명과 일상을 지키기 위해. 함께 놀고 웃고 밥을 먹었던 동료와 건강하게 내일도 일터에서 만나기 위해. 고된 일이지만 소중하게 번 돈으로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 최소한 생명 걱정은 안 해도 되는 환경에서 일하기 위해.


가끔 그런 마음이 필요할 때가 있다. 우리 언젠가 전혀 다른 곳에서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 있을지 모르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잠시 함께. 마치 1888년의 이스트엔드처럼 우글우글 들끓는 것만 같은 이 도시 한 가운데서, 서로의 생명을 바라보고 안부를 묻고 마음을 듣는 것. 손에 손을 얽고 말과 말을 섞으며. 그렇게 있고 싶다. 언젠가 지금이 과거가 되고 각자의 방향으로 걸어갈 때까지, 같은 일을 겪고 있는 지금만큼은.




*참고 사이트

- <에놀라 홈즈 2> 관련 영문 기사 (스포일러 있음) : <nerdist>지

- matchgirls memorial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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