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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Sep 17. 2015

오늘은 휴일입니다

여행 (1) 벵갈루루/마이소르

   4월 한 달을 사는 동안 마음을 떠나지 않은 말은 당시 즐겨 보던 <응답하라 1994> 덕분에 알게 된,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라는 말이었다.


  이제는 끝이겠지, 하면 또 파도처럼 밀려오는 일거리에 정신을 못 차리는 시간이었다. 꾸역꾸역 모든 걸 마치고, 방학을 맞은 우리 집 어린이들을 다 고향 집으로 떠나 보내고, 나도 여름방학을 휴가 삼아 귀기 위해 벵갈루루행 밤 버스를 탔다. 나는 이미 진이 빠질 대로 빠진 상태였다. 이 한 달 정말 알차게 보내야지, 하는 다짐과 함께 눈을 감으려는 찰나-


  똑, 하고 물방울이 떨어졌다. 뭐지, 하고 보니 좌석 위에 달린 에어컨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어차피 담요도 덮고 있겠다 귀찮기도 하겠다 웬만하면 무시하고 자려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후두둑 비처럼 떨어진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버스 기사 옆자리에 타는 직원을 불렀다.


  심각한 표정으로 와서 이리저리 닦아도 보고 드라이버를 들고 와서 뜯어도 보고 하여튼 별 난리를 다 치는 동안 버스 전체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복도에 서 있었다. 피곤한데 왜 하필 내 자리에, 하는 불쾌감도 불쑥 들었다. 나 한 달 동안 제대로 쉴 수 있을까, 계속 이렇게 힘든 건 아닐까, 하는 근거 없는 불안감도 올라왔지만 이유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쩐지 잘 수리가 되어 무사히 벵갈루루까지 갔다.


  첫 행선지인 벵갈루루는 여행이 아니라 2주 동안 머물기로 한 곳이라, 그 시간 동안 뭔가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한국인이 가득한 집에서 한국 음식을 먹고 한국 사람들과 함께 한국인들 사이에서 공부를 하고 책을 읽고 산책을 하고 관광을 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카페에 앉아 꼭 서울 한복판에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엄마와 통화를 할 때 마음이 얼마나 푸근했는지. 커피를 한 잔 들이켜고 방금까지 책 읽은 내용을 생각하며 다이어리에 내 생각을 끄적거리는 내내 얼마나 여유롭고 즐거웠는지.


  잠깐 맛보기나 할 수 있는 정도였긴 하지만 힌디어를 배운 것도 큰 소득이었다. 구부렁한 그림처럼만 보이던 힌디어의 문리가 트이던 순간 느낀 기쁨은 지금도 생생하다. 아직 술술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도 몇 마디 못 하지만 그래도 첫 시작은 언제나 기쁘다. 한국 떠난 후로 먹질 못해서 가장 먹고 싶었던 삼겹살도 먹고, 잠도 엄청 자고, 나름대로 열심히 지냈지만 그보다 더 좋은 건 그냥 나로 살 수 있다는 점이었다. 내가 계획하고 생각하는 대로 지낼 수 있는 평범한 생활이 사실 가장 필요했던 휴가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2주는 쏜살같이 지나 어느새 첫 여행지 마이소르로 떠날 아침이 왔다.


뱅갈로의 엄청 큰 힌두 사원 앞에 펼쳐진 빨래 절경. 여행하는 동안은 필름 카메라를 메고 다니면서 사진을 찍었다.



여행의 시작, 마이소르


  말로만 들었지 난생 처음 타 보는 인도 기차였다. 한국에서라면 티켓을 보고 따라가기만 하면 됐지만, 인도 기차는 연착을 밥 먹듯 하고 한 번 했다 하면 몇 시간은 기본이라 좀 조심스러웠다. 역시나 연착이 되었고 플랫폼 번호는 전광판에도 나오질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하죠 아저씨... 노래가 절로 입에서 흘러나올 때쯤, 한 시간 남짓 더 기다린 끝에야 플랫폼 번호가 떴다. 내려간 플랫폼에서는 공중 화장실 냄새가 코를 찔러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기차가 생각보다 깨끗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생각보다 더럽지도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도 기차마다 천차만별이라 했다. 기차마다 회사가 달라서, 예약할 때 보고 고른다. 우리 같은 이방인들이야, 좌석 등급과 시간표만 보고 고르니, 깨끗한 기차가 올지 낡아빠진 기차가 올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아무튼 인도 기차는 밤이 되면 1층 의자 등받이를 세워 위층의 간이침대로 삼는 식이라서, 등받이가 일자로 뚝 떨어진다. 덕분에 목이 조금 아팠지만 그럼에도 창 밖을 보며 가는 건 즐거웠다. 벵갈루루를 조금씩 벗어나면서 차창 밖의 풍경은 도심을 벗어나고 있었다.


