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2) 우띠/쿤누르
우다가만달람이라고도 부르는 우띠는 오래전 영국인 선교사들이 많이 지냈던 곳이라고 한다. 산 위에 있어서 날이 덥지 않아서인 것 같다. 같은 이유로 오늘날에도 남인도에서 신혼 여행지 혹은 피서지로 각광받는 곳이다. 보트를 탈 수 있는 큰 인공 호수, 식물원, 장미 정원 등 쉴 만한 관광지들이 많이 있다.
쉬기에 그렇게 좋은 곳이라고들 하기에, 우띠라는 곳에 대한 기대는 그 전부터 컸다. 그런데 뜻밖에 우띠까지 가는 길에 대한 기대도 품게 됐다. 마이소르에서 숙소를 제공해 주신 분이 바로 며칠 전에 우띠에서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셨는데, 가는 길에 곰도 보고 코끼리도 보고 원숭이도 보고 사슴 떼도 봤다며 신나서 종알거리는 그 집 아이들의 설명을 들으며 무척 들떴다.
‘코끼리 보호 구역’, ‘호랑이 보호 구역’ 써 있는 표지판을 보며 기대는 점점 커져 갔지만... 결국 본 것은 가는 데마다 보는 원숭이가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스치듯 봤는데 그 와중에도 예뻤던 사슴, 동네 똥개처럼 자연스럽게 사람들 옆에 서 있는 코끼리를 보았다. 산에 코끼리가 있다니 말이 되나, 싶었는데 막상 직접 보니 그냥 자연스러웠다. 코끼리가 있든가 말든가 배드민턴 치고 등목 하고 빨래하며 코끼리를 동네 똥개처럼 자연스럽게 여기는 지역 주민들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곰이나 호랑이를 못 본 게 내심 아쉽긴 해도, 하늘에서 주르륵 녹아 흘러내리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높다랗고 하얗게 껍질이 벗겨진 나무들과, 올라가는 길에서부터 이미 아름답게 펼쳐져 있던 차 밭, 그리고 조금씩 내려가는 기온과 함께 개운한 기분이 드는 공기… 덕분에 실컷 들떠 우띠에 도착했다.
저녁을 먹고는 우띠에 있는 한 기숙 학교를 구경했다. 100년도 더 된 학교라 신식 건물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고풍스러운 느낌이 들기도 했다. 과학실이며 음악실이며 둘러 보는데 여기라면 흔히 꿈꾸는 하이스쿨 라이프가 가능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조금 부럽기도 했다.
숙소로 돌아가기 전 우띠 초콜릿이 유명하다기에 조금 사 보았는데 그냥 평범한 초콜릿이었다. 커다란 시장에 들어가서 과일을 사는 김에 우띠 사는 언니의 추천대로 아보카도 주스도 한 잔씩 마셨다. 배가 부르기도 했고 아보카도라는 과일이 익숙하지도 않아 딱히 기대되지는 않았는데, 아보카도에 설탕과 얼린 우유를 넣고 갈아 주는 주스는 엄청 맛있었다. 단박에 얼굴이 환해지는 우리를 보고 씩 웃으며 상인은 잔이 빈 만큼 주스를 더 넣어 주었다.
복숭아 같은 맛이 나는 새빨간 망고와, 케랄라인가 어디서 난다는 보통 바나나보다 크고 빨간 바나나도 사 왔다. 쫄깃하고 맛있다는 말을 하도 들어 보라색 바나나를 무척 기대했는데... 잘못 샀나? 그냥 보통 바나나 맛이었다. 기대가 워낙 컸기 때문에 그 큰 걸 다 먹는 게 오히려 고생이었다. 작년에 군뚜에 갔을 때 먹은, 쌉싸름하고 쫄깃한 맛이 나는 바나나만큼 맛있는 바나나는 어지간해선 먹기 힘들 것 같다. 그래도 망고는 맛있었다.
다음 날은 인공 호수에서 보트를 타면서 시작했다. 꽤 큰 호수였기 때문에, 이게 인공 호수라는 말을 듣고 놀랐다. 무슨 메리트가 있어서 이 산중에 인공 호수를 만들었을까 생각했는데 역시나 영국인들이 만든 것이었다.
그 다음에 원래 계획했던 건 토이 트레인을 타고 차밭이 있다는 근처 마을 쿤누르로 가는 것이었는데, 인도의 여름 방학 시즌 다시 말해 휴가철인 5월이라 무척 붐벼서 표를 사기가 힘들었다. 긴 줄 끝에서 이리저리 기웃거려 보다가 결국 토이 트레인을 포기하고 대신 쿤누르까지 가는 버스를 탔다.
