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대하지만 고요함으로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우선 이어져 있는 두 홑문장 자체에 각각 공감하지 않을 뿐더러, 조금만 곱씹어 보면 과연 약함은 무엇이고 강함은 무엇인가 고민하게 된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상대의 강함과 약함을 알 수 있는가? 타고나는 성격 유형? 표정과 감정 표현? 얼핏 감은 잡을 수 있겠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 때로는 눈물이 강인함이다. 아무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바위 같은 표정이 내면의 연약함에 뿌리를 두고 있을 때도 있다. 덜덜 떨면서 드러내는 용기도 있다. 강한 누군가는 죽음을 불사하지만 약한 누군가는 죽음으로 뛰어들어 회피하며 그 차이가 타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해 본 사람은 안다. 사람이 사랑할 때 얼마나 약해지고 또 동시에 얼마나 강해지는지를. 세상 천군만마가 달려들어도 다 괜찮을 것처럼 든든한 날도 있지만, 내 손에 나 봐서 익히 아는 작은 가시 하나가 사랑하는 이의 손에 박혀 있다는 이유로 전전긍긍하게 되는 날도 있다. 그저 드러낼 것을 드러내고 숨길 것을 숨기는 표현법을 배워갈 뿐이니, 약함과 강함은 누가 재단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어떤 여자들이 보여준 강한 모습 앞에 숙연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 속마음이 어땠을지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 그들이 보여준 깊은 물 같이 조용한 당당함을 볼 때에는 늘 그렇다.
반외세와 반봉건의 서로 다른 가치관이 엎치락뒤치락하던 구한말, 누구나 그러했듯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던 가족이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에 있었다. 동학 농민군을 토벌하고 개혁을 바라보다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막을 내리는 바람에 청계동에서 피신에 가까운 생활을 하던 한 진사의 집이었고, 그러면서도 동학군의 유명한 접주를 보호하여 훗날 그 접주가 쓴 자서전 <백범일지>에 나온 집이기도 했다. 나중에 하얼빈 역에서 침략의 거두를 쏜 청년이 자란 집이기도 했으며, 그 아들에게 "항소를 한다면 목숨을 구걸하는 셈이니 나라를 위해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고 했다 전해지는 어느 대단한 여성이 산 집이기도 했다.
굵직굵직한 인물들이 워낙 많이 등장한 집이다 보니 숨가빴던 당대의 기록에서는 이 여성이 많이 누락되었다. 그러나 단편적으로 알려진 사실들만 추려 보아도 범인이 따라갈 수 없는 단호함이 보인다. 사형수가 된 아들을 대했다는 모습만 보아도 그렇다. 나라를 위해서라고는 하나 차가운 감옥에서 죽을 날을 기다리는 아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어떻게 아무렇지 않았겠는가. 단지 요동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어차피 죽을 날을 받아 둔 아들에게,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뜨게 되어 불효하다며 용서를 비는 아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주려는 애끓는 사랑의 다른 표현법이었을 뿐이리라.
아들의 마지막 가는 길에 입혀 준 새하얀 수의는 한편으로는 후대의 우리에게 전투복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알았을 아들 또한 어머니만큼이나 담담한 표정으로 적군을 쏘아 죽인 군인으로서 죽음을 기다린다. 그 와중에도 이토가 중언부언 끌어다붙인 명목상의 '동양평화론'에 맞서는 사람처럼 마치 보란 듯이 <동양평화론>을 쓰다가 죽음을 맞은 것조차 꼿꼿하다. 그러나 이 여성이 독립운동에 남긴 족적은 잘 키운 아들 하나, 말 한 마디, 수의 한 벌뿐이 아니었다.
각다귀들에게 살점을 뜯어 먹히듯 각종 이권을 빼앗기고 눈 감았다 뜨면 배상금이 더덕더덕 붙어 있던 당시 조선의 재정적 부담을 덜어 보자고 민들이 합심해 시작한 국채보상운동에서도 그 여성, 조마리아의 이름은 눈에 띈다. 가진 것을 모두 내어놓으면서도 악 소리 내지 않는 독립 운동가의 삶, 조마리아의 삶은 그 후로도 방향성이 일정했다.
안중근 의거가 있고 나서 그 일가에 대한 감시와 탄압이 어떠할지는 쉬이 상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조마리아는 가족과 함께 조국을 떠났다. 연해주로, 연해주에서 또 다른 지역으로, 그러다 마침내 1919년 임시정부가 생긴 상해로... 육사의 시구처럼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간 길이었고,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는 시국이었다. 1910년대는 러시아도 혁명의 바람이 불어 흉흉하던 시절이었으므로 춥고 어려운 길이었다. 그 와중에 안중근의 큰아들이 밀정의 손에 독살 당하는 일도 있었다. 아들과 손자까지 잃는 길이었지만 조마리아는 꼿꼿하게 가족과 주변을 돌아보며 상해에 이르렀다. 어느새 가족뿐 아니라 교포사회 전체의 버팀목이 되어 있었다.