  쓰레기 더미, 유유자적 아침 식사하는 소와 늘어져 있는 개들, 삼삼오오 모여 서서 멀어져 가는 기차를 향해 팔랑팔랑 고사리 손 흔드는 아이들(만국 공통이구나, 어렸을 때 기차 타고 할머니 댁 가던 생각이 났다), 구멍가게 문간에 혼자 쪼그려 앉아 있는 여자아이, 룽기 바람으로 칫솔질을 하며 기차를 쳐다보는 배불뚝이 아저씨들…에서, 점점 드문드문 펼쳐지는 외곽의 건물들과… 코코넛 나무, 바나나 나무 등으로 변해갔다.


옆자리 아이. 옆자리에는 아주머니 둘이 아이를 하나씩 끼고 앉아 있었는데, 2시간 내내 아침을 먹었다.

  높다란 코코넛 나무는 언제나 내게는 이국적으로 느껴지는 요소다. 한국에서도 추운 북쪽에서만 살아온 내가 지금 외국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곤 한다. 커다란 나무들이 드문드문 있는 넓은 평원을 보면서 나는 영국이 이곳을 점령하기 전의 모습이 궁금했다.


  더 울창했을 숲, 당시의 사람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오래전 침략자들이 여기 처음 와서 원래 그 모습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기가 질릴 만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면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대체 무슨 엄두로 이곳을 ‘정복’하겠다는 생각을 했을까. 무식해서 용감했던 게 아니었을까.


  현재를 보면- 정확히는 현재에 어렴풋하게 넘실거리는 과거의 그림자를 보면, 그 과거가 궁금해지곤 한다. 풍경도, 나라도, 한 사람을 만나도 그렇다. 알게 되면 ‘그래서 그랬구나’하고 이해가 되지만 알지 못하면 궁금해하는 것 외에 수가 없다.


  해서 나는 이리저리 나무가 베이고 사람들이 오가기 전의 그 위용을 상상으로만 그려볼 수 있을 뿐이었다. 마우리아 왕조나 무굴 제국 정도만 좀 들어봤지 인도 역사에 대해 뭣도 모르는 나로서는, 크고 작은 토후국이며 숲 속에 부족 단위로 모여 살았을 작은 마을에서 무슨 이야기들이 펼쳐졌을지 전혀 모른다.


  과거는 과거가 되어 묻혔다. 이 땅에 용맹하게 살아갔을 그때의 사람들, 그들이 기대 살았을 숲에 대해 내가 아는 걸 다 모은대봐야 얼마나 작은 조각일까. 어느새 생각은 역사와 과거에 대한 생각까지 꼬리를 물었다. 그리고 과거에서부터 흘러흘러 온 오늘이 어떤 날인지를 생각했다. 오늘은 때마침 2014년 5월 18일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정신없이 꾸벅꾸벅 졸면서도... 이 날에 대해서만큼은 교과서에서 배운 것과 몇 가지 단편적인 이야기 가닥 외에 아는 것이 없음에도, 잘 생각해 보면 아직 더 궁금한 것과 더 알아보고 싶은 구석이 있을 텐데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목덜미에 소름부터 끼치곤 한다. 가본 적도 없는데 어딜 가도 느껴지는 이 선득한 감정은, 아마 수십 년 전 그 날이 여전히 진행형의 상처이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의 순장 문화는 매우 비합리적인 것이지만 누구도 그것을 끄집어내고 분노하고 책임을 촉구하지 않는다. 찬 땅에 제 사랑을 억지로 묻어야 했던 자들은 그때도 분명 뜨거운 눈물을 흘렸겠으나, 이미 너무 오래전 일이 된 탓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에겐 그렇게 흘려 보내기엔 너무나 가까이에, 너무나 정리되지 않고 완결되지 않은 역사가 많다. 1980년 5월 18일의 광주도 그중 하나다. 어쩌면 그 정점에 있다고 말해도 될지 모를 일이다.


  너무 나이브해 보이는 생각이지만… 잘 정리되고 완결되어, 최소한 지혈과 치료가 이루어진 상처이면 좋겠다. 흉터가 쉬이 사라지지는 않겠으나, 최소한 피를 계속 흘리며 방치되는 꼴은 면해 보면 좋겠다. 잘 다독여지면, 어느 한쪽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에게 좋겠지. 그렇게 머나먼 곳에서 우리나라 생각을 하다가 또 졸다가… 하면서 마이소르에 도착했다. 복잡했던 속과 달리 너무나 평온하게 바람 부는 오솔길이 나를 맞아 주었다. 순식간에 모든 상념을 잊고 눈앞의 나무와 꽃, 바람과 햇살에 내 마음이 스며들었다.



