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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Jul 24. 2019

사랑과 정열을 그대에게

영화 알랭 뒤카스:위대한 여정(2017, 질 드 메스트르 감독)

  나는 미식의 세계에 무지하다. 맛있는 음식은 분명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지만, 나는 음식에 예민하지 않고 애초에 감각도 둔한 편이라, 그냥 그 시간을 뭉뚱그려 행복하게 기억할 뿐 음식은 부차적이다.


  하지만 나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나 말고도 수많은 사람들이 20년가량 집에서 해주는 밥과 학교에서 천편일률로 나오는 급식 먹으며 컸다는 것은, 곧 주는 대로 먹으면서 살았다는 말이 된다. 이후로도 사람들의 식사란 으레 비슷해서 대학교 학식이나 학교 주변 식당, 정신 쏙 빼놓게 북적거리는 직장 근처 식당, 뭐 다 그런 식으로 사는 사람이 대부분이니까. 미각이 둔한 나 같은 사람도 그중엔 깨나 많을 것이다.


  게다가 음식을 음미하고 만끽한다는 동사보다 조진다거나 때운다는 동사를 많이 보는 듯한 요즘, 그냥 우리 시대의 식문화가 전투적이 되어가는 것도 같다. 오죽하면 주말에 친구 만나고 논다는 것도 대부분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천천히 나른한 식사를 하고 카페에 가서 차를 마시는 것일까. 더군다나 나는 인도에서 살던 시절에는 내가 뭘 먹는지보다 쌀이 없는 사람들에게 쌀이 가는지가 더 중요했던 탓에, 그런 시간을 거쳐온 한낱 현대인인 나에게 음식 자체를 탐미한다는 것은 편안하지도 익숙하지도 않다.


  그러니 당연히 나는 검색하면 백과사전 결과까지 나오는 이 유명한 셰프를 전혀 몰랐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나와는 너무 다른 세계의 이야기, 알지 못해 궁금하지도 않은 세계를 내가 들여다봐야 하나? 나는 알랭 뒤카스라는 사람은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다만 이 사람을 다큐멘터리로 담겠다고 결정한 감독의 마음이 궁금했다.


  나 같이 미식에 무지한 사람이 한둘이 아닐 텐데, 파인 다이닝이라는 자체가 소수를 위한 음식인데 그럼에도 그를 영상이라는 보편적 매체로 담아야겠다고 생각한 데에는 미식이라는 소재 그 이상의 이유가 있을 테니까. 인물을 담은 다큐멘터리 최근작들을 훑어보면 아녜스 바르다, 류이치 사카모토, 안도 타다오, 김복동 할머니 등 다 굵직굵직한 인물들이니, 분명 나는 몰라도 이 사람 또한 그런 사람일 거라고.



  영화를 보고 나온 지금도 나는 미식의 힘과 매력을 잘 모르겠다. 다만 그걸 만들어가는 사람의 힘은 알겠다.


※ 브런치 무비 패스를 통해 감상하고 작성하는 글입니다. :)


  영화에는 소름 끼치게 맛있어 보이는 것들이 줄줄 나올 줄 알았는데, 물론 맛있어 보이긴 하지만 푸드 포르노 느낌은 아니다. 오히려 진득하게 일하는 사람의 여정을 담았다는 느낌이고 그래서 미각에 도전하기보단 열정에 도전하는 영화다. 알랭 뒤카스가 맛을 찾아다니는 길은 집요하다. 그는 농장에서 갓 자란 채소를 아삭아삭 씹으며, 햇살 아래서 그 맛을 집요하게 음미한다. 아주 작은 맛의 알갱이까지 놓치지 않는다.


  그렇다고 프랑스 국내에만 침잠하지도 않는다. 일본판 '파인 다이닝'을 찾아 고급 일식집을 방문하고, 중국의 캐비어 양식장을 찾아가 캐비어를 씹어 삼키고, 몽골에서 대통령을 만나 악수를 하는 한편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던 동네 아저씨를 잠재 고객으로 정중하게 대우하고, 미국의 레스토랑에 방문해서도 농장의 채소를 직접 쓸어보고 씹어본다.


  팬을 쥐고 직접 요리를 하기보다는 마음으로 요리를 하면서 새로운 요리를, 또 새로운 길을 찾아 헤매는 그의 여정은 분명 힘이 있었다만 나의 시선은 여전히 삐딱했다. 내가 한국인이어서 그런가, 한국에서 먹는 일식은 차라리 맛있었는데 일본에서 먹은 일식은 그다지 맛있었던 적이 없다. 몇 끼 먹다 보면 다 그 밥이 그 밥 같고, 일식은 담백하다 생각했는데 일본에서 먹으면 죄다 지나치게 달거나 짜거나 하여튼 별로였다. "복권 가르는 심정으로" 상어 배를 가르는 모습을 보면서도, 물론 우리가 무언가를 잡아먹으면서 살 수밖에 없다지만 그래도 저렇게까지 탐미적으로 먹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다큐멘터리는 그 대상에게 바치는 러브레터라고 변영주 감독이 그랬던가. 토씨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씨네 21> 구석에서 읽은 말이 내 마음에 화살처럼 박혔는데, 이 감독도 알랭 뒤카스를 향해 들뜬 러브레터를 정말 쓰고 싶었던 것 같다. 다만 <인간극장>의 열성적이지만 차분한 편인 카메라 워킹에 익숙해 있던 내게, 알랭 뒤카스의 손끝을 따라 다소 빠르게 움직이는 카메라 워킹은 조금 부산스럽다. 셰프의 세계란 게 그럴 수밖에 없나 싶기도 하지만. 아무튼 별로 곱지 않은 시선으로 팝콘이나 주워먹고 있던 내게, 알랭 뒤카스는 서둘지 않고 천천히 자신을 말한다.



