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보다 더 거짓스러운
나라와 국경이라는 단어가 갖는 선명도는 동서고금 모두 달랐다. 대륙의 중심과 변방을 느슨하게 말하던 고대 중국과 반듯한 국경선을 조약으로 정하던 근대 유럽의 개념이 같을 수 없었다. 비록 유럽의 세계관이 전 세계로 퍼지면서 이제는 국경선이라는 개념이 누구에게도 낯설지 않은 세상이 되었지만, 그런 지금도 자로 잰 듯 네모진 아프리카의 몇몇 국경선은 이상해 보인다. 그러나 아프리카에 이상한 나라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슬프게도.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 남아공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남아공에서 4개의 나라가 차례차례 분리 독립을 한 것이다. 오늘날까지 분리 독립을 울부짖는 수많은 소수 민족이나 지방 정부의 경우에서 (특히 최근 카탈루냐의 상황에서) 보듯이 분리 독립은 쉬운 일이 아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는 데미안의 문구처럼 치열한 투쟁 끝에 갈등을 찢으며 터져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암탉이 알을 낳듯 이렇게 순풍순풍 이루어지는 분리 독립이라니 어딘가 미심쩍다. 게다가 신생 국가라고 해도 아무에게도 승인받지 못했다. 아무리 국가 승인이 필수는 아니라지만 이들 4개 국가 상호간과 남아공밖에는 승인하지 않았다니 조금 수상한 냄새가 난다. 이 4개 국가와 외교 관계를 맺은 나라도 전혀 없다.
결국 이 나라들은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사이 속속 남아공의 품으로 돌아갔으니, 이 나라들을 묶어 반투스탄이라 부른다. 독립의 형태를 취한 지역은 4개 지역이지만 사실 반투스탄은 남아프리카에 10곳, 남서 아프리카에 10곳으로 상당히 수가 많았다.
국가 승인을 하든지 말든지 국제법 관계자나 정부 수반들에게는 중요할지언정 보통의 사람들에겐 대수롭지도 않은 소식이다. 그런데 왜 반투스탄이 이상한 나라일까? 그 이유는 따로 있다.
"반투스탄"을 위키백과에 검색하면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의 하나로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그들의 통치 아래 있던 남서 아프리카(현재의 나미비아)에 설치된 흑인 거주 구역"이라고 나온다. 남아공은 반투스탄 지역을 "주권 국가"로 인정하며 독립시켰지만 사실 이건 명목상의 언어일 뿐 사실상 반투스탄은 괴뢰국이었다. 부조리하게 만들어진 법령에 의거하여 흑인들을 불모지 한가운데로 몰아넣고 독립이라는 이름으로 가둬 버렸다. 지력(地力)이라곤 거의 없는 땅이라 농사를 지을 수도 없었고, 도시 기반도 없으니 상업이나 공업으로 먹고 살 수도 없었다. 말이 독립이지 이들의 경제권은 남아공에 고스란히 예속되어 있었다. 똑같은 일용직 노동자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 이전에는 남아공 국민이었다면 이제는 보호받을 권리가 훨씬 줄어든 외국인 신분이 되었으며, 남아공 한구석에서 출퇴근을 하는 대신 국경으로 분리된 외국이자 특수 거주 지역에서 출퇴근을 하게 된 게 차이일 뿐이었다.
아파르트헤이트의 정책은 반투스탄뿐 아니라 그게 무엇이든 그로테스크하고 끔찍하다. 백인, 흑인, 컬러드(혼혈), 인도인으로 나누어 "분리"라는 이름으로 "차별"을 공공연히 정책화했다. 인종간 혼인 금지부터 시작하여 정당 활동 금지 등 기본권을 하나하나 박탈하고 유색 인종은 자기들끼리만 모여 살게끔 하다 못해 아예 나라를 새로 파서 쫓아낸 게 반투스탄이었다. 독립 국가라고는 하나 반투스탄 지역 내 교육이나 고용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대도시 이주를 금지하는 등 입맛대로 할 건 다 했다. 결국 반투스탄은 독립을 빙자해 시민권을 박탈하고 남아공 밖으로 쫓아내는 일밖에 되지 않았던 셈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건 반투스탄을 관광지로 육성하게 된 법령이었다. 그보다 훨씬 전에 나온 법령으로 흑인과의 성관계는 부덕하다고 금지되어 있던 반면, 반투스탄은 남아공 국경 밖이었으므로 카지노부터 성매매까지 그 어떤 문란한 관광이라도 가능했다. "분리"라면서 쫓아내더니, 제 손으로 인권을 박탈한 상대들을 끝까지 쫓아가서는 짓밟은 셈이다.
