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쳐 지나 간 풍경 속

여행 (3) 코임바토르/델리

by 선이정

새벽 4시에 일어나 아직 어둑어둑한 숙소를 나섰다. 카운터에 사람이 없어 어쩌지 하고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적당한 곳에 키를 얹어 두고 나왔다. 여태 연락 없는 걸 보면 괜찮았나 보다.


예약해 둔 택시는 다행히도 시간에 잘 맞춰 왔다. 산중의 새벽은 아직 캄캄해 밤 같았다. 조금씩 사위가 밝아져 가는 산길을 구불구불 내려왔다. 반쯤 졸면서, 또 반쯤은 옆으로 펼쳐지는 절벽 길이나 갑자기 훅 들어오는 반대편의 트럭에 화들짝 놀라면서... 그러다 정신 차리니 코임바토르 공항이었다. 우띠에서 가장 가까운 공항인 이곳에서 비행기를 타고 델리에 가기로 한 참이었다. 이제 남인도의 시원한 휴양지를 따라 걷던 걸음을 멈추고 북인도로 갈 시간이었다.


공항 안에는 90년대로 회귀한 듯한 느낌을 주는 작은 식당이 있었고, 인도 내 카페 점유율 1위가 아닐까 싶은 커피데이가 있었다. 덩그러니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주린 배로 시간을 떼우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 아침을 먹고 커피 한 잔 하면서 지난 시간들을 일기로 적다 보니 시간은 훌렁훌렁 금방 흘러갔고, 비행기에 탔다 내리니 어느덧 햇볕이 한창인 오후 3시의 델리에 와 있었다.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우리는 인도 처음 온 사람들처럼 갈피를 잡지 못했다. 잠깐 새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릴 줄이야, 이렇게나 외국에 온 기분을 느낄 줄이야! 산중의 사람들에 비해 대도시의 사람들은 너무 빨리 걸었고, 무엇보다도 일단 너무 더웠다. 혹서기,라고도 부르는 한여름 5월이었다.


델리는 지형상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덥고 안개도 잘 껴서 기상 조건으로는 아주 악명이 높다. 우리가 사는 곳도 더위로는 이름깨나 날리는 곳이고, 그러니 이런 날씨를 경험 못 해 본 것도 예상 못한 것도 아니지만... 선선하고 한적한 우띠에서 갓 내려온 우리는 다른 걸 다 떠나서 날씨만으로도 이미 정신이 없었다.


어영부영 공항 철도를 타고 달려, 뉴 델리 역에서 가까운 곳에 잡아둔 숙소를 찾기 시작했다. 낯선 곳에서 의지할 것으로는 구글 맵밖에 없다. 지도상으론 기차역만 가로질러 가면 금방인데, 육교처럼 보이는 다리를 거쳐 가려니까 어쩐지 들여보내 주질 않는 거다. 그럼 어디로 가야 건너갈 수 있을까 갈팡질팡하다가 플랫폼 쪽으로 가다가, 이건 아니지 돌아섰다가, 그렇게 여기저기 들쑤셔 본 끝에 처음 갔던 육교로 돌아갔더니 이번엔 또 들여보내 준다.

일찍 일어나서 피곤하기도 했지만, 붐비는 사람들, 터무니없는 가격을 요구하며 윽박지르는 릭샤꾼들, 무거운 짐으로 이미 지친 우리의 얼굴은 시시각각 굳어져 갔다.


육교를 건너 방향을 꺾고 5분 정도 걸으니 숙소는 금방이었다. 한국인들이 많이 왔다가는 곳이라는 웹사이트 평점을 보고 선택했는데, 이유를 알겠다. 꼭 한국에 있는 곳 같은 디자인이었다. 외국인 대상으로 지은 모양이다. 숙소가 생각보다 굉장히 편한 데다가 딱히 관광에 미련이 없던 우리는 시간이 되면 가고 안 되면 말자는 식으로 엉성하게 짜 놓았던 인디안게이트와 랄 낄라(붉은 성) 관광 계획을 모두 털어 버렸다. 대신 여행하는 내내 고이고이 싸들고 다녔던 짜장 컵라면을 하나씩 해치우고 푹 쉬었다. 살면서 먹은 짜장 라면 중 가장 맛있는 짜장 라면이었다.


델리 스타벅스. 인도에서 가 본 스타벅스 중 가장 디자인이 예뻤다.

해가 떨어질 즈음, 저녁을 먹기 위해 코넛 플레이스로 갔다. 나름대로 관광 명소라고 미리 알아온 쇼핑 스트리트. 하지만 마땅히 배도 고프지 않고 먹고 싶은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스타벅스에 들어갔다. 짜장 라면을 정말 맛있고 알차게 먹은 모양이었다.


델리 스타벅스의 첫인상은 디자인을 예쁘게 잘 해놨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로 든 생각은 나 나름 외국인 관광객인데 내가 제일 거지 같다는 것. 그리고 세 번째로 든 생각은 사랑하는 그린티 프라푸치노! 홍차를 마시는 문화권이라 녹차도 없고 녹차맛 아이스크림도 없는 인도에서, 어쩌다 다른 도시에 갔다가 스타벅스가 있으면 가끔 마시는 그린티 프라푸치노는 그야말로 사치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는 스타벅스를 잘 가지 않았는데, 여기서는 자주 가던 곳처럼 반갑다. 가끔 세계화에 감사를 표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인도에 처음 와서 외국인 거주 등록을 하고 나와 비를 맞았던, 막막했던 그때도 그렇다. 세계화에 감사를 표하며 들어간 맥도날드에서 현지화에 유감을 표하는 마음으로 먹었던 치킨 마살라 버거는 잊지 못할 추억이다. 그린티 프라푸치노도 내가 인도를 기억하는 하나의 지표가 되겠지. 그린티 프라푸치노를 보면 언제나 지금 내가 쉬고 있나 봐, 하는 기분이 들 것 같다.


우리 정말 쉬고 있구나,라는 생각. 어쩌면 그건 관광을 하나도 하지 않고 한량처럼 유유자적 다녔기 때문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그 후로 국경일 행사를 텔레비전에서 방영해 주는 것을 볼 때나 다른 사람들이 여행 다녀 사진을 보여 줄 때, 가끔 끝내 가지 못한 인디안 게이트나 랄 낄라를 생각하며 아쉬운 마음도 들곤 했다. 하지만 그때 무리해서 인디안 게이트나 랄 낄라를 갔더라면 델리에서의 기억이 이처럼 따뜻하고 평온하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때로는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라서 더 아름다운 순간도 있다.


여유에 푹 젖은 델리에서의 하루, 무위의 하루가 끝났다. 다음 날도 일찍 일어나 6시 반에 기차 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야 했기에 우리는 일찍 자기로 했다. 그 아침이 그토록 피곤해질 거라는 사실을 아직 모른 채로. 그때만 해도 우리는 인구 13억 국가 수도의 메인 기차 역에선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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