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모든 부유하는 작은 것

폴/ 위로

by 선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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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영원한 나의 제자, 별의 아이 폴

안녕, 폴. 잘 지내고 있니? 네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어디선가 별빛이 날아드는 기분이야. 너는 이제 파도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는 게 아니라 축구에 더 열을 올리는 나이가 되었지만, 그래도 네 눈동자엔 여전히 별빛이 아른거린단다. 너도 그걸 알고 있겠지만.


보내준 책 잘 받았어. <작은 것들의 신>은 여기서 만난 친구가 추천해 줬던 책이야. 바쁘고 정신이 없던 데다가, 하필 영어로 된 건 품절이라 들여오는 데 시간이 걸린다기에 미루고 미루던 것을 이제야 읽게 됐네. 친구가 떠나고서야 읽었는데, 그 친구가 옆에 있었을 때 읽었다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아쉽기 그지없어.


네 말대로 이 책은 정말 놀랍더구나. 꼭 꽃이 천천히 잎을 피우는 장면을 하나하나 포착해 그 전개도까지 보여주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 천천히, 아주 천천히 보니까 늘 보던 꽃인데도 처음 알게 되는 거야. 아, 저 꽃이 저런 색이었던가. 저 꽃의 안쪽은 저런 모양을 하고 있었던가. 그런 식으로. 이런 것을 소설이라 부른다면 나는 평생 써도 쓰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단다.

<작은 것들의 신>을 읽는 내내 가슴이 조여 오는 듯했어. 갑작스러운 상실만큼 괴로운 건 없다고 생각했는데, 상실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불안 속에 있는 것이야말로 정말 괴로운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읽는 내내 어디서부턴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은 거기서 흘러나오는 지독한 상실의 냄새 때문이었어.


그럼에도 그 상실에 위로를 받은 것은 왜일까. 동병상련? 그건 아닐 거라고 생각해. 다만 아주 고요한, 아주 작은 것들이 먼지처럼 내 주위를 부유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 에릭 사티의 노래처럼 아주 느리게, 그렇지만 부드럽게... 나는 괜찮아지고 있고, 괜찮아지겠지.


그 다정한 노래는 어디서 들려오는 걸까. 내 주변을 맴도는 이 작은 것들의 신은 무엇일까. 생각만 골똘히 하고 있다 보니 어느새 네게서 편지 한 통이 더 왔더구나. 너의 활자는 너를 닮아서, 따뜻하고 생명력 넘치는 빛으로 날아갈 듯했어. 그제야 위로가 어디서 왔는지 알았지. 그건 비유도 상징도 아니라 정말로 노래에서 온 거더라.


노래는 누군가를 향해 날아오는 잠자리 같은 게 아닐까? 쉬이 부서지는 날개를 하고서도 포기하지 않고 계절의 하늘을 기어이 덮고 마는 거지. 심장이 팔딱팔딱 뛰고 어떤 온기를 가진 새도 아니고, 나비처럼 우아하지도 않아. 어떻게 보면 고대 생명체처럼 처절하게 생긴 것도 같지. 닿아도, 닿지 않아도... 이러다가 계절이 지나고 날개가 부서져 버린대도 끝끝내 날아가겠다는 그런 마음.


그 마음은 너무나 강해서, 그 멀리서도 기어이 여기까지 날아와 줬어. 고마워, 폴. 잠든 것도 깬 것도 아닌 밤이면 네 시를 덮고 푹 잘 수 있었어. 나를 생각하며 썼다는 그 말이 편지에 없었어도, 시 전체에서 절절하게 그 말이 느껴지더구나.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여전히 가끔 꿈을 꿔. 꿈에서는 사실 불가능한 일이나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잖아? 그런데 판타지도 무엇도 아닌 아주 여상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거든. 책상 밑의 먼지를 훔치고 새까매진 걸레를 들어올리고, 음식물 찌꺼기를 비워낸 하수구를 박박 닦고 뭐 그런 거 말이야. 조금도 빛이 나지 않지만, 오히려 남들에게 보여줄 면이라고는 전혀 없지만, 일상을 일상답게 지탱해 주는 그런 시간. 지극히 여상하지. 지극히 현실이고.


그런데 그 아무렇지 않은 현실에 그 친구와 내가 같이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아 내가 꿈을 꾸고 있구나 깨닫고 마는 거야. 내가 지금 불가능한 걸 보고 있구나, 하고. 그 친구와 내가 다시는 이곳에서 한 세상을 이고 살 수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거야. 꿈속에서조차.

그런 꿈을 꾸고 난 아침이면 멍해져. 출근이 급한데, 아이들 수업 준비가 급한데... 그런 것도 그런 날 아침엔 생각나지 않아. 그럴 때는 아무리 바쁜 아침 한가운데라고 해도 잠깐 앉아야 해. 앉아서 내가 있는 현실을 퍼즐 조각 맞추듯 맞춰 보아야 해. 그런 날 출근길에 마주치는 사람들은, 평소에는 너무나 회색 도시의 지친 사람들로만 보이던 그 사람들은 왜 그날따라 그렇게 무심히 반짝이는 생生으로 보일까.


폴, 너희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별의 나라로 가신 것도 우리 자랑스러운 매튜가 세상을 등지고 잠든 것도 우리는 다 지나왔지. 그러나 그 분들의 죽음에 한스러움은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어렸기 때문에 쉬이 지나왔던가 봐. 친구의 죽음에 슬퍼하느라 몰랐어. 내 마음에 한스러움과 분노도 있었다는 걸.


네가 보내준 책을 읽으며, 켜켜이 쌓여 온 작은 먼지들이 갑작스럽게 일어나 내 주변을 부유하는 것을 보았단다. 그리고 고요하게 부유하는 그 먼지들을 다독여준 건 너의 시였어. 네 시 덕분에 그 모든 먼지는 빛을 머금고 별가루가 되어 날아갔단다. 따뜻한 힘이 가득한 너의 시를 계속해서 써주렴. 노래를 계속해서 들려주렴.

나는 언제나 그런 네 뒤에서 너를 자랑스러워하는 선생님이 될게.

폴, 네가 나보다 훌쩍 자란 것은 키만이 아닌 것 같아.

너의 노래를 사랑하는,

앤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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