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여행 (6) 인도 그 이상의 인도

by 선이정
너에게로 가는 길은 설렘의 한가운데 돌을 던지는 것과 비슷했다. 그러나 우리가 처음부터 이런 사이였던 건 아니다.


그 낯선 지명을 처음 들은 건 2010년이었다, 고 기억한다. 엄청난 일이 있었다고 했다. 산에 기대어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다만 카스트가 매우 낮고 종교가 달랐을 뿐인 사람들이 무참하게 짓밟히고, 살해당하고, 욕 보이는 일을 당했다. 마을마다 불을 지르고 집을 부숴서 몇 백 혹은 몇 천 가구가 하루아침에 보금자리를 잃었다 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무슨 일인지 파악조차 할 방법이 없었고, 사실이 아니라더라 하는 말도 들려 오면서 그냥 기억 속에 흘러 갔다.


나중에 이곳에 오게 됐을 때 그 낯선 이름을 다시 입에 올리게 됐다. 지금도 옆에 앉아서 알아보지도 못하는 한글을 구경하고 있는 아이를 비롯해 함께 사는 아이들 모두 그곳에서 온 아이들이다. 그 피비린내 나던 시기의 직접적인 피해자들은 아니지만, 직접적인 피해자들이기도 했다.


그 이후로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을 기억하며 또 공포에 떨며, 산 속에 숨어 집을 새로 짓고 마을을 다시 만들어 갔다. 그들에게만 불합리한 경제구조하에서 어렵게 삶을 재편하고 꾸려 가기 시작했다. 나로서는 알 길이 없지만 그들 사이에서는 이들의 이름만 들어도 어느 카스트 '출신'인지 가닥이 바로 잡힌다고 했다.


죄 없는 자에게 찍힌 주홍 글씨. 그 지역에서는 이 아이들을 학교에서 잘 받아 주지도 않아 굳이 지금 내가 사는 이곳까지 와 부모님과 떨어져 살며 공부를 하고 있는 거다. 이게 내가 20여 명의 아이들과 한 집에 살게 된 이유였다.


어떻든 아이들은 희망차게 자라고 있다. 살던 마을이 심지어 자기 집이 쑥대밭이 되었다는 자기들의 역사를 입에서 입으로 들어 어렴풋하게 말하고 다니지만, 영락없는 어린아이- 사랑스러운 어린아이로 또 소년으로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다.


아이들이 나무 타고 논 얘기를 영웅담처럼 늘어놓으며 디디(누나)는 가본 적 없어 모른다고 으쓱거리던 그 곳, 항상 궁금하고 가 보고 싶던 그 곳을 정말 가게 된 거다. 두근거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비행기가 착륙했을 때는 이미 밤이었고, 비행기 차창 밖으로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마중을 나와 주신 한 한국 분의 차를 타고 들어갔다. 생각보다 길이 잘 닦여 있었다. 예전에 죄다 숲이었기 때문에, 정부에서 마음 먹은 대로 길을 닦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기반 시설은 많이 들어서지 않았다. 큰 도로는 한국 고속도로 뺨치게 잘 닦여 있지만, 그 근방에는 정작 불빛이 얼마 되지 않아 사위가 온통 어둠이었다.


아이들의 집이 모여 있는 동네는 공항이 있는 곳에서 꽤 먼 첩첩산중 두메산골이라 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차로 하루 종일 달려야만 닿을 수 있는 거리라, 우선 오늘운 여기서 한 밤을 신세 지고 다음 날 아침 출발할 예정이었다.


기내식을 안 줄 거라고 생각해서 햄버거를 미리 사 두었는데 기내식이 나온 바람에 햄버거는 고스란히 함께 나누는 야식이 되었다.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전기는 나갔고, 옹기종기 앉아 음식을 챙겨 먹는 후텁지근한 여름밤이었다. 그런 밤 으레 무서운 얘기라도 하는 아이들처럼 우리는 붙어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를 공항에서 픽업해 한 밤 재워주시기까지 한 분께서는 사투리 섞인 말씨와 웃는 얼굴로 편하게 우리를 맞아 주시고 다양한 이야기를 해 주셨다. 그런 그분도 그 지역의 지난 시절을 이야기해 주실 때는 얼굴이 굳어지셨고… 핸드폰 플래시의 흐릿한 불빛으로 비춰 보이는 그 얼굴이 어쩐지 불콰보이기도 하고 슬퍼 보이기도 하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사람이 얼마나 죽어 나갔는지 모른다, 고 하셨다. 얼마나 흉흉한 소문이 돌았는지 모른다, 고 하셨다. 아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쪽 사람이 있어 이 집에 숨어 지냈다, 고. 지금도 근처 슬럼에 사는 사람 80% 이상은 그때 집을 잃고 다시 돌아갈 터전이 없이 지내고 있는 사람들이다, 고도 들었다. 2주 이상 밖에 나가지를 못했다, 고 들었다. 귀를 막고 싶을 만큼 끔찍한 이야기들, 실화였기에 또 나와 직결된 이야기기에 더 소름 돋는 이야기를 여름 밤 납량특집처럼 들으며 하루를 마쳤다.