상해에 도착한 조마리아의 가족은 '바로 그 안중근'의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힘이 되는 존재였다. 오래 전 청계동 집에 몸을 피하러 왔던 김구를 만나서도 반가웠을 것이다. 특히 그 시절 조마리아의 남편인 안태훈 진사는 아직 어렸던 김구를 높여 부름은 물론 인근 가옥을 구입해 김구의 부모님까지 모셔왔다고 했으니, <백범일지>의 기록은 거기 그치지만 안태훈 진사의 6형제가 청계동의 유지로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와 조마리아 여사도 초면이 아니었을 것 같다. 실제로 초면이었든 아니었든, 강인하게 살며 독립 운동가를 길러낸 두 여자는 존재만으로도 든든하였을 뿐더러 거기 그치지 않고 교포사회의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어른 역할을 톡톡히 했다.
조마리아와 함께 온 가족들 또한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안중근 의사의 동생으로도 유명한 정근과 공근 형제도 그러했다. 안정근은 상해로 오기 전에도 권업회, 신민회 등 주요 독립운동 단체를 두루 거쳐왔는데 상해에서도 임시 정부 의정원 의원을 역임하는 등 숨가쁘게 활동했다. 안중근 의거 전까지 교사였던 안공근도 임시정부에서 외무차장, 러시아 파견 외교관으로 시작하여 유일당 운동, 한인 애국단 등 임시정부의 거의 모든 순간에 함께했다. 두 사람의 이름은 <백범일지>에 계속해서 거론된다.
조마리아에 대한 기록은 그에 비하면 수가 적다. 아무래도 실질적이지만 이름이나 직함이 남지는 않는 일을 주로 했을 것이다. 성별에 따른 역할 분담이 여전했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 후원을 위한 정부경제후원회 정위원으로 이름을 남겼다. 다양한 사람들의 개인적인 기록 속에도 남아 있다.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필요한 모든 곳에 달려가 독립운동과 교포사회의 원활한 유지를 위해 물심양면 지원했으며, 담대하고 지혜로운 그 모습을 보고 다들 안중근 의사의 그 비범함이 어디서 왔는지를 느꼈다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는 말이 주변인들의 대체적인 평이었다.
1927년 눈을 감는 순간까지 조마리아에 대한 주변인들의 인상은 이토록 일관적이다. 조마리아 여사는 훌륭한 독립 운동가였다.
영화 <암살>이 개봉하고 나서 사람들 마음에 가장 깊이 남은 대사는 아무래도 극중 안옥윤(전지현 분)이 가벼운 듯 무겁게 내뱉었던 "알려줘야지. 우리는 끝까지 싸우고 있다고."인 듯하다. 그러면서 과연 안옥윤의 실제 모델이 누구인가 이야기가 일었을 때 가장 많이 떠오른 이름이 바로 남자현의 이름이었다. 아마 비슷한 사건을 기획한 적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교과서에도 나온 그 일화보다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야기는 그 손자의 증언이다. 우연히 한 번 읽었을 뿐인데 이야기 자체가 흥미롭기도 하고 이미지가 워낙 강렬하기도 해서 도저히 잊히질 않는다. 머릿속에 쉽게 그려지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남자현이라는 사람의 순간적으로 번뜩이는 기지와 용맹함이 돋보이기도 한다.
"아버지와 할머니(남자현)가 길 가다가 왜놈 밀정을 만났답니다. 할머니가 아버지께 '보자기 있느냐'고 하더니 옆의 가지밭에 들어가 가지를 하나 따 보자기에 싸서 마치 총구인 것처럼 밀정의 등에 들이밀고 '손들어' 하더니 집으로 끌고 갔답니다. 할머니는 밀정이 두 시간만에 울면서 잘못했다고 빌자 내보내 주었다고 합니다."
_출처: <발굴한국현대사인물>, 조선희.
