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나로 만드는

다이애나/ 우정

by 선이정


2.

영원히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친구, 다이애나.

다이애나! 퇴근하고 돌아와 네 편지를 읽는 밤이야. 네 글씨가 꾹꾹 담긴 편지 봉투를 보는데 마치 네가 여기까지 와주기라도 한 것처럼 기쁘고 마음이 두근거리더라. 읽는 내내 꼭 어린 시절 초록 지붕 집의 동쪽 방으로 돌아가 함께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는 기분이었어. 문득 그 시절이 그립네. 가까이 살며 자주 보아도 아쉬운데... 이 먼 타국까지 와서 얼굴조차 비치지 않고도 뻔뻔히 막역지우 소리를 잘도 하는 나를 용서해 줘.


네 편지는 정말 너처럼 다정하고 부드러운 문장으로 가득 차 있어서, 코를 훌쩍거리면서 읽었어. 세심한 너의 걱정 하나하나가 나를 부끄럽게도, 힘이 솟게도 만들어 주는 거 있지. 너에게 쓴 지난 편지를 생각하니, 너무 징징거린 것 같아 부끄럽기도 하고... 그럼에도 그때 너무 힘들었던 건 사실이라 네 위로와 응원을 한 줄 한 줄 읽으며 힘이 나기도 했어.

그땐 처음 적응하는 시간이라 정말이지 모든 게 다 힘들기만 했어. 그래도 이제는 어느 정도 뿌리를 내린 것 같아. 여기 생활에 차곡차곡 익숙해져 가고 있어. 매일 수업하는 아이들이 몇백명씩 되고, 에이번리 학교에 있던 시절과는 도무지 비교할 수도 없는 환경이지만... 그래도 아이들을 보는 내 마음은 같아. 어린 시절은 너무나 소중하고, 잃어선 안 될 보물이지. 아이들도 이런 내 마음을 알아주면 좋을 텐데. 아이들에게 나는 그냥 자기들이 받아야 할 점수를 위해 이용하는 자판기 정도 되는 것 같아.


그저께는 9살짜리 아이들과 수업을 하는데, 그 날 읽어야 하는 글 제목이 “취미가 무엇입니까?”였어. 취미를 묻고 답하는 표현을 익히기 위한, 누구라도 할 수 있을 만큼 흔하고 지루한 문장들이었지. 그래도 내가 그렇게 말할 수는 없잖아.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문장인 척 하면서 아이들의 취미를 물었는데 다들 주춤거리면서 대답을 못 하는 거야. 오늘 배운 문장을 아무도 익히지 못했나 싶어서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데, 암만 봐도 이상한 거지. 그 아이들 평소 하는 걸 봐선 도저히 이해 못 할 문장이 아니었거든.


“앨리스(여기 아이들은 학원에 있는 동안 다 영어 이름을 만들어서 써. 그게 규칙이야. 나랑 이름이 같은 아이도 3명이나 있어.), 너는 취미가 뭐니?”


앨리스는 그 교실에서 가장 손을 번쩍번쩍 잘 들고 언제나 막힘없이 쑥쑥 대답하는 아이야. 그런데 앨리스도 쭈뼛거리는 거야. 취미라는 말이 어렵나? 쉴 때 뭘 하냐고 물었는데 또 답이 없어. 그래서 이번에는 학교 마치고 대체 뭘 하냐고 물었지. 월, 수, 금요일엔 여기 와서 나를 만나는데 마치면 집에 가서 뭘 하는지. 화요일과 목요일엔 뭘 하는지 그리고 주말에는 뭘 하는지.


화요일과 토요일에는 바이올린 수업이 있대. 그리고 이걸 마치면 다른 학원에 가서 수학을 배워야 한다더라. 마치고 집에 가면 저녁 먹고 숙제하고 하루가 끝난다고. 일요일에도 밀린 숙제를 하느라 바빠서 딱히 뭘 할 틈이 없대.


과연 이걸 공부라고 할 수 있을까? 스테이시 선생님이 아시면 뭐라고 하실까? 네 미간이 찌푸려지는 게 여기서도 보이는 것 같아. 나도 알아, 이건 정말 공부 같지도 않고 아이 같지도 않지. 그래도 그 절망적인 시간 바로 다음엔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었어. 짧은 문장으로 간추린 버전이지만 아이들도 문학을 대하면서 훨씬 편안해 하는 것 같아서, 나도 비로소 내 일을 하는 것 같아. 사실은 문학이, 이야기가 일을 하는 거겠지.