다음 날 아침 차를 타고 아이들의 집이 있는 동네로 향했다. 무지막지한 일이 있은 후에도 수많은 위험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아이들을 우리와 연결시켜 주셔서 안전하게 지금까지 신경 써 주고 계신 현지인 목사님께서 며칠 간 우리와 함께 다니며 안내를 해 주시기로 되어 있었다.


우리를 재워 주신 분과는 작별할 시간이었다. 여전히 긴장감이 남아 있는 동네들도 있지만, 우리가 가는 곳은 다녀도 될만한 곳들이고 현지인 목사님께서 일정을 안전하게 잘 짜셨으니 걱정 말고 잘 다녀오라고 하시는 말씀은 더없이 다정했다. 마음 깊은 감사를 전하며 출발했다.


중간중간 밥을 먹으러 내리거나, 아이들 집에 선물할 것을 사려고 내리거나 하긴 했지만 대체로 하루 종일 차 탄 것밖에 없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신이 났고 매 순간이 소중한 기억으로, 스틸 사진처럼 선명히 남았다.


시골 동네 5일장 같다. 아니, 시골 동네 5일장 맞다.
며칠 내내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질척한 시장 바닥, 우리를 옆집 손녀 보듯 다정하게 대해 주었던 상인들의 너털웃음은 비보다 더 우리 마음을 적셔 주었다.

아이들 집에 하나씩 선물하기 위해 차(茶) 가루 한 봉지, 설탕 한 봉지, 식용유 한 팩씩을 사고, 우리 아이들은 물론 우리를 신기하게 보며 따라다닐 동네 꼬마들에게까지 두루두루 나눠주기 위해 과자도 두세 박스 샀다. 가는 길에 우리가 마실 물과 먹을 과일도 사서 보따리 보따리 싣고 달렸다. 어둑어둑해질 무렵부터는 완전히 산길을 가고 있었다. 주변이 다 산이긴 했지만 그래도 길은 꽤 좋아서, 많이 덜컹거리지도 않는 편이었다. 사실 4박 5일 내내 좋은 길만 다녔다.


산길을 한참 가다 보면 큰 길을 기준으로 양쪽에 집들이 쪼로록 있는 작은 마을이 하나 나오고, 또 지나가면 산길이어서 도저히 뭐가 나올 것 같지 않은데 그런 마을이 또 나오고, 마을을 지나 산길을 가다 보면 또 뭐가 나올 것 같지 않고 그런데 또 마을이 나오고, 대체로 그런 식이었다.


아이들 중 한 명의 집에 도착해 오랜만에 보는 아이와 또 부모님과 반가운 인사를 했다. 우리 집에서 같이 지내던 여자아이도 있었다. 반가워 얼싸안고, 그 아이가 우리 온다고 특별히 신경 써서 동네 전통 방식대로 만들었다는 닭고기 커리를 늦은 저녁으로 먹었다. 다음 날 날이 밝으면 본격적으로 아이들 집을 돌아보고 다닐 생각이었다. 몇 집이나 갈 수 있을지, 얼마나 되는 아이들을 볼 수 있을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기에 그저 기대하는 마음으로 잠들었다.


꽤 피곤했는데도 아침엔 일찍 눈이 떠졌다. 눈 뜨자마자 한 일은 마을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마을이라고 해도 큰 길 따라 걸어갔다 돌아오는 것이 전부였지만. 낮고 소박한 지붕 아래 돌아다니는 닭이며, 낯선 외국인을 쳐다보는 동네 아이들의 눈망울, 어쩐지 지붕 위까지 점령하고 있는 염소 같은 것들이 참 사랑스럽고 오밀조밀했다.


마을 끝자락으로 가면 강이 하나 있었는데, 갠지스와 마찬가지로 여기도 지금 혹서기라 물이 적었다. 아침 산책을 같이 해 준 여자아이는 우기가 되면 수위가 어느 정도 된다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야기하다가 대뜸 말했다. 한창 그런 일이 있었을 때, 사람들을 죽이고 그 시체를 강물에 던져 넣곤 했었다고.


