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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Jun 23. 2019

우리의 케이크 조각

영화: 칠드런 액트(2018, 리처드 이어 감독)


  사람의 마음을 생각할 때면 나는 언제나 케이크를 상상한다. 누군가는 갖고 있는 선에서 최대한 예쁘게 조각을 내어 주변에 나누며 살고, 누군가는 다 뭉개져 처참한 몰골이 된 걸 붙들고 울면서 산다. 사실 완벽한 홀 케이크를 끌어안고 사는 사람은 없다고도 생각한다. 누군가든 온전하지 못한 조각을, 크림이 뭉그러지거나 수평이 맞지 않거나 어딘가는 조금씩 결함이 있는 케이크를 안고 산다고.


  하지만 아무튼 우리는 케이크를 완벽하게 만들 수 없는 채로 바삐 살아가고, 그런 마음이 겉으로 드러날 때는 최대한 예쁜 면만 보이고 싶다. 그래서 물 밑에서는 발버둥 치는 다리가 있을지언정 수면 위로는 백조처럼 유유히 일상을 영위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럴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할까. 케이크가 녹고 뭉개지는 걸 보면서 손 쓸 수 없는 때에는.


  예를 들면 어릴 때부터 종교 안에서 신실하게 자랐는데 나는 병에 걸렸고, 치료를 하려면 종교의 원칙을 어겨야 하는데 완고한 종교인들과 부모의 원칙에 뿌리내리고 자랐다면. 3개월 후면 성인이 되어 선택권이 생기지만, 지금은 미성년자라서 강제로라도 치료를 하겠다는 병원이 그 사건을 법원으로 가져간다면.


  그리고 그 상황에서 판사로서 결정을 해야 한다면. 결정을 해야 하는데, "나 바람피울 것 같아"라는 남편의 폭탄 같은 말을 듣고 자기 삶도 뒤엉킬 대로 뒤엉켜 있는 상황이라면.


  침대에 누워 수혈을 거부하고 있는 소년 애덤, 그리고 치료를 받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운 애덤의 상황에 판결을 내려야 하는 판사 피오나. 논술 문제 배경지식 같은 이 내용이 영화 <칠드런 액트>의 시놉시스다.


※ 브런치 무비 패스를 통해 관람하고 작성하였습니다.

※ 영화의 줄거리가 서술되어 있습니다.


  피오나는 주로 아동과 관련된 사건을 맡는 듯한 판사다. 유능하고 바쁜 판사는 집에 들어와서도 서류더미에 코를 박는다. 피오나가 곁에 있지 않는 듯해 외로움을 느낀 남편 잭은 바람을 피웠어, 라는 과거형도 아니고 바람을 피울 것 같아, 라는 추측형 문장으로 피오나를 뒤흔들어 놓고 종내는 집을 나간다. 괴로워하면서도 피오나는 매일 성실히 재판에 임한다.


  그러다 여호와의 증인 소년 애덤을 치료하게 해 달라는 병원 측과, 거기에 맞서는 소년의 부모 사이의 재판을 맡는다. 소년의 부모는 자식을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눈시울을 붉히면서도 스스로의 종교적 신념과, 나아가 자식의 신념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이들의 변호사는 애덤이 3개월만 있으면 성년이니 애덤의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에 맞서는 검사는 수혈이란 게 있지도 않았던 시대에 쓰인 성경이 어떻게 수혈을 거부할 수 있냐고 그들의 종교적 논리와 다툼도 하고, 의료인을 증인으로 세워 상황을 명확히 한다. 피오나는 결정을 내리기 전에 당사자 애덤을 만나러 간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사실 영화에도 언급되지만 이런 재판은 판결 자체보다 판결을 둘러싼 고민들이 더 무겁고 오래가며 답을 쉬이 주지 않는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여호와의 증인이었던 환자가 수혈을 거부하여, 수술 중 수혈을 하지 않았다가 결국 환자가 사망한 사건에서 의사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사전에 설명을 다 듣고 동의서에 서명한 후 의사를 기소한 사건임을 생각하면, 판결 자체는 일반인의 법 감정에서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법리를 보면 복잡한 고민을 요구하고 있다. 환자의 자기결정권이 생명권과 거의 대등할 만큼 중요한 것인가, 에 대해서는 환자의 나이, 지적 능력, 가족 관계, 선택의 경위와 목적 등 다양한 것들을 고려해야만 판단할 수 있다고 풀어놓았다. 고민은 결국 당사자 몫이다.


  애덤과 피오나의 경우도 그래서, "어떤 경우든 아동 복지를 최우선해야 한다"는, 영화 제목이기도 한 '아동법'을 입에 올리며 재판 자체는 깔끔하게 끝이 난다. 그럼에도 그 결론을 얻기 전에 피오나가 굳이 애덤을 만나러 가서 시작된 두 사람의 관계와, 그 관계에서 엿가락처럼 서로에게 척척 얹히는 감정들은 결국 이런 고민들이 당사자들에게 남는 것임을 깊이 느끼게 만든다.



  전혀 무관해 보이는 두 사람은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인생의 평정심이 극도로 깨져 있을 때, 케이크가 한없이 뭉그러졌을 때, 바닥을 치는 것 같은 기분으로 평정심을 가장하며 살다가 서로를 만났다.


