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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Mar 26. 2017

상심한 별은 가볍게 부서진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이야기한다

   괴로운 기억은 우리를 쉽게 떠나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중요한 이유도, 우리가 어린아이들을 다양한 학대로부터 결연히 보호하고 안아주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서로가 서로를 안아주고 붙들어 주며 상처를 어루만져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 되면 좋으련만, 온전히 그런 세상은 우리가 겪어 본 적이 없다. 오히려 누구도 보듬어 주지 못한 상처가 여기저기서 괴롭게 터지는 걸 보며 눈을 질끈 감고, 때로는 보듬어 주고 달래 보아도 낫지 못한 채 시들어 버린 상처 앞에 처참한 고통을 느끼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입안이 씁쓸해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영국에 태어난 한 여자가 있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재혼이었던 복닥복닥한 가정에 태어났고, 의붓오빠의 성적 유린과 어머니의 죽음, 언니의 죽음, 아버지의 투병 생활까지 겪으며 어린 시절을 보낸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즈음부터 시작된 신경 쇠약 증세로 사춘기 때 이미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던 그 여자가 불행에서 도망갈 수 있는 길이 없는 듯 보였다.


   그러나 어렵게 맺은 인연이 뜻밖의 탈출구가 되어 주었다. 오빠의 친구였던 한 남자가 청혼을 해 왔고, 여자는 고민 끝에 청혼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잘 지냈지만, 그 여자는 자신의 얼굴에 걸린 우울을 끝끝내 걷어내지 못했다. 삶의 조각 같은 돌멩이들을 코트 자락에 가득 집어넣은 채 강물로, 깊은 물 속으로 걸어 들어갔고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작가 버지니아 울프의 이야기이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을 들으면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어쩐지 서글픈 시대의 느낌이 풀풀 느껴지는 <목마와 숙녀> 한 구절이다. (이 글의 제목과 부제도 감히 시구에서 잘라왔다.) 고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이기도 했던 국어 선생님께서는 고전 문학부터 시와 현대 소설까지 어떻게든 우리에게 '읽히려' 하셨고, 그 낭랑하고도 어쩐지 서러운 목소리를 들은 것도 그 일환이었던 어느 날 수업에서였다. 나는 70년대나 80년대 같은, 내가 살아보지 않은 어떤 가까운 과거의 포장마차에 앉아 한 잔의 술을 앞에 두고 옆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서글픈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기분은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과 겹쳐 남았다.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들도 그렇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그 뼈대와 윤곽이 햇빛 비춘 영상처럼 선명하게 남아 있다기보다, 몽롱한 취기 속에서 그늘진 얼굴을 찍어둔 스틸 사진처럼 흐릿한 느낌이다. 쉬이 읽히지도, 선명하지도 않은 그 느낌이 가슴에 박혀 사라지지 않는다. 왜일까, 글은 사람은 닮기 때문일까.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은 기실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눈꼽만큼도 상관이 없건만, 왜 나는 버지니아 울프가 목마를 타고 훌쩍 떠나버린 것처럼, 그 작품들이 그 옷자락이나 되는 것처럼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꼭 내게만 그런 건 아닐 것 같지만, 아무튼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이 많은 이들에게 회색빛 감도는 이름임은 틀림이 없다. 그런데 그 본인의 생애도 그런 빛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1882년 런던의 하이드 파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재혼이었는데, 이전 결혼에서 얻은 아이들과 새로 얻은 아이들까지 어느새 아이가 아홉이었다. 의붓형제라고 꼭 사이가 나쁘라는 법은 없지만 버지니아의 경우는 별로 좋지 않았다. 버지니아는 (그리고 버지니아의 언니였던 바네사도) 의붓오빠들에게 성적으로 유린당했다고, 아주 먼 훗날에야 이야기했다. 이복오빠 제럴드가 버지니아의 '신체를 면밀히 관찰하고 만진' 것은 버지니아가 고작 여섯 살 때의 일이었다.


  버지니아의 어머니는 아마도 매우 활동적인 성격이었던 것 같다. 인도에서 태어나서 영국으로 건너오는 긴 여행을 이미 어린 나이에 했고, 그 후로 그림이나 사진의 모델로도 활동을 했으니 우두커니 앉아만 있는 성격은 아니었을 것 같다. 많은 시간 부재중이었던 어머니는 버지니아가 고작 13살이었을 때 아주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가 첫 결혼으로 낳은 아이들은 이미 훌쩍 자라 있었지만, 두 번째 결혼으로 낳은 아이들이 모두 10대 초중반밖에 되지 않았을 때였다. 버지니아는 이때 처음 신경쇠약과 우울 증세를 보였다.


