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 필요한 영혼에게 (1)
괴로운 기억은 우리를 쉽게 떠나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중요한 이유도, 우리가 어린아이들을 다양한 학대로부터 결연히 보호하고 안아주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서로가 서로를 안아주고 붙들어 주며 상처를 어루만져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 되면 좋으련만, 온전히 그런 세상은 우리가 겪어 본 적이 없다. 오히려 누구도 보듬어 주지 못한 상처가 여기저기서 괴롭게 터지는 걸 보며 눈을 질끈 감고, 때로는 보듬어 주고 달래 보아도 낫지 못한 채 시들어 버린 상처 앞에 처참한 고통을 느끼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입안이 씁쓸해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미국에 한 전도유망한 여성이 있었다. 대학에서도 두각을 드러낼 만큼 우수한 성적, 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시를 발표한 시인에다가, 뉴욕의 여성지에서 인턴으로 일을 할 정도로 야무지고 당찬 면이 있었고 얼굴마저 예뻤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장학금을 받으며 영국 유학길에 올랐고, 그곳에서 준수한 청년을 만나 결혼했다. 그 청년도 시인이 되면서 젊고 아름답고 지적인 시인 부부로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첫 시를 발표한 다음 해였던 9살에 첫 자살을 시도했다고 스스로 말했고, 화려한 도시 뉴욕에서 여성지 인턴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또 자살을 시도했으며, 준수한 청년이었던 남편의 외도로 결혼 생활은 산산조각이 났는데 그 후 스트레스와 생계 문제로 기어코는 자살 시도에 성공했다. 그것도 아주 충격적인 방법으로.
미국의 시인,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의 이야기다.
실비아 플라스의 아버지 오토 플라스는 독일계 미국인으로 벌 연구에 일가견이 있는 생물 교수였다. 어머니인 오렐리아와는 무려 20살 차이였다. 학생이었던 오렐리아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원래 아내와 이혼한 다음 오렐리아와 재혼하는 놀라운 행보를 착착 보였지만, 어떤 재혼 생활을 상상했든 그 상상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1932년에 딸 실비아를 낳고 곧 아들 워렌까지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오토 플라스는 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사실 당뇨 합병증이었으나 오토 플라스는 얼마 전 폐암으로 죽은 친구 증상과 자기 증상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자기 병이 폐암이라 굳게 믿어 치료를 거부했고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
이 당시 실비아는 고작 여덟 살이었는데, 나이 차이가 많이 나고 원래 스승과 제자 관계였던 부모님에게서 짧게 본 권위적인 가족상과 그나마도 아버지의 죽음으로 너무 빨리 끝나버렸다는 점은 실비아의 평생에 트라우마처럼 남아 영향을 끼쳤다. 아마도 무언가 뚝 끊기는 듯한 기분이었던 것 같다. 그 이후 실비아의 일기를 보면 신을 찾지만 답변이 없고 자기의 외로움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구절이 많은데, 권위적인 모습만 보여주다 너무 일찍 부재(不在)해 버린 아버지의 이름을 그렇게 부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8살 때 보스턴 헤럴드 지에 시를 기고한 실비아는 그 후로도 여러 잡지와 일간지에 시를 냈고, 미술에도 재능을 보였다. 야무지고 예쁘고 당찬 겉모습에 가볍게 호감을 표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실비아도 거기 적당히 대처하며 즐겁게 지내는 듯 보였지만 실비아의 내면에는 걷히지 않는 우울이 도사리고 있었다. 대학 생활을 만끽하다가 뉴욕에서 <마드모아젤> 여성지의 인턴으로 한 달 근무한 후 우울증에 시달리다 자살을 시도했다.