  파인 다이닝은 음식이 아니라 추억을 파는 거라는 그의 말도, '모두가 좋아할 만한' 케이크를 딱 잘라 거절하며 파인 다이닝은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그의 말도 수긍은 가면서도 내게는 큰 의미가 없었다. 나는 파인 다이닝과는 거리가 있는 삶을 살아왔고 살아갈 예정이므로. 다만 그의 직업 정신만큼은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가 어떤 길을 가는지 분명히 알고, 그 길 위에서 최선을 다해 달리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내가 정말 놀랐던 건 그는 그의 트랙 바깥에서도 똑같은 속도로 최선을 다해 달리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그는 필리핀의 어느 학교를 후원하면서 그 학교 학생들이 요리의 길을 걷도록 장학금을 주고 직업의 길도 열어주고 있으며, 브라질에서 월드컵이 열렸을 때는 멀쩡한데도 버려지는 음식들을 재활용해서(이건 리사이클이 아니라 업사이클임이 분명하다) 새로운 만찬을 차려 월드컵보다 뒤로 밀린 사람들에게 고이 대접한다. COP 회의가 열리던 파리에서는 올랑드 전 대통령을 만나 친환경을 강조하는 식사를 준비하고 싶다고, 미디어의 조명을 받는 셰프로서 그 정도는 하고 싶다고 똑 부러지게 의견을 밝힌다.



  그때는 그에게 존경심이 일었다. 자기 길을 부지런히 가기도 쉽지 않은 세상에, 자기 트랙에서 최선을 다해 달리는 직업인의 모습만 보아도 대단하다 싶은 이 세상에, 자신이 속한 세상이 결코 모두의 세상이 아님을 분명하게 인지하면서 자신 바깥의 세상까지 손을 뻗는 사람이란 대체 어떤 존재인지. 내 길 가기도 바쁜 나로선 상상이 잘 가지 않는다.


  예술가를 이야기할 때 그가 받은 상이나 그가 그동안 이룬 업적을 이야기하는, 더없이 위인전스러운 방식은 보통 주변의 서술에서만 나온다. 나였으면 자랑스러워서 어깨춤추고 다닐 것 같은데, 예술가들에게는 그들이 받은 상이나 가꾼 성적보다는 오늘 그가 집중할 어떤 것들만이 존재하는 것 같다. 미슐랭에서 별을 몇 개를 받았든, 자신이 어떤 역사를 썼든, 그걸 주변에서 아무리 박수 치며 말하든, 본인은 본인의 길을 가는 것이야말로 정말 예술가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그런 예술가 알랭 뒤카스를 카메라는 마치 비빔밥처럼 두루두루 섞어 담는다. 파인 다이닝을 최고로 준비하기 위해 날카로운 의견을 제시하거나 풍성한 칭찬을 쏟아내는 셰프로서의 그도, 사회적으로 메시지를 남기고 싶어 묵직한 발걸음을 옮기며 자기 신념을 뚝뚝하게 표현하는 한 사색가로서의 그도, 그러면서도 사생활은 전혀 보이지 않는 철저한 공인으로서의 그도, 베르사유에 레스토랑을 낸다는 중요한 프로젝트를 준비하면서 주변인들과 협업하는 사회인으로서의 그도, 햇살 아래 식물을 하나하나 머금는 자연 속 인간으로서의 그도, 죽음의 축축한 코끝을 피부로 느끼고 돌아와 하루하루를 채워나가는 살아있는 사람으로서의 그도.



  알랭 뒤카스라는 사람이 단순한 요리사, 단순한 사업가 이상으로 사람들에게 의미를 던지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아무리 사람이 다면적이라지만, 그는 최소한 자기 객관화가 잘 되어 있는 인간이므로. 스스로의 위치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기에 겸손하면서도 자부심을 가진 단단한 예술가로 빛날 수 있는 것 같다. 범죄를 저지르고도 "OO로 보답하겠습니다" 라며 눙치고 넘어가는 사람이 한 트럭인 이 세상에서, 분명 그런 존재는 빛난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내 머릿속엔 아주 끈적하고 능글맞은 억양의 "사랑과 정열을 그대에게!"라는 문구가 계속 생각났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성대모사로 많이 봤던 것 같아서, 원조가 누구였더라 검색해 보니 아직 젊었을 적 이덕화가 광고에서 활짝 웃으며 던진 문구였다.


  비록 웃음기 섞인 말로 계속 변주되기는 하지만, 내 기억에도 없는 광고에서 시작된 말이 여태까지 변주되는 걸 보면 정말 힘 있는 말 같기는 하다. 쉬운 말 같아 보여도 진심이 빼곡하게 차야만 가능한 말, 누구라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멋진 말이기 때문이다.


  마음만 살짝 주기는 쉽지만, 온 마음을 다 주고 그 마음을 위해 구슬땀 흘리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요리라는 수단으로 삶을 풍성하게 빚어내는 알랭 뒤카스의 자세는 정말이지 "사랑과 정열을 그대에게!"였고, 나도 그렇게 하루를 살아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도 내가 택한 길을 풍성하게 빚어내 주변으로 흘러가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잊고 있던, 타성에 젖었던 마음을 일으켜주는 80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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