관광객을 위한 버스가 아닌, 동네 주민들이 타는 평범한 버스였다. 절벽에 가까운 산길을 구부렁구부렁 간다는 것이 좀 다르긴 했지만. 아찔하다면 아찔할 수 있겠으나 공간 감각이 둔해서인지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 와중에도 졸다 깨다를 반복하며 산길을 1시간가량 덜컹덜컹 달린 끝에 드디어 쿤누르에 내렸다.
사랑스럽고 작은 마을이었다. 보통 보던 집보다 집이 좀 더 작고, 지어진 방식도 좀 더 아기자기했다. 작은 마을이라 변변한 식당이 없었지만 그마저도 기분 좋았다. 그나마 가장 큼직하고 깨끗해 보이는 식당에서 밥을 먹고, 오토릭샤를 한 대 잡아 차 밭과 공장이 있다는 곳으로 갔다.
초록이 너르게 퍼진 차밭은 보는 것만으로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온통 푸르다! 그 푸르름의 사이사이에 마치 열매처럼, 머릿수건을 동이고 찻잎을 수확하는 여자들의 원색 옷자락이 군데군데 다니고 있었다.
기념품 가게에서 샘플로 한 잔씩 준 초콜릿 차이가 생각보다 맛있었던 이유로 한 봉지 사고 공장 견학도 했다. 잎을 말리는 공정도 처음 봤고, 새 순으로 만든 차를 white tea라고 부른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가루 형태로 가공되는 차와 잎 형태로 가공되는 차의 이름이 따로 있다는 것도 처음 들어 보았다.
관광객을 위해 공장 견학을 해 주는 사람을 따로 고용해 둔 건지, 우리에게 팁을 손톱만큼도 요구하지 않았다. (인도에선 매우 흔치 않은 일이다.) ‘나중에 돈 달라고 하는 거 아냐?’ 하면서 조금씩 불안해 하긴 했어도, 대체로 얌전한 초등학생처럼 졸졸 따라다니며 견학하는 느낌이라 괜스레 좋았다. 차 밭을 오가는 비탈길과 숲 길이 너무 아름다워서 또 오고도 싶고 걷고도 싶고, 한 달쯤은 이곳에서 푹 쉬면서 살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쿤누르에서 우띠로 돌아가는 길에는 토이 트레인을 탈 수 있었는데, 상상과 너무 달랐다. 아기자기 예쁘게 만들어 놓고 토이 트레인이라고 하는 게 아니라 크기가 작아서 토이 트레인인가, 싶을 만큼 앞좌석에 무릎이 꽉 끼어 불편했는데 그나마도 만원 버스처럼 붐벼서 더 힘들었다. 다시 우띠에 도착했을 때는 잔뜩 지쳐 있었지만, 내일 새벽에 떠나야 하는 아쉬움 때문에 조금만 더 힘을 내서 한 군데만 더 보고 가기로 했다.
고민하다가 장미 정원이 낙찰됐다. 색깔도 품종도 상관없이 무슨 기준으로 심은 건지 알 수 없는 장미들이 듬성듬성 피어 있었다. 그냥 사진이나 찍자고 들어갔지만 이미 차가운 어둠이 촉촉하게 내리기 시작한 시간이었다. 어슴푸레한 새벽에 산책하는 느낌이라 나쁘지 않았다.
저녁은 벼르고 벼르던, 추천받은 레스토랑에 가기로 했다. 첩첩산중에 덩그러니 있는 데다가 오래전 무슨 저택이었던 곳을 개조해 식당으로 쓰는 것이어서... 어쩐지 오래 전의 귀족들 같은 것이 생각나야 정상이겠으나, 보고 자란 것이 귀족적이지 않기 때문인지 나는 그냥 김전일 코난 뭐 이런 게 생각나서 기분이 오묘했다. 벽에는 2차 세계 대전 때의 군인 그림이라든지 셰익스피어 초상화라든지 하는 것들이 기준 없이 걸려 있었다. (그래서 더 김전일이나 코난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 알아, 저거 다 상징으로 쓸 거잖아...)
때마침 비도 와서 바들바들 떨면서 이미 어둑한 숲길을 달려 숙소로 돌아와, 하루를 마무리하고 일찍 잠들었다. 너무나 다른 공간들을 부지런히 오간 탓에 오늘 하루가 아주 길었던, 머나먼 여행길에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택시를 타고 내려가 옆 도시에 있는 공항으로 가서 델리까지 가는 비행기를 타려면, 일찍 자야 했다. 아쉬움은 아쉬움으로 접어 두고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언젠가 이 곳 소박한 삶의 한가운데 풍덩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을, 가장 예쁜 마음으로 편지처럼 접어 남겨두고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