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버트/ 사랑
5.
나의 사랑하는 연인 길버트,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 이제 집으로 돌아갈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네 편지를 읽고서야 알았어. 시간이 언제 이렇게 가 버린 거지? 모두에게 다 똑같이 하루 24시간이 365일로 흘러간다는 걸 도저히 믿을 수 없어. 이 도시에서는 시간이 마법을 부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를 모르겠고, 정신 차려 보면 어느새 달력이 다음 장으로 넘어가 있어. 그런데 그 시간을 어떻게 알차게 썼나 생각해 보면 전혀 모르겠는 거야. 분명 나는 매일 바빴는데!
어제는 9살 아이들과 무사히 책 두 권을 마친 걸 축하하며 조촐한 파티를 했어. 이제 아이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물음표로 끝나는 문장 여러 개를 던질 수 있게 되었고, 간추린 버전으로나마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지. 내년에는 다른 선생님과 함께 더 깊은 질문들을 끌어올리고, 그 질문에 대답하는 법을 배우고, 또 다른 이야기의 문을 열게 될 거야. 아이들은 내가 보고 싶을 거라고 말하고 나도 그렇겠지만, 때로는 이렇게 아쉽게 헤어지는 순간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순간도 있더라. 아쉬움이 기쁨이라니 우습지만.
꽤 오래 편지를 쓰지 못했지? 손도 까딱할 수 없었어. 너는 내 문장을 보면 단박에 날 알아차리니까, 부치지 못할 편지를 매튜에게 썼지. 폴이 보내준 책을 읽고 폴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독후감을 썼어. 그 편지도 부치지 못했지만. 누구에게도 편지를 쓸 수 없었어. 슬픔을 내 안에서 녹일 시간이 필요했어. 걱정하지 말라고 여행지의 엽서만 몇 장 보냈지.
그럼에도 너는 기어코 그 엽서의 얇디얇은 포장을 벗기고 끝내 날 찾아내서, 나를 걱정하는 말로 가득 찬 달콤한 편지를 가득 보내왔어. 이제는 나도 그 편지에 답장을 할 수 있을 만큼 괜찮아진 것 같아. 상실이 두려운 만큼, 그 자리를 채워주는 사랑의 소중함도 잘 알고 있어.
조금만 더 괜찮아진 후에 편지를 써야지, 꼭 편지를 써야지, 하고 있었는데... 그래도 시간이 이렇게 많이 지났는지는 정말 몰랐어. 말했잖아, 이 도시의 시간은 이상하다니까. 나는 매일 분주하고, 길거리에서는 조용한 음악을 들을 수가 없어. 귀를 기울여야만 조심스럽게 들려오는 그런 나직한 노래를 나는 정말 좋아하는데, 이 도시를 걸어 다닐 때면 그런 노래는 생각조차 나지 않아. 한적한 지방 도시에 가서야 그 노래를 들으며 참 좋다, 라는 생각을 했어. 분명 사람의 뇌와 귀 끝까지도 다 자기가 사는 곳의 영향을 받는 거야. 분명해.
그래도 네 편지를 읽으니 잠시, 아주 잠시지만 그런 노래를 들으며 차를 마시고 참 좋다, 라는 생각을 또 할 수 있게 돼. 곧 너를 만난다고 생각하니 아주 오랜만에 기쁨과 설렘으로 마음이 터질 듯해서 잠이 오지 않아서 여태 차를 마시고 있어. 내일 출발하려면 이제 정말 자야 하는데... 짐을 싸서 부치느라 한없이 지친 것도 있지만 그것만이 이유라면 지금 이 기쁨은 설명되지 않겠지.
길버트. 여기서 참 이런저런 일을 많이 겪었어.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사실 언제나 그랬어. 어린 시절을 얼핏 생각해 보면 꼭 레이스와 공단과 아이스크림만 있었던 것 같지만, 머리를 염색했다가 절망에 빠져서 이불 속에서 흘린 눈물도 있었고... 조시 파이와 멍청한 내기를 하다가 다리가 부러져 기절했던 날도 있었지. 케이크에 바닐라 대신 진통제를 넣은 걸 깨닫고 계단을 올라가면서 들었던 자괴감이라든지, 마릴라에게 브로치를 가져갔다고 거짓말을 했다가 두 배로 깊은 괴로움에 빠져 흘렸던 눈물의 짠 맛 같은 것들도 분명 있었어.
어디 그뿐일까. 에이번리 학교에서 가르치던 시절도, 퀸스에서 혹은 레드먼드 대학에서 보낸 시간도 다 마찬가지야. 서머사이드에서도 다르지 않았지. 이곳 서울에서도 다르지 않았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복잡하게 뒤섞여서 일어났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면 남는 건 고운 햇살로 한 겹 포장한 기억이 되는 것 같아.
과거를 곱게 포장해 볼 수 있는 건 분명 현재에 발을 굳게 딛고 서 있기 때문이 아닐까. 괴로움이 현재를 휘몰아치게 만들 때에는 과거고 미래고 아무 생각이 안 들잖아. 그런데 그 괴로움을 과거로 밀어내고 다시 굳건한 현재에 발을 디디게 해주는 건...
결국 사랑이지. 나의 시간을 되돌려서 이 자리로 데려와 주는 너겠지. 너는 나의 시간을 늦추고 모든 흘러가는 것들을 부드럽게 잡아채서 나를 지금 이 순간에, 여기 이곳에 머물게 만드는 사람이니까.
모든 그리움을, 이 도시에서 쓰는 마지막 글에 담아 띄울게.
너를 만나러 가기 하루 전,
영원히 너의 앤.
이렇게 여러 편을 연달아 올리는 건 처음이라... 혹시 알림을 설정해 두신 분들께는 죄송합니다.
브런치X빨간머리앤 에 참여하려고 쓴 글이에요. 언뜻 본 글의 취지가 제 글과는 결이 많이 달라서, 써 올리기도 수줍어 고민을 많이 했지만... 저에게 읽는 세계를 열어 준 앤, 쓰는 세계를 열어 준 브런치가 손을 잡는 순간이 또 있을까요. 손 놓고 있기는 너무 아쉬워 참가에 의의를 두고 뜨개질하듯 조금씩 끄적여 본 글입니다. 4권과 5권 사이의 앤, 서울에 살고 있는 앤을 상상하며 썼어요.
사실은 일기처럼 쓴 글이라 많이 부끄럽네요. :-) 언젠가 새로운 글로 돌아올게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