앞뒤가 이상한 문장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당시 실비아의 일기는 더 혼란스럽고 이상한 문장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렇다고 하다가도 저렇다고, 저렇다고 하다가도 이렇다고, 하며 갈피를 잡지 못하는 내면이었다. 자살 시도까지 했으니 그 내면이 어느 정도 겉으로 드러난 셈이라, 당시 정신병원에서 “유용한” 치료법으로 통하던 전기 충격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 끔찍한 시간을 실비아는 이후 <벨 자>에 풀어냈다. '벨 자'는 뭔가 덮어둘 때 쓰는 유리종인데, 실비아가 그 안에 풀어낸 사회의 모습도 실비아의 내면도 꼭 벨 자에 뒤덮인 듯하다. 다 보이지만, 그래서 다 아는 것 같지만 사실 두꺼운 유리벽에 막혀 숨이 통하지 않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아무튼 실비아는 죽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성공가도의 삶이 이어져 간다. 장학금을 받고 영국으로 유학을 갔고, 그곳에서 만난 테드 휴즈는 당시 대학생이었는데, 어린 시절부터 시에 두각을 보이며 시인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10대를 보낸 청년이었다. 두 사람은 만난 지 넉 달만에 결혼식을 올렸고,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 나오는 하루이자 제임스 조이스를 기념하는 날인 블룸스 데이(Bloomsday, 6월 16일)를 부러 결혼식 날로 정할 만큼 그야말로 문학청년들의 결혼이었다.
두 사람은 미국으로 갔고, 실비아는 잠시 모교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다가 곧 가르치면서 글을 쓰는 일까지 병행하는 게 쉽지 않다고 판단해 일을 그만두었다. 이 즈음 시인 로버트 로웰을 알게 되었는데, 로웰은 실비아에게 자기 자신만의 경험을 글에 싣도록 조언했고 그렇게 쓰인 실비아의 작품들은 '고백시'로 구별되고 있다. 테드 휴즈도 차차 유명세를 얻어 나갔다. 아무튼 테드 휴즈가 그 시절을 행복했고 서로 지지해 주던 시간이었다고 회상할 만큼, 어쩌면 더할 나위 없어 보이는 날들이었다. 두 사람은 미국과 캐나다에서 몇 년 살다가 뱃속에 큰딸 프리다를 품은 채 1959년 끝 무렵 영국으로 향했다.
1960년은 실비아의 삶에 중요한 첫 열매들이 맺힌 해였다. 큰딸 프리다도 실비아의 첫 시집도 세상에 나왔다. 바로 그다음 해 유산을 하는 아픔이 있었지만, 일전에 언급한 <벨 자>를 이때 썼고 데본 지역으로 이사도 하면서 실비아는 바쁘게 삶을 꾸려 나간다. 또 한 해가 지나 1962년, 이번에는 아들이 태어났다. 테드 휴즈는 벌을 키우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그림자에도 남편의 그림자에도 겹쳐 있는 벌을 보며 실비아는 무슨 느낌이었을까? 이후 실비아의 시에도 벌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이 즈음의 실비아는 바쁘고 평범해 보이지만, 이 해 실비아는 사고가 났는데 그 사고를 더러 자살 시도였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실비아는 충격적인 소식을 알게 된다. 작년에 한 부부에게 집을 빌려 주었는데, 그 부인과 테드 휴즈가 불륜 사이라는 것을. 두 사람은 10월에 헤어졌고 이 시기도 실비아가 다작(多作) 한 시기이다. 날씨가 갈수록 추워지던 12월, 실비아는 런던으로 이사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실비아는 이사한 집 근처에 아일랜드 작가 예이츠의 명판이 붙어 있다며 좋은 징조라고 말할 정도의 여유는 있었다. 아니면 애써 찾아낸 자기 위로였을지도. 푸른 명판은 유명인이 런던에서 오래 거한 집에 붙이는 것인데, 제임스 조이스를 기억하며 시작한 결혼이 파탄난 후 실비아가 몸을 기댄 곳도 여전히 아일랜드 출신 작가의 흔적, 문학의 흔적이었다.
