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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Jul 01. 2019

알 수 없는 우주를 유영하는 것

영화: 이케아 옷장에서 시작된 특별난 여행(2019, 켄 스콧 감독)

  영화 제목을 보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뭐야?"였다. 가겠다고는 했지만 시놉시스도 얼렁뚱땅 눈으로만 훑었다. 어차피 볼 거면 모르고 보는 게 제일 속 편하니까. 그러나 동행인에게 이야기는 해줘야 해서 대충 읽었다가... 친구에게 "뭐 옷장에 들어갔다 나오면 다른 도시가 나온다는데? 판타지인가 봐."라고 소개했다. 내가 <나니아 연대기>를 너무 많이 봤나.


  결론부터 말하면 판타지보다 더 판타지 같은 영화지만, 의외로 단단한 현실에 기반을 둔 영화다. 게다가 좋다. <알라딘>처럼 유쾌한데, <가버나움>의 요소들이 스쳐 지나가는 영화라고나 할까.


  아무 배경 지식 없이 보며 나도 함께 영화 속 여정을 따라 걸었다. 보고 나면 되게 여행이 가고 싶어 지지 않을까 싶었는데 뜻밖에 아니었다. 영화에 담긴 여정은 여행보다 삶을 닮아 있었다. 알 수 없이 태어나 알 수 없는 우주를 유영하듯 살아가다 언제 끝날지 또 알 수 없는, 그렇게 누구와도 다른 각자만의 고유한 여정을.


※ 브런치 무비 패스로 관람하고 작성하는 글입니다.

영화 시놉시스 정도의 내용만 서술되어 있어, 영화 보시기 전이어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영화는 뜻밖에도 인도에서 시작한다. 아니 다음 영화에서 제작국이 미국이랑 프랑스라고 했는데... 주연 배우가 인도 사람이긴 했지만 이렇게 인도의 거리가 본격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나는 몇 년 전 내가 걸어 다니던 길을 걷는 분으로, 반갑게 같이 걷는다.


  그 길을 따라 우리를 데리고 여행을 떠날 이 인도 친구의 이름은 아자타샤트루 라바쉬 파텔, 통칭 '아자'다. 아자는 인구 10억을 훌쩍 넘는 나라, 다양한 인간 군상을 모두 볼 수 있는 나라에서 태어난 아이답다. 태어날 자리를 정하고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출발선상이 각자 다르다는 사실을 재빠르게 알아차린다.



  아자는 자기가 사는 세상이 다가 아니라는 걸 어린 나이에 알아차린다. 뭄바이 도비 가트에서 남의 빨래를 해주는 어머니, 게다가 여자 혼자서는 관공서를 가도 무시당하기 쉬운 인도에서 아버지 없는 집. 대충 보아도 알 만한 사정이지만, 아자는 자기 삶을 숙명으로 여기며 체념하기보다는 도전으로 여기며 호기롭게 받아들이는 타입이다.

  호기심도 많고, 이케아 카탈로그를 하나 봤다가 완전히 푹 빠져서 온 세상을 이케이 카탈로그 보듯이 볼 만큼 낭만도 있고, 돈 냄새가 나는 것을 잘 붙들고 금방 따라 할 만큼 손재주나 눈썰미도 좋다. 어영부영 학교는 다녔지만 동네 깡패에게 상납금을 내는 뜨내기가 되어 소매치기와 거리의 마술로 살고 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마음이 있는 곳, 어릴 때부터 없는 살림에나마 농담처럼 모자가 서로를 데려가겠다고 말하던 곳 파리로 그는 떠난다. 가진 거라곤 오직 여권과 위조지폐 100달러, 그리고 그동안 갈고닦은 사기 경력뿐. 그는 이케아에 있던 어떤 미국 여자, 마리에게 첫눈에 반했는데 뜻밖에도 둘이 코드가 좀 맞는다. 데이트 약속을 잡는 것까지도 매우 순조로웠으나, 갈 곳 없고 돈도 없는 그가 이케아 옷장에 숨어 들어갔다가 뜻밖의 여행이 시작된다.