  살면서 가장 깊이 본인 안에 뿌리내렸을 원칙과 본인의 생명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해야 하는 애덤, 바쁜 삶 가운데 무심히 의지하던 남편이 외로움을 말하며 집을 나가고 혼자 남아 일상을 매일 살고 있는 피오나. 혼란 가운데 나타난 서로에게, 평소라면 보이지 않았을지 모를 관심을 보인다. 그리고 뜻밖에, 사이에 벽 하나 세워지지 않은 서로를 오롯이 보게 된다.


  그런 두 사람의 관계는 아름답고 우아한 공간에서, 힘 있으면서도 부드러운 음악 안에서, 임팩트가 컸던 전작들을 다 잊게 만드는 배우들의 호연 안에서 관객인 내가 오롯이 볼 수 있는 거리로 성큼 다가온다.

  


  괜찮지 않은 두 사람은 괜찮은 것처럼 지내고 있었다. 이건 내 선택이고 나는 죽을 준비가 됐다, 는 애덤의 말이나 남편에게 짐 싸서 나가버리라던 피오나의 말이나... 사실은 선택권이 그것밖에 없을 때까지 몰린 자들이 마지막으로 하는 말처럼 보였다. 정말 그때 필요한 건 그들의 속내를 들어주는, 노래 가사처럼 "기댈 어깨" 하나였는데. 그래서 두 사람은 그 가사를 깊이 들이마시며 <샐리 가든> 노래를 부르고, 그런 서로를 알아본 것이다.


  애덤은 그렇기 때문에 자기 종교의 원칙이 무너진 후 피오나를 맹목적으로 따른다. 그런 애덤이 안쓰러웠다. 그를 정말 작은 아이로 대하며 사랑한 건 피오나뿐이었던 것도 같다고, 영화가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부모도 아들을 사랑했고, 종교인들도 그의 어떤 것을 사랑했겠지만... 그를 그냥 아이로서 사랑하고 보호하지는 않았다.


  부모에게 그는 부모의 사회적 이미지보다 뒤에 있는 존재였고, 종교인들은 그를 자기들 신념의 상징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들 모두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우격다짐으로 애덤 앞에 벽처럼 세워두었다. 그리고 그 벽 뒤에 있는 애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듣지 않았다. 진짜 애덤이 하고 싶었던 말은, 부르고 싶었던 노래는, 품었을 의문은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벽 없이 애덤을 보고 선 피오나만에 정확한 질문을 던져 애덤의 의문을 피워냈고, 정확한 가사를 읊어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다.


  아동법이 있는 이유는 물론 아동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아동을 보호하려면 물론 색연필과 축구공 같은 것도 필요하겠지만, 식사와 예방주사도 필요하지만, 어느 무엇보다 가장 필요한 건 "아동을 사랑하는 어른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애덤이 건강하게 성장한다면 아마 시와 음악, 그 밖에도 삶이 자신에게 주는 것들에 얼마든지 도전하고 새로운 지평을 열어갔을 것이다. 주어진 안에서 최선의 선택을, 어떻게든 본인이 주체가 되어 내려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 고집은 분명 뭘 해도 해냈을 성격이다.



  그런 애덤을 한눈에 알아보고 판결문에 녹여낸 피오나, 끝까지 애덤을 안쓰러워하는 심란한 표정의 피오나는 정말 아이들을 사랑해서 그 일을 하는 사람 같았다. 애덤이 자꾸 자신을 따라올 때 피오나가 애덤에게 한 말, 아직 세상에 슬픈 상황에 놓인 아이들이 너무 많다는 말이 피오나의 삶을 이끄는 힘이구나 싶었다.


  남편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서류에 코를 박고 사는 것도, 음악으로 힘을 내고 커피를 마시면서 그 자리를 지키는 것도, 그런 감성을 가졌음에도 뉴스와 사람들이 떠드는  거친 말에 휘청거리지 않는 것도. 피오나는 일 중독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아야만 지켜줄 수 있는 아이들이 있기에 그렇게 사는 것이다. 피오나의 케이크 조각은 그렇게 생겼다.



  피오나의 남편 잭도 많이 외로웠을 것이 이해되지만, 한편으로는 사랑하는 이의 눈이 향하는 곳을 같이 봐주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에 그는 답을 찾은 것 같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말해 달라며 피오나의 손을 잡는 잭은 피오나의 사랑이 분명히 향하는 곳을 알고, 그 길에 기꺼이 발을 같이 들이는 것 같아 보였다. 잭도 자기 케이크의 모양을 차곡차곡 잡아간다.

  


  법원과 병원, 교회와 집. 어느 사회든 꼭 있는 공간들이다. 재판 판결뿐 아니라 어떤 선택을 할 때에도, 아이들을 기억하는 사회였으면 하고 꿈을 꿔 본다. 꼭 아주 작고 여린 아이가 아니더라도, 3개월 후면 법적으로 성년이 되는 소년이어도 마찬가지다. 어떤 종교를 가졌더라도, 어떤 생각을 하고 있더라도, 완벽할 수 없는 우리의 케이크 조각을 아이들에게만은 기꺼이 내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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