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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Jul 06. 2019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영화: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 (2018, 질 를르슈 감독)

   이 영화 시놉시스를 보고 든 생각은 "또 얼마나 아저씨들만 매력적인 척 포장하려고..."였다. '아'벤져스라는 포스터 문구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나이 드는 여정이나 거기서 지쳐가는 모습을 조롱하는 데에는 딱 잘라 반대한다. 그러나 <방구석 1열> 여성 특집 편에서 주성철 <씨네 21>지 편집장이 목에 핏대 세우며 말했듯, "아줌마"라는 호칭에는 사회적 편견만을 부여하면서, "아재 파탈"이니 뭐니 하면서 "아저씨"라는 명칭에'만' 하염없이 면죄부를 주는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다소 미심쩍은 시선으로 보러 들어간 영화였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내내 신경림의 저 구절을 떠올렸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보는 사람마다 달리 풀이하겠지만 내게 이 말은, 평범한 인생들의 즐겁고 사소한 일상을 너무나 잘 담아낸 말로 보인다.


※ 브런치 무비 패스로 감상하고 작성하였습니다.

※ 영화의 스토리가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마치 <아멜리에>에 나오던 것처럼 감각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며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별것 없다는 말. 그리고 동그라미에 네모를 맞출 수도, 네모에 동그라미를 맞출 수도 없는 게 세상 이치라는 말. 그리고 영화는 각자의 실패 상황을 쭉 보여준다. 예고편에 2년째 백수, 예민미 폭발, 파산 직전의 사장님... 등으로 요약되는 말.


  예고편에서는 짤막하게 전체적인 상황을 보여주어야 하니 그렇겠지만 사실 그 말들은 이 사람들의 상황을 요약해서 표현하기엔 너무나 앙증맞은 표현이다. 마치 인터넷에서 본 어떤 일부 아저씨들의 눈치 없음, 배려 없음, 성범죄 콜라보를 "아재"라는 단어 하나로 눙치는 상황만큼의 비약이라고나 할까. (이 아저씨들이 그랬다는 건 아니고 그냥 비약의 정도가 그만큼 크다는 말이다.) "2년째 백수" 베르트랑은 우울증으로 약을 먹고 있다. 예민"미"란 대체 무슨 단어인지 모르겠으나, "예민미 폭발" 로랑은 내 눈엔 그저 아내와 아들에게 언어폭력을 행사하는 분노 조절 장애 환자로 보인다.


  "파산 직전 사장님" 마퀴스는 몇 달이나 밀린 월급을 달라는 직원에게 돈밖에 모른다며 소리를 버럭 지르고, 파산 직전인 회사 상황을 알지도 못하면서 여자 불러 거품 목욕이나 하고 앉아있는 것이... 상사라면 너무 싫을 것 같다. "히트곡 전무 로커" 시몽은, "아빠는 데이비드 보위가 아니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되지 못할 것"이라는 딸의 말마따나 자기 객관화가 좀 필요해 보인다. 나머지도 다 고만고만한, 그냥 아저씨들이다. 타밀인지 싱할라인지 하여튼 자기 말로 계속 중얼거리는 스리랑카 아저씨나, 몸 좋은 수구 선수들에게 비웃음의 대상이 되곤 하는 수영장 관리인.



  객관적으로 잘나거나 뛰어난 게 그다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 저건 좀 그렇다..." 혹은 "내가 가족이면 너무 힘들겠다..." 싶은 면을 한두 개씩은 가진 아저씨들. 이들은 어쩐지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을 하고 있다. 확실히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을 상상해 보면 여성 선수들이 먼저 생각나지만, 이들은 덜그럭거리면서 어쩐지 하고 있다. 그리고 수영 전인지 후인지 락커룸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수다를 퍼지게 늘어놓는다. 자기 인생의 어려움, 일상에서 자기가 접한 새로운 고충을 서로에게 나누고 다독이며 이들은 서로 친해져 간다.


  농담 삼아 '수다-테라피'라고 할 만큼, 수다는 실제로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된다고들 한다. 내게 처한 상황을 입 밖으로 내면서 내 안에서도 한 번 정리가 되고, 문장으로 들으면서 또 상대의 반응을 보면서 조금 더 객관화가 되며, 상대가 표현해 주는 공감이나 연민 등을 통해 내 감정도 치유를 받는다. 이들은 그렇게, 답 없는 인생의 문제들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이렇게나마 풀어가고 있다. 참으로 건전한 취미지만 수영 자체에는 별 생각들이 없어 보인다.


  이들을 가르치는 담당 강사 델핀도 사정이 크게 나아 보이지는 않는다. 페어 싱크로나이즈드 선수로서 빛나는 미래가 기다리고 있던 시절도 있었는데, 파트너가 사고를 당해 더 이상 수영을 할 수 없는 몸이 된 후 델핀도 같이 주저앉았다. 지금은 알코올 중독으로 상담을 받고 있고, 델핀 또한 가르치는 팀을 심적으로 많이 의지하고 있다.



