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릴라/ 시작
1.
사랑하는 마릴라,
편지를 받고 마음이 놓였으면 좋겠어요. 저는 잘 도착했어요.
첫 날에는 녹초가 되어서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어요. 슬퍼하거나 우울해질 필요도 없었으니 차라리 잘 된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그 여파를 다음 날 아침에 다 맞았어요. 원래 새 아침이란 늘 새 힘을 가져오는 것 아니에요? 그러나 그 아침만은 정말 우울했어요. 창밖으로 회색 도시를 내다보는데, 과연 내가 이 도시에 뿌리 내리고 살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되더라고요. 여기 오길 잘한 걸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제가 너무 가고 싶어 하니 말리지는 못하면서도 심란해 하던 마릴라의 표정도 자꾸 생각이 나고요.
그리고 떠나기 전 마지막 주에 교회에서 앤드루스 부인이 했던 말이 자꾸 생각나요. "그러게 대학이란 델 가니까 겉멋이 들어서"라니요. "분별 있는 우리 제인"은 똑같이 교사로 시작했어도 "합리적인 가정 주부로서 삶을 살뜰히 꾸려 나가고" 있다니요! 그 말은 정말 차가웠지만 그 말을 떠올리고 있다는 사실이 더 짜증나요. 여기까지 와서, 있는 대로 힘을 끌어내도 모자랄 판에 이런 말을 떠올리고 있다니.
원래 뭐든지 시작한 첫 3일이 제일 힘든 거라고, 잘 알고 있지 않느냐고 스스로에게 부지런히 말을 걸어 보지만 그래도 쉽지가 않아요. 정말 저는 여기까지 왜 왔을까요? 생각해 보면 에이번리 학교에서 처음 교편을 잡았을 때부터 저는 늘 어린이들을 위한 일을 해왔는데, 굳이 이 먼 타국까지 와서 회색 도시에서 혼자 살기까지 해야 할 이유가 있나요?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이미 제 안에 있다는 걸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그리운 마릴라. 내 고향 에이번리, 마릴라가 있는 초록 지붕 집이 그리워요. 밤에 눈을 감으면 별이 쏟아질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곳, 아침엔 새 소리로 눈을 뜨는 곳. 여기엔 그런 여유가 없어요. 다급하게 날 깨우는 알람 소리에 가까스로 눈을 뜨고 바쁘게 준비를 한 다음 출근길에 올라야 해요. 에이번리의 학교로 출근할 때처럼 연인의 오솔길을 걷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사랑할 만한 길을 걷고 싶은데... 아침마다 제가 걷는 길은 너무나 참담해요.
무엇을 타고 어디로 다녀도 미어터질 것 같이 다녀야 하고, 가깝게 여기기엔 너무 먼 거리들이 과하게 연결돼 있어요. 사람들은 냉담한 표정으로 걸어 다니고, 어깨를 부딪쳐도 사과하지 않지만 그건 사람들 잘못이 아닌 것 같아요. 휩쓸려 다니듯이 살 수밖에 없도록 내몰리는 기분인데 여기서 밝은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특별하게 긍정적일 수 있는 것도 재능이고 힘이에요. 그럴 수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비난 받을 수는 없는 거잖아요.
이렇게 구구절절 말하는 이유는 저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에요. 마릴라의 꼬마 앤이 얼마나 밝게 웃고 항상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는지, 기억하시죠? 저도 제 얼굴이 무표정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흠칫흠칫 놀라요. 일상의 무채색에 매몰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지만 꼭 쉽다고만 하긴 어려운 것 같아요.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은 즐거워요. 폴 같은 아이는 찾아볼 수 없지만요. 하긴 그렇게 별처럼 빛나는 아이가 흔한 건 아닐 거예요. 다만 도라처럼 마냥 얌전한 아이들이 많아요. 그리고 여기 와서 보니 데이비는 말썽꾸러기도 아니었네요. 말썽이라는 말로 담기엔 너무나 위험하고 위태로워 보이는 아이들이 많아요. 보통 아이들에게서는 고장나지 않는 부분들이 고장나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너무 우는 소리만 늘어놓았네요. 그래도 제가 일하는 학원의 원장 선생님은 무척 좋으신 분이에요. 입시와 시험에 잔뜩 눌려 옴짝달싹 못하는 아이들을 데리고,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공부에서 뒤처지지 않으면서도 너무 억압을 느끼지는 않을 수 있을까 깊은 고민을 늘 하시는 분이에요. 그리고 새로 생긴 룸메이트 마리는 정말 좋은 친구예요. 직업도 특이해요. 범죄 현장 같은 곳에 자주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보여줄 방송 프로그램을 만든다나요.
린드 아주머니가 들으면 기겁을 하실 일이지만, 마리는 정말 멋져요. 마리는 그렇게 말하지 않지만, 마리가 해주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마리는 사회 정의를 위해 나서는 투사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시대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니 놀랍지 않아요? 이 회색 도시 곳곳에 마리 같은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면 조금은 이 도시가 사랑스러워질 것도 같은 기분이 들어요. 그러니까 결론은,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마릴라, 제가 초록 지붕 집에 처음 왔던 날을 생생히 기억하시죠? 블루엣 부인을 기다리며 부엌 한구석에 서서 제가 초록 지붕에 남을 수 있을지 불안해하던 그 시간을 저는 또렷하게 기억해요. 그게 제 시작이었죠. 모든 것의 시작이었어요. 그리고 제 인생의 페이지가 넘어가고 무언가가 새로 시작될 때마다 낼 수 있는 용기는 모두 그 날의 씨앗에서 자라난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퀸즈에 갔을 때, 에이번리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했을 때, 대학에 갔을 때, 서머사이드로 갔을 때에도... 마릴라가 저를 받아주고 아껴준 그 마음이 제게 용기를 줬어요.
지금도 같은 마음이에요. 억지로 옮겨 심어진 화분 같은 느낌으로 살기는 싫어요. 지금은 아직 모든 게 서먹하고 안개 낀 듯 불안정하지만, 여기에 또 저의 뿌리를 하나씩 내려 나갈 거예요. 발걸음을 뗄 때는 언제나 필연적으로 발이 땅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고, 설렘이 있는 영역에 불안도 함께할 수밖에 없으니 받아들여야겠죠. 저에게 그럴 수 있는 용기를 줘서 고마워요, 마릴라.
달이 떴어요. 초록 지붕 집 하늘 위에도 같은 달이 내려다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조각달마저 다정해 보여요. 린드 아주머니께도 안부 전해 주세요. 다음에 또 편지할게요.
그리움과 사랑을 담아,
마릴라의 영원한 꼬마 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