아파르트헤이트와 맞서 싸운 시대의 양심도 있었으나 그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은 언제나 넬슨 만델라다. 반투스탄이 하나씩 독립하고 있던 시절에도 그는 옥중에 있었다. 꾸준한 반反 아파르트헤이트 운동으로 1964년에 국가 반역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기 때문이다. 20년도 더 지나 십이간지가 두 번을 되돌아온 1988년에도 그의 석방은 요원해 보였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피터르 빌럼 보타는 국내 흑인 세력의 반발이 심해졌음에도 반투스탄 지역의 자치권을 확대하는 정도에서 타협하고자 했다. 넬슨 만델라의 석방도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의 종말도 원치 않았다. 다만 계속된 압력 때문이었는지 건강이 나빠졌을 때 다음 대통령이 새로운 길을 열었다. 프레데릭 빌렘 데 클레르크, 그는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의 마지막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넬슨 만델라의 석방을 이끌어낸 클레르크는 넬슨 만델라와 나란히 1993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사람이기도 하다.
1990년 석방된 넬슨 만델라는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의 리더로서 회의를 개최하고 임시 헌법을 만들었다. 1994년 총선으로 클레르크의 뒤를 이어 4월 27일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바로 그 날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끝장냈다. 반투스탄도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나와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은 중학교 사회 교과서에서 이 삽화를 한 번쯤은 보았을 것이다. 이 삽화의 주인공은 세실 로즈, 제국주의의 상징과 같은 인물이다. 아프리카에 무려 이 사람의 이름을 딴 나라가 있었다. 짐바브웨의 역사 한 귀퉁이에 있는 '로디지아'였다.
지금은 북한 때문에 회원국에게 의무를 부가하는 유엔 안보리의 제재 결의가 속속 나오고 있지만, 그런 유엔 안보리 제재란 사실 그렇게 흔한 것이 아니었다. 1990년대가 되기 전까지 회원국에게 의무를 부가하는 결의는 오직 두 번밖에 나오지 않았으니까. 그중 하나는 유엔 안보리의 최초 제재 결의이기도 했는데 그게 바로 이 로디지아를 향한 제재였다. (다른 하나는 위의 반투스탄과 연관 있는 남아공을 대상으로 한다.) 대체 이 로디지아가 어떤 나라였길래 역사상 첫 유엔 제재를 이끌어낸 걸까?
1965년 11월이 시작될 무렵만 해도 로디지아는 아프리카에 있는 다른 영국 식민지들과 별다를 게 없었다. 그 이름이 제국주의의 핵심이자 오명인 세실 로즈를 본따 만들어졌다는 것 정도. 로디지아의 흑인들도 다른 식민지의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점차 저항 운동의 불씨를 높여 가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로디지아를 지배하던 백인정당 로디지아 전선의 당수 이안 스미스가 돌연 독립을 선언하고 나서면서 역사는 달라졌다.
이안 스미스는 소수의 백인 지배 사회를 꿈꿨다는 점에서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의 남아공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사고를 가졌다. 절대다수였던 흑인을 모두 배제하고 백인들끼리만 독립 투표를 감행한 것이다. 제 식민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데 영국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유엔 안보리의 로디지아 제재에는 영국의 분노가 깔려 있었다. 하지만 정책의 방향이 비슷했던 남아공과 모잠비크가 제재를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재의 실효성은 거의 없었다. 로디지아는 한 술 더 떠 헌법을 개정하며 백인들만의 나라를 굳건히 하고자 했고, 흑인들은 폭동과 게릴라 등으로 이에 맹렬히 맞섰다.