산 속에 흔히 있는 개울보다 조금 클 뿐 평범하게만 보였던 강이, 그런 이야길 듣고 나니 좀 달라 보였다. 돌아와 아침을 먹고 차이도 마셨다. 나는 평소에 HIV/AIDS 가정을 하루에도 몇 집씩 방문하면서 차이를 엄청 많이 마셔서 집집마다 조금씩 다른 다양한 차이 맛이 머릿속에 스펙트럼처럼 펼쳐져 있는데, 그 날 마신 차이는 여태까지 마신 것들과 다른 맛이었다. 차 가루 양이나 설탕 양의 차이가 아닌 것 같아 특이하다고 생각하면서 맛있게 마셨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갓 짠 우유로 만든 것이라고 했다. 어쩐지 더 맛있더라.


우리는 본격적으로 집집마다 돌기 시작했다. 처음 방문한 집은 우리 아이들 중 가장 큰 아이 집이었는데, 부모님 도와 싹싹하게 일을 돕고 있던 아이는 ‘날씨가 이렇게 안 좋은데 무사히 왔다니 정말 감사한 일이다’라고 말하며 손을 비볐다.


가장 큰 아이라 해도 아직은 아이인데, 우리를 염려하고 또 안심하며 말하는 모양새가 무슨 원로 목사님 같은 말투여서 한참 웃었다. 온 가족이 키가 크고 아이도 키가 큰 편인데, 못 본 잠깐 새 그새 자라 이제는 나보다 키가 한 뼘이나 컸다.


다음 집은 비어 있었다. 전날 결혼식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곳에 가 있다고 했다. 못 보고 가는 건가 싶은 아쉬움에 괜히 집 앞에 편지 한 장 남겨놓고 돌아서는 길, 가다 말고 잠시 차를 세워 풀밭에 있던 행인에게 뭐라고 묻는다. 그러더니 우리 아이의 소재지가 갑자기 나왔다! 구글맵도 이렇게 정확하진 않을 것 같아… 우리 아이들 유명인사구나.


생각해 보니 이 산골에서 저 멀리 다른 도시로 유학 가서 외국인들이랑 같이 지낸다는 것 자체가, 내 느낌으로 말하자면 마치 국제학교 드물던 시절 시골에서 국제학교로 입학한 것 같은 그런 느낌은 아닐까. 생각해 보니 우리 아이들 소위 말하는 '엄친아'의 표본이겠구나, 키득키득 웃으며 다시 기대감을 안고 갔다.


일일이 나열하자면 남들에겐 의미가 없지만 내겐 매 순간 특별했던 그런 방문과 식사가 이어졌다. 음식을 많이 주는 것이 손 대접이고, 그 음식을 먹지 않으면 모욕이 되는 문화권에서 우리는 며칠간 배고프다는 감정을 잊고 지냈다. 아직 배부른데 다음 끼니, 또 아직 배부른데 다음 끼니, 이렇게 계속 이어졌다.


동네 전통 방식으로 만든 닭고기와 염소고기로 매 끼니를 먹었으며, 이 지역의 특산물이라는 망고도 먹었다. 여태까지 먹은 망고 중 가장 맛있는 망고였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아이들이 왜 늘 자기네 동네 망고 타령을 하는도 알 것 같고.


한 가정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나온 밤 하늘, 문자 그대로 쏟아질 듯 맑게 반짝거리던 별들도 잊을 수 없는 한 장면으로 남아 있다. 평생 본 밤 하늘 중 가장 별이 가득한 하늘이었다. 눈 떼기가 아쉬울 정도였다.


우리 아이들을 몇 명이나 볼 수 있을까, 모든 기대를 내려놓고 몇 명을 만나든 그저 감사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는데 20여 명 중 17명이나 만났다. 아이들 중에는 일정상 자기네 집까지 못 온다는 것을 알고 새벽부터 산을 몇 개나 넘어서 다른 아이의 집까지 와 우리를 기다린 아이도 있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도 돌아가지 않고 우리를 기다린 아이도 있었고.


심지어 어떤 아이는 왜 우리를 데려오지 않느냐고 집에서, 정확히 말하면 온 동네에서 혼났다고 했다. 동네 사람들도 처음 보는 외국인들이 궁금했고, 부모님들도 우리가 어디서 지내는지 정확히 듣지 못해 이부자리까지 다 봐 놓고 기다리고 계셨다는 거였다.