  영화를 보기 전에도 알고는 있었다. 이 영화 속에는 아주 많은 도시가 등장한다는 걸. 그러나 내가 살면서 유일하게 가 본 이케아 매장은 터키 이스탄불 점이었고, 내가 살던 인도 하이데라바드에도 이케아 매장이 생겼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정말 이케아 옷장에 무슨 마법이 걸려 있어서, 옷장 타고 도시에서 도시로 여행 다니는 내용인 줄 알았다. 이게 나의 상상력의 한계, 내가 발 디딘 세상에서 볼 수 있는 '와 좋겠다' 싶은 여행 그림이다.


  그러나 현실은 훨씬 다채롭게 잔혹해서, 아자는 내가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그 도시들을 다니게 되었다. 있는 게 돈 뿐인 상류층부터 갈 곳 없이 방황하는 난민들까지, 아자는 참 다양한 사람들을 다양한 곳에서 만난다. 내가 나의 세계에 발 딛고 살기에 차마 다 보지 못하는 다양한 세상을 영화는 담담하게 보여준다.


  우리가 선 곳에 따라 우리라는 영화의 장르도 달라진다. 예컨대 궤변을 늘어놓으며 상대의 말을 전혀 듣지 않는 영국 경찰은 생뚱맞게 카메라를 보며 노래를 부른다. 그의 인생은 장르로 비유하자면 뮤지컬이었다. 다소 드라마틱하고 그냥저냥 매일 즐거웠으리라. 엉겁결에 그에게서 숙제를 부여받고 있는 대로 짜증을 내는 스페인 경찰의 장르는 소소한 휴먼다큐나 일상적인 톤의 독립영화 정도 되었을까. 그리고 우리의 주인공은 자타공인 영화의 나라 출신답게 발리우드 스타일로 간다.



  발리우드 영화의 특징은 우리의 모든 희극과 비극을 손쉽게 자기 색깔로 승화한다는 점 같다. 누구를 만나든, 어디를 가든 아자는 소소한 것에서 기쁨을 찾을 줄도 알고 가슴 아픈 이야기에 공감할 줄도 안다.


  사실상 예술의 순 기능이란 그런 것일 테다. 다양한 장르로 가지를 치다 보면 물론 우리의 일상과 유리된 작품들도 많이 나오지만, 사실 인류사에서 예술이란 것이 처음 발아했을 때는 그런 기능이었을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우리의 희로애락을 담는 것. 그리고 이 영화 속 사람들은, 아니 보통 사람들은 그런 희로애락조차 때로는 자기 자리가 어디냐에 따라 허용되지 않는 것만 같은 삶을 많이들 산다.


  동아시아에 태어난 사람과 서남아시아에 태어난 사람, 유럽에 태어난 사람과 미국에 태어난 사람, 아프리카에 태어난 사람과 중동에 태어난 사람. 모두의 세계는 확연히 다르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부유한지 가난한지에 따라 또 다르다. 거기서 누군가는 부유한 배우, 누군가는 난민, 누군가는 번듯한 직장인, 누군가는 진짜 여권을 갖고 있어도 의심받는 여행자가 된다.


  인도 사람은 그 과정을 카르마, 즉 윤회하면서 과거에서부터 쌓아온 업보의 수레바퀴 탓으로 돌릴지 몰라도... 나는 아니다. 아자의 여행은 단순히 흥미로운 여행자의 이야기 같지만 그 뒤에 켜켜이 쌓여있는 배경은, 시사 면 뉴스에서만 보는 이야기가 아니라 카르마 못지않게 거대한 수레바퀴이고 현실이다. 그렇게 영화는 보여주고 싶은 것들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자연스럽게 배경으로 보여주었다. 실제로 우리 일상 후면에 그런 이야기들이 흘러가고 있듯이.



    내가 딛고 사는 세상과는 너무나 다른 배경에서 흘러가고 있어서, 다음이 어떻게 될지 디테일을 쉬이 예측하기는 어렵다. 배경도 등장인물도 너무나 샥샥 바뀐다. 그 모든 가운데 아자는 그때그때 주어진 상황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한다. 계속해서 다가오는 도전에 응하다 보면 흘러간 것들을 뒤돌아볼 새가 없다.