이사는 했지만 여전히 추운 겨울이었다. 당시 런던은 100년 만에 찾아온 동장군에 얼어붙어 있었고, 배수관이 얼거나 돌도 되지 않은 작은 아이가 아프거나 아니면 아직 세 살도 채 되지 않은 큰 아이가 아프거나 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실비아의 우울증은 깊어 갔고, 약을 먹거나 차를 강으로 운전해 몇 번이고 자살 시도를 했다. 아이들이 잠을 자는 동안 실비아는 아이들이 먹을 간식을 준비해 둔 뒤 아이들의 방을 잘 막고 가스 오븐에 머리를 넣어 자살했다. 1963년, 30살의 젊은 실비아 플라스는 그렇게 끝끝내 자기 삶을 끊어냈다. 이후 한 평론가는 이 자살이 '도움을 요청했으나 응답받지 못한 것'이라고 평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실비아가 죽고 나서 테드는 실비아와 함께 살던 데본의 집으로 아이들을 데려왔는데, 이혼도 하지 않은 아씨아 웨빌도 같은 집에 살았다. 실비아가 자살할 때 아씨아는 테드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는데, 실비아 자살 충격이 너무 충격적이어서인지 어째서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유산을 했다. 이후 아씨아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실비아의 존재에 거의 집착을 한다. 몇 년 후 낳은 자기 딸을 죽이고 실비아 플라스와 똑같은 방식으로 자살하면서 세간의 화제가 된다. 여러 모로 착잡한 이야기다.
두 여자가 똑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떠났음에도 테드 휴즈의 이름은 길이길이 잘 살아남아 극찬과 욕을 동시에 먹는 이름이 되었다. 그 이후로 결혼도 다시 했고 시인으로서도 잘 나갔다. 영국의 계관 시인인 데다가 영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 중에는 테드 휴즈가 동시대 최고의 문인이라고 손꼽는 사람도 있을 정도니까. 내가 학부 때 배운 교수님 중에도 그런 분이 계셔서 그의 <시작법(詩作法)>이라는 책이 우리 집에도 있는데, 책을 닫으며 덧붙인 역자 해설이 참 재미있다.
‘...이 두 사람의 탁월한 시인의 결합은 단순한 공동생활을 뛰어넘어 서로 영향을 주기도 하고 격려를 하기도 하며 각자 작품을 쓸 수 있도록 한 반면 결국에 가서는 단지 <글을 쓰기 위하여> 결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하기도 했다. 그 상황은 결국 실비아 플라스의 자살로 비극적인 종말을 맞게 된다.’
아마 이 책을 번역하신 분께서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시 자체와는 무관한 선정적인 이야기라고, 오히려 시 작법을 가르치는 책의 본 목적을 흐린다고 판단해 자세히 넣지 않으셨으리라 감히 추측해 본다. (매우 오래된 책이라 사회 변화를 감안하면 더더욱) 이해는 가지만, 물의를 일으킨 연예인을 위해 내놓는 연예 기획사의 공식 입장 같은 느낌이다. 글을 쓰기 위하여 결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말은 “음악으로 보답하겠습니다”라는 말과 더불어 이 얼마나 무의미한 말인가 생각해 본다. 도덕이 도덕으로 존재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빼놓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럴 때 굳건히 세우기 위해서가 아닐까? 사람의 마음을 할퀴면서 도덕을 깬 사람이 예술로 승화시켜 보겠다고 논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게다가 테드 휴즈는 실비아 플라스 사후 그 글을 제 손으로 직접 엮어내어 더 욕을 먹었다. 실비아가 배열한 순서도 테드 휴즈가 마구 섞어 실비아가 원했던 의미를 희석시켜 버렸고, 이후 출판된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에도 손을 댔다는 의혹이 있었다. 실비아 플라스의 팬들은 테드 휴즈의 그런 행태에 매우 분노해 실비아 플라스의 무덤에 찾아가 '휴즈'라는 성을 지워 버리기까지 했다. 세월이 그 모든 감정을 흐릿하게 만든 지금도 테드 휴즈의 이름은 영광과 저주 그 사이 어딘가에 걸려 있을 것이다.