무력과 불안에 마음 어딘가가 비에 젖은 새처럼 떨릴 때, 세상천지가 삭막하고 싸늘하게 느껴질 만큼 연약해져 있을 때, 바로 그때 문학이 우리를 구하러 오는 게 아닐까? 어린 날의 내가 상상 속의 친구를 만들어내면서 그 시간을 버텼듯이. 우리가 학창시절 썼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 그 시절을 풍성하고 예쁘게 꾸며 줬듯이.


생각해 보니 어린 시절 애정에 굶주려 있던 내게 찾아온 너 또한 한 권의 책 같은 사람이구나. 몇 번을 생각해도 너 같은 친구는 세상에 없어, 다이애나. 너와 너무 먼 타지에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훅 느껴져서 조금 서글퍼지네.


그래도 여기서도 좋은 친구들을 사귀어 나가고 있어. 같은 방을 쓰게 된 마리와는 제법 친한 사이야. 마리는 어린 시절 주재원이셨던 아버지 때문에 해외 생활에 익숙하대. 내가 고향을 그리워할 때 울적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 마리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내가 좋아할 만한 음식을 해주곤 해. 초반에 몰아치던 그리움이 결국 터져서 베갯잇을 눈물로 다 적신 걸 알고는 이럴 때일수록 손을 움직여야 힘이 난다고 레몬을 잔뜩 사왔어. 결국 우리는 하루 종일 앉아서 소금으로 레몬을 닦아 설탕에 절였어. 물을 끓여 부으면 달콤한 레몬차가 되는데, 마리 덕분에 다정한 맛이 나.

이렇게 말하니 평화로운 엽서 속 한 장면이라도 되는 것 같지만, 이런 여유가 있는 날은 많지 않아. 마리는 텔레비전에 방송되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이야.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지만 법망에는 걸리지 않는 사건 같은 것들을 고발하는 프로그램이래. 바쁜 건 말할 것도 없고, 가끔은 협박을 받거나 쫓기기도 하나봐. 이런 세상이 있다니 몰랐어.


요즘은 무슨 교회인지 어딘지 모를 종교 집단을 취재하고 있다던데, 전에 없이 지친 표정이야. 밥 먹다가도, 레몬차를 마시다가도 전화벨이 울리면 흠칫 놀라면서 전화를 받고 자리를 비워. 얼핏 들리기에도 제법 거친 고성이던데... 별일은 없을지 걱정이 돼. 그래도 마리는 이래야 자기 할 일을 다 하고 사는 것 같대. 자기는 어렸을 때부터 할 일이라면 기어코 해내야만 하는 사람이었다고.


같은 지붕 아래 살면서도 얼굴 보기 힘들 만큼 바쁜 마리지만, 이따금씩 시간을 내서 우리는 커피를 같이 마셔. 마리에게 커피는 단순히 식후의 습관도, 카페인을 때려 붓고 피로를 이겨 보자는 것도 아니더라고. 내가 이사 온 첫 날 마리가 커피를 내려주고는 그러더라. “콩을 볶고 태워 가루를 낸 음료일 뿐인데, 왜 다들 그렇게 커피를 마시는 건지 알아?”라고. 좀 바보가 된 기분으로 글쎄, 라고 대답했지.


“적어도 이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동안에는 모든 일과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으니까. 사람이 좋아한 건 커피나 에이드, 다른 어떤 음료의 이름이 아니라 사실 같이 보낼 수 있는 여유로운 시간인 거야.” 라더라.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어. 그리고 서로 바쁘겠지만 종종 커피를 같이 마시자고, 그게 이 집의 규칙이라고 했어. 그 규칙은 잘 지켜지고 있어. 게다가 혼자 마실 때에도 저 말이 늘 생각나.


다이애나, 본의 아니게 포도주에 취했던 첫 티타임 후로 우리도 참 많은 차를 함께 마셨지. 그 많은 케이크와 그 많은 찻잔은, 그 수많은 오후 4시는 다 너와 나를 위한 거였어. 너의 다정함이, 함께 보낸 따뜻한 시간들이 나를 나로 만들었지. 그러니 네가 너무 보고 싶어도, 그 때 마신 것과 꼭 같은 차 한 잔이 내 옆에 있는 한 나는 혼자도 아닌 거야.


그래도 보고 싶은 마음만은 어쩔 수 없네. 진짜로 내가 돌아가서 티타임을 함께 보낼 때까지 기다려.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어야 해. 프레드와 꼬마 앤에게도 내 사랑을 전해 주기를. 다이애나 안에 함께 있을 네 안의 앤에게도 안부를 전해 줘.



커피 한 잔의 시간을 담아

너의 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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