가지 하나로 밀정이 어린애처럼 울면서 싹싹 빌게 만드는 여성이라니 너무 멋지지 않나. 하지만 이 멋진 여성도 한때는 10대 소녀였다. 단 그때부터 총명함이 남달랐다. 경북 영양의 양반 집 출신으로 잘 교육을 받고 안동으로 시집을 갔는데, 결혼 생활 4년 만에 남편은 의병에 가담해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 그러나 남자현 여사는 미망인未亡人으로 살지 않고 남자현이라는 한 사람으로 멋지게 살았다. 조마리아가 국채보상운동에 열심을 냈듯 남자현도 산업과 계몽 등 당시 여성들이 주축이 되었던 영역의 독립운동은 물론, 의병 활동을 물심양면으로 함께 했다. 당시 남자현의 친정집은 의병 활동의 주요 거점이 되어 있었다.
그런 집안이었으니 일제의 탄압과 감시가 없을 수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1919년 3.1운동의 만세 소리가 터졌다. 남자현은 아들과 함께 서간도로 떠났다. 차가운 바람 소리밖에 없는 땅을 기지로 만든 소중한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남자현 또한 서로군정서에 들어갔다.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홍범도와 김좌진의 용맹함만을 기억하지만, 사실 보통 정규군처럼 군복 입고 밥 먹고 훈련 받고 전투를 하는 게 아니라 평상시에는 땅을 일구며 농사를 짓고 마을을 이루어 살아가다가 불시에 군대로 변신하는 게 당시 만주에 있는 독립운동가들의 일상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그냥 순박한 농민인지 독립운동가인지 알 수 없다는 얘기였다. 얼굴이 알려진 독립운동가들을 주시하는 것 외에도 당시 일본이 얼마나 발톱을 세우고 있었겠는가. 일제가 간도에 있던 우리 민족을 잔혹하게 죽이고 마을마다 불을 질렀던 간도 참변은 그런 배경을 생각하며 저지른, 구분을 못 할 바엔 다 죽이자는 식의 사고의 발로였다. 치가 떨리는 만행이다.
그런 어려운 시대였다. 교회와 마을을 돌아보며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 것, 여성 교육에 힘을 쏟는 것도 좋은 일이고 꼭 필요한 일이긴 했다. 그러나 가지로 밀정 때려잡는 성격에 그 일만 할 수가 없었다. 1925년 남자현은 몇몇 동료들과 함께 사이토 총독을 암살하기 위해 서울로 들어가 준비를 하던 중 다른 사건이 먼저 터져 삼엄해진 경계로 인해 실패하고 돌아갔다. 바로 이 사건 때문에 <암살>의 안옥윤 모티프에서 남자현 여사의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것이다.
눈물을 머금고 다음을 기약해야 했지만 그렇다고 남자현의 활동이 좌절된 것은 아니었다. 나이가 지긋한 여성이었기 때문에 남자현만이 할 수 있는 역할들이 있었다. 안창호, 김동삼 등 굵직한 독립운동가들의 옥바라지는 물론이고 어머니나 친척으로 가장하고 면회를 하여 연락망이 되기도 했다. 아들 걱정하는 어머니는 아무래도 간수 입장에서 가장 경계심이 덜한 면회자일 테니, 오만한 편견을 뚫고 들어가기 제격이었던 셈이다.
1931년 더욱더 미쳐가던 일본은 만주로 올라와 속칭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만주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우며 야심을 불태웠다. 이는 그때까지 일본의 든든한 후방이었던 영국과 미국 눈밖에 나는 행동이었고, 국제연맹에서 조사회가 파견되었다. 조사회는 일본과 중국 등지를 오가며 부지런히 활동했고, 그 활동을 긴장감 어린 눈으로 보는 이는 일본 제국주의 괴물만이 아니었다. 안중근이 단지斷指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남자현 또한 단지하고 "대한독립" 혈서를 썼다. 혈서로도 모자라서 자른 손가락까지 같이 전달해 보여주려는 어마어마한 계획이었지만 일제 경찰이 먼저 발견해 실패하였다.
이런 남자현을 일제가 모를 리 없었다. 일본 대사관의 주요 인사를 처단하기 위해 거지 노파로 분장하고 무기와 폭탄을 운반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혹형에 시달리고 단식까지 한 탓에 있는 대로 쇠약해진 남자현은 결국 병 보석으로 감옥을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3일 후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진다고 유언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남자현은 마지막 순간까지 독립을 위해 남은 것을 모두 쏟아부었다. 중국 돈 249원을 아들에게 내놓으며 독립이 되면 독립축하금으로 전하라고 하였다. (이 돈은 1946년 3월 1일 3.1절 기념식에서 김구와 이승만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뚝심 있는 독립 운동가의 삶이었다.