  2년이 지났고 어머니를 잃은 충격과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 언니 스텔라가 결혼한지 3개월만에 맹장염으로 세상을 떴다. 버지니아로서는 어머니를 두 번 잃는 듯한 슬픔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마저 암에 걸려 간병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었다. 오빠인 토비는 대학으로 떠났고, 언니 바네사와 아버지 병 수발을 들며 울적한 집안 분위기에서 괴로워하고 있던 버지니아를 이번에는 다른 이복오빠가 건드렸다.


  몇 문장으로 짧게 적지만 본인에게는 얼마나 길고 어려운 세월이었을지. 버지니아는 이후로도 성이라는 문제를 기피했다. 그러나 당시의 버지니아로서는 눈을 질끈 감는 게 최선이었다. 책 속을 도피처로 삼았다. 당시 런던에 있는 킹스 컬리지에서는 여성을 위한 고등 교육 코스가 열려 있었는데, 바네사와 함께 라틴어, 역사, 예술 과목 등을 수강하고 공부했다. 학위를 따고 반듯한 미래를 열어가기 위한 노력이 아닌, 살기 위한 발버둥에 가까운 느낌이 드는 교육이다. 이 즈음부터 버지니아의 글이 세상에 나오기 시작하는데, 처음으로 출판된 글은 소설이 아니라 브론테 자매의 집 방문기였다. 요즘으로 치면 여행 에세이 정도겠지만, 하필 브론테 자매들의 집이라니. 버지니아와 마찬가지로 어린 나이에 소중한 사람을 잃고 울적해 하던 자매들의 과거가 보이지 않게 맺혀 있었을 곳이라니. 그 감정의 습도가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너무 억지스럽게 묶는 것인지.


블룸즈버리


  아무튼 그렇게 글과 책으로 자신을 달래며 살던 날들은 1904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끝이 났다. 버지니아는 다시 한 번 도진 신경쇠약으로 자살을 기도했고, 무너진 몸과 마음을 추스릴 필요가 있었다. 캠브릿지에 있는 친구의 집과 이모의 집을 전전하며 어느 정도 회복된 버지니아는 비로소 동복의 형제들 바네사, 토비, 애드리안이 사는 집에 함께 살 수 있었다.


  이 집이 바로 고든 스퀘어 46번지인데 여기서 토비의 대학교 친구들을 비롯한 수많은 지식인들이 오가며 다양한 지적 담론을 나누었다. 이 모임이 바로 블룸스버리(Bloomsbury)로, 그 유명한 경제학자 케인즈나 소설가 포스터도 이 모임에 있었다. 이 모임의 구성원들은 이후 대학 총장, 비평가, 학자, 예술가 등 각자의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사람들이었다. <멋진 신세계>의 헉슬리나 '4월은 잔인한 달'로 유명한 <황무지>의 시인 T.S. 엘리엇도 이 모임에 간혹 왔다고 한다.


버지니아 울프와 T.S 엘리엇


  버지니아의 삶의 출구였던 지식과 예술이 펼쳐져 있는 시간이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행복한 시간만도 아니었다. 토비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바네사는 토비의 학교 친구였던 클라이브 벨과 결혼했다. 버지니아는 이 즈음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블룸스버리 회원 중 몇몇과 함께 집을 얻어 살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버지니아의 남동생 애드리안도 있고 케인즈도 있었지만 레너드 울프라는 청년도 있었다.


  레너드 울프는 대학 때 버지니아의 오빠와 친하게 지내기는 했지만, 공무원이 되고 버지니아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해인 1904년부터 스리랑카로 발령이 나서 1911년에야 영국으로 돌아왔다. 일종의 안식년이었지만 버지니아 울프를 만나면서 계획이 완전히 바뀌었다. 버지니아는 레너드가 공무원 직을 사직하고 작가 버지니아 울프를 지지해 주기를 원했다고 한다. 1912년 1월에 레너드는 버지니아에게 청혼했고, 몇 달 후 버지니아는 그 청혼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8월에 결혼했다.



  레너드 울프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그는 정말로 공무원 직을 사직했다. 그러나 결혼한지 1년만에 버지니아는 신경 쇠약으로 또 다시 자살을 기도했고, 그 1년 후에는 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됐다. 평온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시간이었지만 레너드는 집을 옮기고 인쇄기를 사서 작가 버지니아 울프를 담담히 후원하면서 인간 버지니아 울프를 끌어안았다. 그렇다고 레너드 울프가 울적하게 꽁하니 들어앉은 사람은 아니었다. 스리랑카에서의 경험을 책으로 엮어냈으며, 1차 세계 대전이 터졌을 때는 노동 당과 페이비언 당에 가입해 정치에 대한 글을 썼고, 이후 1919년에는 <인터내셔널 리뷰> 지의 편집자 역할마저 했다. 주목 받는 글쟁이는 결코 아니었지만, 자기 삶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면서 버지니아를 끌어안았다는 게 대단하다. 자기 삶의 방향은 완전히 틀었지만 자기 삶을 포기하고 던지지는 않았다.