결국 1979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이들은 미국의 중재를 받아들였다. 짐바브웨-로디지아라는 국명에서 보이듯 흑인과의 공존을 받아들이는 태세를 일견 취했으나, 사회 지도층이 변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름만 덮어 씌운다고 바뀌는 건 아니었다. 정부와 반정부 사이에서 결국 새로운 헌법을 제정해 1980년 짐바브웨라는 국명으로 독립하였다. 세실 로즈가 깃들어 있는 로디지아라는 끔찍한 이름도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당시 투옥이나 개인사의 고통을 불사하고 정부와 끝까지 싸웠던 사람 중에는 놀랍게도 무가베가 있다. 짐바브웨가 독립하자마자 총리가 된 그는 집권 초반까지만 해도 인종 간 화해정책을 추구했지만, 정적들을 숙청하며 점차 권력 독점의 길로 나아갔다. 1987년 헌법을 고치고 대통령이 되어 온갖 부정과 조작으로 최근까지 대통령직에 있었다. 오늘을 사는 모든 20대들의 평생보다 더 긴 시간이다. 국정은 나몰라라 하며 혼자 온갖 사치를 다 부리고 반대하는 인사는 누구든 무자비하게 탄압하며 권력을 독점하다가 결국 말 많았던 권좌를 억지로 내려놓았다. 2018년 대선 출마 의사를 밝히고는 있지만... 올래 93세다.
아무튼 사람들은 다 자기 입장에서 볼 수밖에 없는 법이라, 무가베 통치 시절이 로디지아 시절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흑인에게는 살기 훨씬 낫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개인적인 입장이 반영되면 어느 결론이든 나올 수 있겠지만... 아무리 그렇다한들 옳은 건 옳은 것이고 그른 건 그른 것이다. 무가베가 로디지아의 백인 우월주의에 필적하는 흑인 우월주의를 펼치며 트럼프의 처사에 동의한다 발언한 걸 보면 인종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피부색이 문제가 아니라 태도와 지성이 썩어버린 게 문제라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된다.
본인에게 익숙하다는 이유로 정상이라 확언할 수는 없다. 사실 굉장히 뒷골 서늘해질 때가 있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냥 외면하고 사는 사실이지만— 내 눈엔 너무 자연스러운 것들이 사실 그로테스크하고 끔찍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그걸 몰랐던 이들이 만든 흑역사가 바로 박람회다. 당대의 박람회는 온갖 꿈에 부풀어 인류의 진보를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장소였다. 그런 면도 물론 있었지만, '인종 전시'로 인간을 대상화하며 뻗어나가는 제국주의를 자랑한 것은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수치다.
자신들에게 낯설고 생소한 문화에 호기심이나 관심이 동하는 것은 당연하나, 그 호기심을 풀어가는 방법이나 접근 태도가 아주 잘못됐다. 아시아의 아프리카의 부족들을 억지로 끌어다 철조망 안에 가두고 쳐다보며 비웃고 자신의 “우등함”을 내세운 그 오만은 우습기 그지없다. 인성이 끔찍한 건 둘째치고 그 지성이 모자라서 벌인 짓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다. 사회 진화론과 인종주의를 떠받든 멍청이 광신도들의 소행이었다.
마음아픈 일화가 한두 가지가 아니겠으나, 모두의 뇌리에 유독 깊이 박힌 이름 하나가 '사라 바트만'이다. 체형과 생김새가 독특했던 사라 바트만은 본디 남아프리카 부족 출신이었으며, 거칠고 우악스러운 제국주의의 손길이 아니었다면 사라라는 이름도 붙지 않았을 평범한 한 여성, 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유럽에 인종 전시로 끌려가 원치 않는 유명세를 탔다. 이들은 '호텐토트의 비너스'라는 별칭을 붙여 사라 바트만을 희롱하고, 몸 구석구석이 어떻게 생겼나 보고 싶다며 알몸으로 여기저기 끌고 다녔다. 성희롱 성폭력이 늘 그 뒤를 따라 붙었음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유명세가 시들해졌을 때쯤 사라 바트만은 이 남자 저 남자에게 끌려다녀야 했다. 그렇게 강간의 피해자로 살다가 채 서른도 되기 전에 세상을 뜨고 만다.