그러니 모든 시간이 다 끝났을 때는 감사하다 못해 황송해 몸 둘 바 모르는 마음뿐이었다. 나 따위가 뭐라고 이렇게 극진히 챙겨주시나. 나보다는 내 이전부터 쭉 이곳에 있던 사람들의 모든 노력과 헌신으로 쌓인 관계가, 그 사랑이 우리를 밥 먹여 준 것이겠지. 이중으로 감사한 일이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과 우리 집을 항상 도와 주시고 신경 써 주신 현지인 목사님. 일정 내내 우리와 함께해 주신 목사님과 헤어지는데 목사님 눈에 고이는 눈물에 같이 눈물이 났다. 그 분 눈에 고인 눈물은 더없이 순수한 마음, 사람과 사람의 애정이었다. 그 때문에 분명 다시 만날 것을 알면서도 헤어지자니 아쉬운 이 마음.


그래도 떠나야 했다. 한참 또 하루를 달려 (그중 몇 시간은 달리는 게 아니라 길을 막고 앉아있는 염소들을 쫓는 데 필요했다.) 공항으로 다시 돌아왔다. 비 오는 밤 도착했던 거기가 맞나 싶을 만큼 괜스레 달라 보였다. 아마 내가 달라졌겠지. 나무들이 푸르게 뻗어 있는 산길만 달리다가 도착한 공항이었으니까. 이런 아름다운 숲길에, 집이 주는 안락함까지, 아이들은 이곳이 얼마나 그리울까.


나무에 매달려 있는 큼직한 연두색 덩어리들은 잭프루트다.

한때는 피가 흐르고 고통의 상징과도 같았던 곳이 평온하고 사랑스러운 사람들의 보금자리로, 서서히 달리해 온 그 색깔이 감격스러웠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심혈을 기울여 사진을 계속 찍었는데, 지금 이 모습이 얼마나 소중한지 피부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차를 타고 다닌 길은 한때 사람을 죽이려는 이들이 돌진하던 길이었고, 우리가 보고 지나친 나무와 강과 폭포는 그때도 그 모든 걸 똑똑히 지켜 보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의 소박한 행복이, 염소 젖을 짜고 빨래를 널고 망고를 따는 작고 반복되는 일상의 소중함이 더욱 빛났다. 우리 모두 그것을 알고 있었다.


일주일 후면 아이들도 방학을 마치고 돌아오기 때문에 금방 만날 거였는데도 무척이나 떠나기 아쉬웠던 건, 사람뿐 아니라 그 사람을 담은 산천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그리고 꿈처럼 다가온 이 시간은 다시 꿈처럼 멀어져갔다. 이제 작별을 고할 시간이었다.


안녕, 내겐 인도 그 이상의 인도였던 곳! 지도 상으로는 잘 표시되지도 않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내 마음엔 언제나 남아 있을 이름이기에 너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언제 다시 볼 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못 볼 지도 모르겠지만, 항상 내 마음에 있을 꽃. 우리는 그렇게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덧붙이는 글: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이 글에서 저는 지명(관광지는 예외)과 인명을 밝히지 않습니다. 제 글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주로 종족 박해나 HIV/AIDS를 삶의 배경으로 하기에, 저는 이들의 이야기를 최대한 보호하면서 말하고 싶습니다.


한국에 있는 누군가가 안다고 뭐 문제 되지는 않을 겁니다. 누군가가 누군가의 사진을 알아볼 리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겠죠. 누군가가 살면서 같은 이름과 같은 지역을 마주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지만 그때 우리가 그 이름에서 아픔의 냄새를 먼저 맡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백지 상태로 만나, 오롯이 이야기만 전한 뒤 백지 상태로 마치고 싶었어요.


또 하나의 이유는 트라우마입니다. 잘못한 거 하나 없이 집에서 쫓겨날 수 있다는 것도,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 떨어져 있어야만 했던 시간의 느낌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저 또한 그 트라우마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제가 보호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저보다 더하겠지요. 한국 사이트에 한국 말로 글을 올리면서도 저를 위해 또 이들을 위해 이름을 지우고 싶은 걸 보면, 우리의 트라우마는 아직 살아있는 모양입니다.


하여 이름을 지우고 이야기만 오롯이 독무대에 올립니다. 함께 나누어 주시고 읽어 주시는 분들께 100%를 나누지 못하는 것은 죄송하지만, 이 이야기를 꾸준히 읽어 주시는 분들은 이미 이 아픔을 이해하는 힘이 있는 분들이라는 생각을 해요. 앞으로도 이니셜에 가려진 이름, 대명사로 지칭되는 모든 것에서 기표 너머의 기의를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계속해서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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