  두 사람이 옮긴 집의 이름을 따서 붙인 '호가스 출판사'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이 부지런히 찍혀 나왔고, 좋은 평가를 받았다. 모더니즘, 의식의 흐름 기법, 페미니즘... 각 장르에서 떠오르는 이름이 많겠지만 버지니아 울프는 열 손가락 안에 떠올릴 수 있는 인물이리라. 호가스 출판사는 T.S. 엘리엇의 <황무지> 첫 판을 찍어낸 출판사이기도 하다. 여러 모로 역사에 남을만한 출판사라 할 수 있겠다.


버지니아의 건강이 좋지 않았던 1925년

  <댈러웨이 부인>, <등대로>, <올란도>, <자기만의 방>... 계속해서 작품 활동을 해 나갔지만 버지니아의 건강이 항상 좋지만은 않았다. 삶은 계속해서 이별의 연속이었다. 블룸스버리를 함께했고 버지니아의 초상도 그려 주었던 로저 프라이가 세상을 떠나고, 토비의 친구로 처음 만나 한때 버지니아에게 청혼했던 리튼 스트레이치도 세상을 떴다. 2차 세계 대전은 또다시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었다. 전쟁, 죽음, 공습... 화가였던 언니 바네사의 작업실, 남편과 자신의 아파트마저 처참하게 무너져 내릴 때 버지니아는 천천히 느꼈다. 그 어린 날부터 버지니아를 꾸준히 괴롭혀 온 신경 쇠약과 우울이 다시 버지니아를 찾아오고 있다는 것을.


가장 소중한 이에게
   분명 내가 다시 미쳐가는  같아. 우리가  끔찍한 시간을 더는 이겨낼  없을  같고 말이야. 이번에는 병에서 회복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도 들어. 목소리들이 마구 들리기 시작하고, 도저히 집중을  수가 없어. 그래서 내가   있는 최선의 일을 하려고 .
   당신은 내게   있는 가장  행복을 주었어.   있는 모든 방법으로   줬지.  끔찍한 병이 찾아오기 전까지 우리 둘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어. 나는  병과  싸울 수가 없고.
   내가 당신 인생을 망치고 있다는  알아. 내가 없으면 당신이 일을   있다는 것도,  거라는 것도 알지. 내가 지금  글도 제대로  쓰고 있는  보이지.  글을 읽지도 못하겠어.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삶의 모든 행복은  당신에게 받았다는 거야. 당신은 나를  참아주고 무척이나   줬어. 누구든  거야.  말을  하고 싶었어. 만약 누군가  구해   있는 거였다면 그건 당신이었겠지.
   내게는 당신의  마음밖엔 남은  없어. 당신의 삶을  이상 망칠  없어. 우리가 행복했던 것보다  행복한  사람은 아마 없을 거야. V로부터.

Dearest, I feel certain that I am going mad again. I feel we can't go through another of those terrible times. And I shan't recover this time. I begin to hear voices, and I can't concentrate. So I am doing what seems the best thing to do. You have given me the greatest possible happiness. You have been in every way all that anyone could be. I don't think two people could have been happier till this terrible disease came. I can't fight any longer. I know that I am spoiling your life, that without me you could work. And you will I know. You see I can't even write this properly. I can't read. What I want to say is I owe all the happiness of my life to you. You have been entirely patient with me and incredibly good. I want to say that—everybody knows it. If anybody could have saved me it would have been you. Everything has gone from me but the certainty of your goodness. I can't go on spoiling your life any longer. I don't think two people could have been happier than we have been. V.


  버지니아는 Dearest,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로 시작하는 편지 한 통을 가만히 내려놓고 집을 나섰다. 편지에는 남편을 향한 감사와 애정이 묻어났지만, 그 편지를 내려놓고 천천히 걸어가는 버지니아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1941년 3월 28일이었다. 편지를 뒤늦게 읽고 이상한 낌새를 느낀 레널드는 버지니아를 찾았지만 이미 늦었다. 버지니아 생전에 좋아했다는 우즈 강변에는 버지니아가 쓰던 지팡이가 놓여 있었고, 버지니아의 시체는 4월이 되어서야 찾을 수 있었다.