  그러다 델핀에게 사정이 생기면서, 과거 델핀의 페어 동료였던 아만다가 이들을 맡게 된다. 몸이 괜찮지만 마음에 병이 나 주저앉은 게 델핀이라면, 몸이 아파 주저앉았지만 마음만은 여전히 쌩쌩한 아만다는 스파르타 식으로 이들을 가르친다. 손에 든 스틱으로 수영복 차림의 남자들을 짝짝 때리고, 괴롭힘을 당해도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이들을 몰아세운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몰아치는 아만다에게서 작은 반란을 시도하기도 하지만, 아저씨들은 또 착하게 최대한 따라가려 애쓴다. 그래도 델핀이 괴테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어주는 동안 얌전히 앉아 어린 학생들처럼 그 시구에서 힘을 내는 걸 보면 이러저러해도 속은 다 순수한 사람들인가 싶고.



  그렇게 오합지졸이었던 이들은 엉겁결에 대회 출전을 넘보면서 차곡차곡 훈련을 한다. 물론 그 과정이나 결과는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는 바이고, <당갈>처럼 과정 하나하나를 짜임새 있게 보여준 것은 아닌지라 설득력은 별로 없어 우리에게 그렇게 감동적이지는 않다.


  무엇보다 여기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같은 실화를 수도 없이 가진 나라다. 경력 단절되고, 우울한 현실에서 이 악물어가며 해내도 안 되는 일에서 "졌지만 잘 싸웠다"를 느끼는 나라라고요. 하물며 어영부영 등 떠밀리던 아저씨들이 단시간에 금메달을 딴다는 건 사실 영화라서 가능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매끈한 몸으로 절도 있는 동작을 보여준 다른 선수들을 다 제친다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룬 작은 성취는 관객의 마음까지 뿌듯하고 기쁘게 만든다. 작은 성취의 경험이 일상에 새로운 빛을 낸다. 칙칙하던 일상에,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고 사그라드는 것들만 지켜보고 있던 일상에 새로운 빛이 더해지자 그들에게도 새로운 힘이 난다. 결국 아저씨든 아줌마든 보편적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크고 작은 성취를 하고, 그 성취를 주변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며 살아가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게 없으면 인간은 탁해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어쩌면 외로운 인간 대다수는 그런 탁한 자신에 익숙해진 나머지 빠져나갈 힘을 잃어버린 상태일 수도 있겠다.



  동그라미에 네모를 맞출 수도, 네모에 동그라미를 맞출 수도 없다고 했던 이들이 사실은 그럴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게 영화의 내레이션에 담긴 생각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안 맞는 틀에 사실은 들어갈 수 있던 이들이었던 게 아니라, 이들은 함께하면서 동그라미가 될 수도 있고 네모가 될 수도 있다.


  못나고 서툰 서로를 붙들던 팔, 다른 팀 선수들처럼 매끈하지도 탄탄하지도 않고 흐물흐물한 살이 늘어진 팔. 그 팔로 서로를 붙들 때 그들은 네모 모양을 만들 수도 동그라미 모양을 만들 수도 있었다. 의도적인 것이었는지 우연이었는지, 그들은 몸에 몸을 겹쳐 네모 모양을 만든 동작 바로 다음에 서로의 팔을 힘 있게 잡아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그런 건 사실 생각보다 별 게 아닐 수도 있을 것 같다. 왕재수라고 생각하면서도, '야 왕재수! 술 한 잔 하러 가자!' 하고 그를 당연하게 우리의 일부로 인식하고 있는 것. 어쩌면 정말 함께한다는 건, 서로의 고운 면만 보는 게 아니라 미운 면도 보면서 그럼에도 내 테두리 안에 그를 두는 그런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모자라고 서툰 서로를 있는 그대로 끌어안고, 그 안에서 작지만 특별한 성취를 경험하는 순간이 어떻게 이름답지 않을 수 있나. 특별한 척하지 않고 무게 잡지 않아서 유쾌하고 산뜻하면서 즐거웠다. 이들을 키워내며 과거의 망령을 떨치고 일어선 델핀과 아만다도 눈부셨다. 아, 물론 적당히 나이가 들고 적당히 인생에 데어본 사람들만이 무심하게 툭툭 던질 수 있는 농담들도 즐거웠다.



  가기 전에 배우를 찾아보았을 때 내가 전작에서 보았다고 인식한 배우는 두 명이었는데, 얼굴만 알았지 이름은 몰랐고 지금도 잘 모른다. 한 명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서지x 역할로 나왔던 배우, 다른 한 명은 <러브 미 이프 유 대어>에서 마리옹 꼬띠야르와 호흡을 맞춰 줄리앙 역할을 했던 배우다. 찾아보니 이들뿐 아니라 다른 배우들도 전작이 상당하던데, 프랑스 영화를 좋아해서 이들의 얼굴이 익숙하다면 이들이 한껏 힘을 뺀 이 영화가 더욱 신선하고 유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크린 속 배우들과 관객은 서로 모르는 사이지만, 배우들과 함께 나이 들어가고 그들의 얼굴에서 세월을 성실하게 맞아들인 주름을 보는 건 또 다른 즐거움이니까.





  꼭 금메달이 아니어도, 사람들의 환호를 받는 종목이 아니어도, 그 종목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를 붙들면서 그 안에서 본인들끼리 즐거울 수 있는 성취감만 있다면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 티격태격하던 사이라 해도 그런 성취를 보면서는 도저히 미소 짓지 않을 방법이 없으니까. 그래서 이 영화는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처럼 행복하고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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