조마리아와 남자현뿐이 아니다. 의병장으로 알려진 유인석이 제천에서 의병 활동을 할 때 함께 의병으로 나선 유홍석이라는 가문 친지가 있었다. 그 며느리가 바로 <안사람의병가>를 쓴 윤희순이다. <의병군가>, <병정가> 등 다양한 노래를 쓰는 것으로도 모자라 친일파와 일본군에게까지 편지를 썼다고 하니 그야말로 칼보다 강한 펜이다. 아예 여자 의병들을 조직해 의병 운동을 함께했으며 시아버지와 남편, 아들과 함께 계속해서 독립운동을 이어나가다가 1935년 만주에서 눈을 감았다.
박차정은 김원봉의 아내이기도 하지만 그 자신도 의열단 단원이자 조선혁명군간부학교 교관이었다. 1944년 항일 전투 중 입은 부상으로 사망했는데, 그 피 묻은 옷을 나중에 김원봉이 들고 귀국해 박차정의 동생에게 전해 주었다고 한다. 한인애국단 출신에 조선의용대원이었던 이화림 또한 박차정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들어보기는 어려웠던 이름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박차정이 활동한 남경조선부인회에는 이청천 장군의 아내였던 이성실도 있었다. 임신한 몸으로 폭탄 거사를 계획한 안경신도 빼먹을 수 없다. 이력보다 국적이 특이한 사람도 있는데, 곧 영화로 되살아날 박열과 함께 일본왕 처단 계획을 세우다가 거사 직전에 발각되어 체포된 후 그 감옥에서 살아 나오지 못한 가네코 후미코가 그런 경우이다.
여성들의 단체들도 있다. 대한애국부인회나 송죽회 등이 그렇다. 단체 명단이나 활동 내역을 보면 야무지게 이루어 간 독립의 꿈이 올망졸망 맺혀 있다.
독립의 꿈은 성별과 무관하게 많은 이들의 마음에 있었다. 간도에서 밭을 일구었을 농부도, 태극기를 그리거나 손바느질했을 소녀도, 평양에서 나라 위한다며 담배를 끊었을 할아버지도, 감옥에서 돌아오지 않는 독립운동가 남편을 위해 옥바라지를 했을 아낙도. 폭탄을 던지고 단체를 조직한 이들 외에도 무명의 독립 운동가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는 뜻이다.
그 중에 여성도 있었다는 것은 마치 '사람 중에는 여성이 있지' 정도의 당연한 문장임에도, 너무나 묻혀 있기에 굳이 힘 주어 말해본다. 그리고 그 고요하고 담담하게 빛나는 강인함을 존경의 눈으로 바라본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낼 때도, 사랑하는 고국을 등지고 떠날 때도, 사랑하는 아이를 뱃속에 품었을 때도... 독립을 꿈 꾼 이들이 다 그랬듯 그들은 의연하였고 꿋꿋하였다.
이 글을 쓴 날은 6월 7일. 그 바로 전 날이 6월 6일 현충일이었고 대통령은 추념사에서 애국을 말했다. 현충원에 묻힌 분들뿐 아니라 각기 다른 방법으로 애국을 한 이들을 이야기했다. 항일 의병과 광복군, 호국 용사와 참전 용사, 파독 광부와 파독 간호사, 공장의 여성 노동자, 민주 항쟁 운동가들과 그 유가족들, 군대 사고로 피해를 입은 용사들... 현대사의 풍경을 간추린 인물들이었다. 탱크에 던진 돌 하나처럼, 바위를 친 계란 하나처럼 차근차근 쌓여 오늘을 만들어간 사람들의 풍경이었다.
그런데 이 현충일의 날짜는 생각보다 먼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거란을 막아내던 고려에서 망종이라는 절기를 맞아 제사를 지내도록 했던 데 유래가 있다고 한다. 결국 현충일이라는 날은 현대사뿐 아니라 아주 오래 전부터 나와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 광활하지도 유명하지도 않은 전쟁사를 남겨온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인 셈이다. 물론 우리에게는 이순신 장군처럼 놀라운 장군들의 역사도 있지만 그와 별개로 시간의 흐름에 잊힌 이름이, 당대에도 기록되지 못한 이름이 얼마나 많은가.
흙먼지 이는 그 전쟁사에는 여성도 있었다. 그들도 싸웠다. 애초에 당대서부터 기록에 여성을 많이 할애하지 않았으니 역사에 대한 우리의 무지함만을 탓할 수는 없지만, 기록이 있고 이미지가 선명한 이들의 이름조차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고요하지만 담대하게 큰 일을 벌이던, 그 시대를 헤치고 살아갔던 인간을 바라본다. 그들은 여자라서 약하고 어머니라서 강한 게 아니었다. 인간이라서 약했고 인간이라서 강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담담히 강인한 인상만을 남기고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