  참고로 버지니아 울프는 유서라고 볼 수 있는 글을 세 장 남겼는데 언니 바네사에게 한 장, 남편에게 두 장을 남겼다. 인터넷을 뒤지다 '흐르는 강물 앞에서 당신이 오해를 받지 않도록 남긴다'는 식으로 시작해 버지니아의 인생을 구구절절 풀어낸 글이 버지니아 울프의 유서라고 보셨다면, 그 글은 버지니아의 유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창작물이라는 점 꼭 알아주셨으면 한다. 버지니아 울프의 삶과 사랑을 단편적으로 잘 보여주는 글이지만, 우즈 강가에 앉아 버지니아가 쓴 글은 아니다.


  여담이지만 영어권에서도 버지니아의 유서를 가지고 논란이 일었던 적이 있었는데, 당시 유서와 함께 버지니아 울프의 죽음을 보도한 신문 기사에서 those 대신 these로 기고한 게 원인이었다. 작은 오타 같지만 버지니아 울프의 '끔찍한 시간'은 질병이었던 반면, 기사는 '전쟁'으로 풀어버렸다는 게 문제였다. 기사는 버지니아 울프의 "극도로 섬세한 감성 때문에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잔인함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이 느낀 것"이라고 쓰여, 마치 버지니아 울프가 전쟁 때문에 자살을 했다는 느낌을 준 것이다.


  처음 버지니아 울프를 성적으로 유린한 오빠 제럴드는 이후 출판업자가 되어 버지니아의 첫 작품을 세상에 내보였다. 버지니아의 처음도 끝도, 너무나 쉽게 활자에 짓밟힌 셈이다. 그래도 마지막에는 버지니아를 대신해 분노의 편지를 써 줄 레널드가 있었다. 비록 그 기사는 다시 한 번 똑같은 오타를 내면서 편지를 묵살하긴 했지만.



  버지니아 울프의 삶에 흔히 말하는 '꽃길'은 없었다. 겪지 않았어야 했을 일을 겪었고, 그 위에 너무 어린 나이에 겪은 상실이 병을 가져다 주었다. 그 삶으로부터 벗어난 후에도 그 아픔은 버지니아를 계속 따라왔다. 병으로, 우울증으로, 또 때로는 기억이나 일상의 어느 순간 본인만이 아는 어떤 그림자가 드리웠을 것이다.


  헌신적으로 사랑해 주는 좋은 사람을 만났다. 먼훗날 활자를 휘두르게 될 사람이 버지니아를 처음 유린했을 때는 누구도 버지니아를 보호해 주지 못했지만, 버지니아의 마지막에 활자를 휘둘러 버지니아를 왜곡하고 꺾었을 때는 누군가 버지니아를 위해 편지를 썼다. 그렇게 같이 활자를 휘둘러 싸워 주었다. 평생을 옆에서 보듬어 주고 기댈 곳이 되어 준 사람을 만났지만, 버지니아는 결국 병을 이겨낼 수 없었다.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 같은 편지 한 장만 남겨 두었을 뿐이다.


  모든 범죄가 다 끔찍하지만 어린아이를 상대로 한 범죄는 더욱 끔찍하다. 실비아 플라스도 버지니아 울프도, 나 자신과 우리 가족도, 세상 평범하게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도, 심지어 히틀러까지도, 어린 시절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우리가 똑똑히 보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버지니아 특유의 자차분하게 엮어낸 글을 좋아한다. 자주 읽히지도 쉬이 읽히지도 않지만 그래도 좋아한다. 그러나 버지니아의 글이 꼭 지금 같지 않았어도 버지니아가 건강한 어린 시절을 보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한다.


  그리고 먼 훗날 우리가 다른 누군가를 보며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 버지니아가 말했던 자기만의 방은 문인들에게만 필요한 게 아니다. 버지니아가 말한 자기만의 방과는 조금 다른 의미지만, 그런 비슷한 방이 보호 받고 사랑 받으면서 자라야 할 모든 아이들에게 필요하다.


  원래 이 글은 실비아 플라스와 묶으려던 글이었다. (길어서 잘렸다..) 광고 속에 나오는 것 같이 이를 다 드러낸 환한 미소만 사진에 남긴 여자와 울적하게 허공을 보는 사진만 남긴 여자, 어린 시절의 상처를 끝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여자. 어떠한 교훈보다는 그냥 두 사람의 삶을 보듬고 싶었고, 그리고 혹여나 비슷한 상처를 안고 살아갈 누군가가 비슷하게 생을 마감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도 살짝 얹고 싶어졌다.


  세상의 모든 실비아와 모든 버지니아들에게 우리가 우산을 씌워줄 수는 없을 것이다. 우산이 닿지 않는 곳에 뚝뚝 서 있는 아이들이 분명 있다. 여자아이뿐 아니라 남자아이라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렇기에 누군가는 더 손을 뻗어 우산 하나를 더 펴고, 누군가는 레널드가 되어 끌어안고, 그렇게 서로에게 닿았으면 한다. 그리고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우산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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