억울하고 고된 삶이었지만 끝나서도 순탄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사라 바트만이 저렇게 생긴 걸 보니 사람인지 동물인지 헷갈린다고, 살아서도 숱하게 해왔던 그 말을 굳이 또 해가며 사라 바트만의 시신을 해부했다. 사람인지 동물인지 구별이 안 간다면 자기 지능을 의심해 봤으면 됐을 텐데...
시신 해부 결과는 당연히 사람이었지만 애당초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사라 바트만의 내장, 뼈, 성기 등을 박제로 만들어 여전히 박물관에 전시했다. 사라 바트만은 조각조각 갈라지고 찢겨서도 음험한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자칭 타칭 문화 국가라는 프랑스는 사라 바트만의 유해가 "유물"이라서 프랑스 소유라는 논리를 제시하며 반환할 수 없다고 우겼다. 사실 올바르지 못한 경로로 들어온 유물이 하도 많다 보니 유물 하나하나 내어주다 보면 루브르 박물관 반절은 텅 비게 될 것이었으므로 프랑스가 유물 반환에 매우 깐깐한 태도를 보이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 경우는 달랐다. 사라 바트만은 "유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점조차 망각한 처사였다. 결국 인권 단체들의 시위와 비난 속에 2002년 사라 바트만의 유해가 남아공으로 반환되었고, 사라 바트만은 그제야 고국에 매장되어 한 줌 흙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200년 만의 안식이었다.
이러한 "전시"는 제국주의의 빤빤한 낯짝이었다. 일본도 조선인과 이누이트, 류큐, 대만인 들을 "전시"했다. 일본이 죄를 지은 대상의 목록이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은 국가의 사람들을 굳이 "전시"한 이유는 자기들이 우월하다는 사실을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어떻게든 '다름'을 '틀림'으로 만들어 그 안에서 우열을 가려 '열'에 속하는 것들을 배제한다는 명목이 그들이 밟고 선 사회 진화론이었다만, 그들은 가장 배제되어야 할 '열'이 자신의 그 새까만 마음이라는 사실을 그렇게 길이 기록될 역사에 남겨두고 말았다.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에서 '문명'을 종교와 문화적인 특징으로 갈라 서구, 이슬람, 중화, 아프리카 등 몇 개의 덩이로 묶고, 그들 간의 충돌이 숙명적이라는 이론을 세운다. 그러므로 협력할 게 아니라 서로 부딪히지 않는 게 최선이라는 결론으로 치닫는다. 최근 종교와 인종 문제로 각을 세우고 있는 세계 곳곳을 보면 일견 맞는 말처럼도 보인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분법적으로 단순하게 가르는 그 선에서 희생되는 사람은 얼마나 많은가. 이 예측이 오히려 그러한 충돌에 부채질을 하는, 이른바 자기실현적 예측이 되기는 또 얼마나 쉬운가.
딱히 요즘이라고 해서 특정 인종이 더 위험하다든지 특정 종교도들이 더 공격적이라든지 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내 눈 앞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그 심각성이 내 피부로 와 닿는 것일 뿐, 인류사에 비슷한 일은 넘쳐흐른다. 해 아래 새로운 것 없다고, 인간은 늘 이랬다.
다만 그 반복을 우리의 무딘 일상으로 만들어선 안 된다. 아무리 계속해서 반복되는 역사였다 해도 우린 이상한 것에 대해 이상하다 말할 수 있는 감각을 늘 예리하게 갖춰야 한다. 앨리스가 뛰어다니던 나라보다 훨씬 더 이상한, 정말 이상한 나라들을 끊임없이 돌아보아야 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