  역에서 빠져나오면서는 시골 간이역 뒷길을 걷는 것 같은 산뜻한 느낌이었다. 이윽고 들어가 본 동네는 예뻤다. 날씨도 보다 시원했다. 벵갈루루 같은 큰 도시에서 살던 사람들이 은퇴 후 여생을 보내기 위해 이사를 많이 오는 도시라는데 정말 그런 분위기였다. 조용하고 여유롭고 깔끔하달까.


차문디 힐 위에 있는 힌두 사원

  식사를 하고 커피까지 한 잔 마신 후에 차문디 힐에 올라갔다. 커다란 힌두 사원이 있고, 힌두의 주요 신인 시바 신이 타고 다니는 황소인 ‘난디’(난디 또한 일종의 신이다.) 상이 있다고 들었다. 우리는 힌두 사원 앞을 무진장 헤맸지만 황소 비슷한 상도 안 보였다. 아무리 물어봐도 사람들이 ‘저 아래 있다’고만 말해 주었다.


코코넛과 꽃, 과자가 담긴 바구니를 사서 코코넛을 깨뜨리는 것이 힌두교식 의례이자 봉헌이라고 한다. 멋모르는 외국인은 사실 이게 예뻐 보여서 찍었다.
사원 앞에는 봉헌물과 관광 상품을 파는 사람들이 문자 그대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저 아래'로 아무리 가 봐도 찾을 수가 없어, 뜨거운 햇빛에 밀려 난디 상은 그냥 못 보고 내려왔다. 그래도 하나씩 다 눈에 담으러 온 여행이 아니라서, 그냥 쉬러 온 거라서 어째도 다 좋았다. 관광용 버스를 타고 오르내리면서 보이는, 건물이 드문드문 있는 도시 전망도… 버스 안에서 모처럼 해외 여행 온 관광객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 수다를 떨던 것도 다 좋았다.





  차문디 힐에서 내려와 향한 곳은 마이소르 궁전이었다. 궁전 자체도 예뻤지만 공휴일이나 일요일 해 질 무렵에는 건물 모서리를 따라 달아 놓은 전구 9만 7천여 개에 일제히 불을 켜는데, 그게 또 장관이라 했다. 때마침 그 날이 일요일이라 밤의 궁전을 볼 수 있었다.



  영국군에 끝까지 맞서 싸웠다는 왕의 후손이 지금도 살고 있단다. 그래서인지 궁전 앞은 어쩐지 여전히 왕국이거나 최소한 입헌 군주제쯤 되는 어떤 나라의 축일 같은 분위기였다. 여전히 궁전에 그들이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들어서 그냥 그렇게 보인 걸 수도 있지만, ‘왕궁’이라는 존재가 을씨년스러운 장소가 되어 있거나 과거의 영광 모두 떠난 그저 그런 관광지가 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 반면, 여기는 왕궁이 왕궁으로서 자연스럽게 존중되는 느낌이 묘하게 들었다.


연인끼리 가족끼리 놀러 나온 사람들이 불빛이 켜지는 시간을 기다리며 웃고 있었다. 왕국의 축제 날 같은 기분이었다.


  특별한 날에 보이는 존중이 아닌, 일상의 일부로서 받는 존중의 느낌이 멋스러웠다. 아무튼 끝까지 올바른 기치를 내걸고 그걸 위해 싸운 것과 그냥 포기하고 물러선 것의 차이는, 비록 결과가 ‘영국의 인도 점령’이라는 교과서 속 한 단어로 훅 묶여 버린다 해도 분명 천지 차이다. 엄청난 비밀 통로와 방어 시스템을 갖춘 성에서, 궁인들이 죄 빠져나가도록 신발 끈 매 줄 궁인이 없어 왕좌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던 러크나우의 ‘바라 이맘바라’ 이야기와 상당히 대조적인 느낌이다. 나중에 보니 마이소르의 당시 군주는 '마이소르의 호랑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만큼 용맹스러웠고, 해당 이야기를 위인전이나 만화책으로도 만들어 서점에서 흔하게 팔고 있을 만큼 유명한 왕이었다.


  이곳에서 1박 2일만 보내기엔 일정이 참 짧다고 생각했다. 관광객으로서 대단하게 볼 만한 것이 있어서 짧다기보다는, 예쁘고 사랑스러운 곳이라 그냥 거기 햇살 맞으며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쉼이라는 기분이 새록새록 몰려와 짧게 느껴졌다.


그리고 남은 사진. 마이소르에서 찍은 사진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두 장이다. 마이소르 궁전 앞 꽃밭에서 찍었다.
나의 마이소르는 어떤 느낌이었는지 묻는다면 나는 이 사진 한 장으로 대답할 수 있겠다.


  하지만 어쩌면 짧았기에 더 애틋하고 기분 좋은 추억으로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아쉬운 마음 애써 갈무리해 담고 다음 날 오전, 미리 예약해 뒀던 택시를 타고 우리는 서둘러 우띠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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