  그래서 아자의 여행은 일상을 탈피해 호젓하게 쉬다 오는 바캉스 느낌의 여행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치열한 일상을 더욱 닮았다. 세상에 절대 같은 여정을 밟은 사람이 두 명은 없을 것 같은, 아주 특이한 여행길인데 너무나 일상을 닮아 있다. 게다가 그가 최선을 다해 내린 선택들은 배경 속에 흘러가는 누군가에게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위로로 다가선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좋았다.


  산다는 것을 논하기엔 아직 이른 나이지만, 알 수 없다는 것 하나만은 알겠다. 어쩌면 미확인 비행물체 같은 이들과 마주하고, 느껴지지 않는 힘이 나를 옥죄거나 생각지도 못한 빛이 흘러들기도 하는 예측불허의 매일매일은 알 수 없는 우주를 유영하는 우주 비행사 같다는 기분도 든다.


  우주영화에서 종종 보던, 둥둥 떠다니던 그들 같은 기분. 일견 부드러워 보이는 몸짓이지만 바로 다음 순간 폭발을 보게 되기도 하는, 뭐 그런 순간들. 영화를 보며 기분 좋게 잠에 든 다음 날, 갑자기 안타까운 소식이 내 성벽을 부수고 내 삶에 쳐들어와 망연자실하게도 되는, 그런 순간들.



   영화와 전혀 상관없는 딴 얘기지만, 최근에 그런 적이 있었다. 전날 늦게까지 중요한 발표를 준비하다 잠든 지 두 시간 남짓 되었던 일요일 아침이었고, "언니, 일어나! 불났어! 나가야 돼." 하는 동생 목소리에 잠에서 화드득 깼다. 그렇게 눈을 뜨고 가장 먼저 들려온 소리는 유리 깨지는 소리와 밖으로 나오시라고 소리 지르는 목소리였다.


   다행히 별일 없었지만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오신 부모님 차를 타고 집으로 가면서, 검댕 연기가 묻은 내 팔과 대조되리만큼 새하얗게 반짝이는 차창 밖 이팝나무가 너무 새삼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라디오에서는 "봄날은 가네 무심히도" 하며 무심한 듯 노래하는 자우림의 곡이 흘러나왔다.


  그 날은 잠들지 못했다. 감은 눈 안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만 같았고, 잠이라도 들면 또 날카로운 파열음이 나를  깨울 것만 같았다. 아무도 크게 다치지 않았고 우리 집에는 불이 옮겨 붙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가 매일 보던 복도를 상상하며 문을 열었을 때 까만 연기가 꽉 차있는 걸 보고 놀란 마음은, 가만히 있기도 무섭고 나가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불이 어디서 났는지도 모르니 나가기도 무서울 때의 막막함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뉴스에서 흔히 듣던 얘기였다. 오늘 오전 몇 시 어디 어디에서 아파트에 화재가 발생하여 주민들이 대피했습니다...로 시작되는 문장들. 아무렇지 않게 들어 넘겼던, 사실은 누군가의 세계에 파열음이 나고 있던 순간들. 나는 그 날 긴급구호 후원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자의 여정을 보며 그 결심을 다시 떠올렸다.


    아자의 여행을 되돌아보며 일기에 꾹꾹 적어본다.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이 항해에서 우리는 작은 선순환을 이끌어낼 수 있을 뿐이라는 것. 후회가 남지 않도록 매 순간 최선을 다할 뿐이라는 것. 가까이 다가선 누군가에게 작은 친절을 건네야만 나중에 돌아볼 때 후회가 남지 않는다는 것. 아자의 알록달록한 여행길은 겉만 화려한 게 아니라, 그런 다정함이 들어있어 좋았다. 아자보다 훨씬 평범해 보이지만 실은 그렇게 다채롭고 다정한 여행길을, 실은 우리도 같이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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