실비아의 '죽음'을 테드 휴즈 탓으로만 몰아갈 수는 없다. 실비아는 어린 나이부터 이미 불안과 우울로 잠식되어 있었고 그 흔적을 일기 곳곳에서 볼 수 있으니까. 사진 속의 실비아는 잡지 모델처럼 너무나 환하게 웃고 있고, 자살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자신만만한 기억을 많이 남겼으며, 테드 휴즈는 아무튼 잘못을 했다. 테드 휴즈만을 비난하고 이야기를 끝내기 너무 쉽지만, 나는 테드 휴즈와 별개로 실비아 플라스의 내면을 고요히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래서 실비아 플라스의 시는 많이 읽지 못했지만, 놀랍도록 두꺼운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는 여러 번 읽었다.
사실상 <실비아>라는 영화가 비판받은 지점이기도 한데, 실비아는 단지 테드의 불륜과 배신으로 인해 사랑을 잃고 자살한 것만은 아니다. 실비아의 자살 방식이 워낙 괴이한 데다가 마치 연예계 가십처럼 선정적으로 시선을 끄는 면이 있어서 실비아의 이야기가 그냥 그렇게 소비되어 버리기가 너무 쉽지만, 실비아의 절망은 단순히 남녀 관계의 사랑에만 원인을 두고 있지 않다.
실비아를 오랫동안 짓누른 벨 자를 나는 그 아버지에게서 찾는다. 아버지를 죽였어야 했는데 그럴 시간이 없었다는 섬뜩한 실비아의 시를 아시는지. 당당한 실비아의 모습 뒷면에는 뭔가가 결여되어 있다. 자기를 뚝 끊어내고 떠나가는 그림자에는 익숙했어도 자기의 말을 들어주고 기댈 곳이 되어주는 그림자를 평생 갖지 못했기에 불안하고 불행했던 건 아닐까? 실비아 플라스의 인용구로 너무나 유명해져 버린 “신에게 말을 걸지만 하늘은 텅 비어 있었다”는 말은 심심찮게 인용되지만, 그 말을 하는 실비아의 마음이 더없이 공허했으리라 생각하면 가벼이 읽을 수만은 없다.
실비아가 남긴 글을 보면 너무 어린 나이에 기댈 곳을 잃고 다시는 기댈 곳을 찾지 못한 사람 특유의 꼿꼿함이 보인다. 누구에게도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할 일도 없다는 말, 세상이 나를 건드리게 두느니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게 더 안전하리라는 말, 내 안에 잠자고 있는 어둠에 스스로도 두려워진다는 말을 하나씩 읽어내리며 나는 그런 실비아를 연민한다. 그 글 안에서는 나의 사춘기도 보였기 때문에. 사실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마음일 테니까.
자기 내면에 고요해지지 않는 목소리가 늘 있기 때문에 글을 쓴다던 실비아 플라스는, 일기 곳곳에 사랑받고 싶었다는 마음을 소리치듯 풀어놓았다. 역설적으로 불안의 끝에 몰려 자살 시도를 할 즈음의 글이 이후 가장 큰 반향을 일으키고 좋은 평가를 받았다만 그저 다 사후의 일일 뿐. 실비아 생전에 일기장 속에서 비명을 지르는 그 소리에 응답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미 지나간 삶의 궤도는 바꿀 수 없고, 이미 죽어버린 실비아의 삶은 위로할 수 없다. 온 세상이 유토피아가 될 수도 없다. 그러나 바라건대 누군가 실비아처럼 멀리 가버리기 전, 오래전 나의 사춘기가 그랬듯, 지금 비슷한 공허함 속에 있을 누군가에게는 위로의 목소리가 가 닿았으면 한다.
Young girl, don't cry.
I'll be right here
when your world starts to fall.
울지 마
네 세상이 무너지기 시작할 때
내가 바로 여기 있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