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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Apr 06. 2021

지옥도 바깥으로

넷플릭스 <화이트 타이거> (2020, 라민 바흐라니 감독)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


내가 인도에 살던 시절, 이웃에는 남루한 단칸방에 혼자 사는 할머니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저래 봬도 브라만 출신이라고 수군거렸다.


카스트에 대해 입밖에 낸 말은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누가 실은 브라만이래,라고 웅성거릴 때가 아니면 들을 일이 없었다는 소리다. 브라만-크샤트리아-바이샤-수드라 4계급이라고 학교 다닐 때 배웠지만... 그 얘기를 꺼내면 인도 사람들은 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실제로는 수천 개의 계급이, 실은 직업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는 건 나중에 들었다. 사실인지 모르겠으나 인도 사람들끼리는 이름만 들으면 대충 알아본다는 얘기도.


돈이 또 하나의 카스트라는 씁쓸한 말도 그즈음 들었던 것 같다. 이건 듣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단출한 생활을 하는 이웃집 할머니더러 '저래 봬도 브라만 출신'이라고 하는 것만 봐도, 돈과 명예를 가진 이들의 성공 신화에서는 낮은 카스트도 좋은 소재거리가 되어 있다는 것만 봐도.


카스트는 법적으로 폐지되었지만, 각양각색의 차별은 더욱 은밀하고 촘촘하게 자라났다. 게다가 카스트 자체도 현실에서 폐지되지 않았다. 일상의 차별은 물론이고 공적 문서로 카스트 증명서 발급이 가능하니, 카스트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인도에서는 안 되는 일도 없고, 되는 일도 없다"는, 또 누군가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넷플릭스 영화 <화이트 타이거>를 보면서 떠오른 상념들이다. <화이트 타이거>의 길잡이가 되어줄 이야기들이기도 하다.



<화이트 타이거>를 재질에 비유하자면 녹이 슬고 거친 양철 판 같다. 금방이라도 나를 쓱 베고는 파상풍을 안겨줄 것 같은 영화. 동시에 살짝만 손 대도 묻어나는 녹 가루처럼, 순식간에 확실한 흔적을 남기는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발람이라는 인물과 함께, 가장 흡입력 있는 1인칭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발람은 인도에서는 신에게 찬양을 드리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발리우드 영화들 초반에 '하레 크리슈나'처럼 힌두교 크리슈나 신을 찬양하는 노래가 나오거나 향을 피우는 장면이 나오는 경우가 많은가 보다. 그러나 정작 발람의 청자는 인도에 방문하는 중국 총리 원자바오다. 매끈한 사업가의 외양을 하고 총리에게 메일을 쓰는 발람. 발람의 신은 돈과 권력일까.



발람의 회고를 따라간다. 그의 어린 시절에는 돈과 권력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는다. 이따금씩 지주가 수금하러 오는 작은 시골 마을, 대가족의 둘째 아들로 자랐다. 발람은 학교에서 영어를 줄줄 읽고 "한 세대에 한 마리만 나오는 백호가 너다"라는 칭찬을 받을 만큼 똑똑하지만, 백호로 자랄 기회는 없다. 마을 찻집에서 석탄 깨는 일, 그것이 발람의 카스트이자 주어진 자리였다.


수금하러 오는 지주를 '황새'로, 그 큰아들을 '몽구스'라고 부르며 속으로 싫어한다. 그래도 앞에선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다. 출세 기회도 없지만 그나마 있다면 지주들을 통해서 올 수밖에 없으니까. 구세대의 산물인 황새, 전형적인 깡패 느낌의 몽구스와 달리 미국 유학파인 둘째 아들 아쇽이 나타났을 때 발람은 기회를 찾았다고 느꼈다. 아쇽은 오랜 외국 생활로 아버지나 형에 비해 비교적 "하인"들의 인권을 생각하는 사람이다.


운전면허를 따서 지주의 운전기사가 되겠다는 손주를 할머니는 고깝게 본다. 집안의 모든 수입을 틀어쥐고 대가족을 관리하는 할머니에게는 아들도 손주도 대가족의 부품이다. 부품이란 기능에 맞게 기량을 발휘해야지, 무한한 꿈을 꾸거나 자리 바깥으로 나가선 안 되는 것이다. 할머니만의 생각이라기보다는 오래전부터 굴러온 시스템이 그렇다.



하지만 발람은 최선을 다해 그 자리를 따낸다. 자기만의 방법으로 한 걸음씩 나아간다. 마침내 아쇽과 함께 델리로 가는 길에 기사로 동행하게 된다. 아쇽이 미국에서 만난 아내 핑키까지 모시게 되어, 충직한 하인의 자리에 걸맞게 행동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속으로는 아쇽을 어린양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이내 그가 어린양이 되기도 한다. 풀숲에 숨어 고개를 떨구는 초식동물.


델리에서 어떤 사건들을 보고 듣고 겪었기에, 아무것도 가진 게 없던 그가 영화 초입에 보여주었던 단정한 사업가의 얼굴을 이뤄낸 것일까?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0에 가까운 전환이기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궁금해 자꾸 그의 이야기를 뒤따라가게 된다. 중간쯤 발람이 "앞으로 자기 이야기가 더욱 어두워질 것"이라 경고해도 멈출 수 없다.



발람은 인도가 "빛의 인도"와 "어둠의 인도"로 나뉘어 있다고 말한다. 그 어둠의 인도 한가운데, 인도의 가장 찬란한 발명품인 "닭장"이 있다고. 눈앞에서 도살되는 다른 닭을 보면서도 닭장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못하는, "하인" 계급 카스트의 하층민들을 일컫는 것이다. 발람의 표현대로라면 배부른 자와 굶주려 허리를 움켜쥔 자 중 후자. 이들은 도망칠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저 더 잘 기능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개인의 일탈이 가족 몰살로 이어질 수도 있어 조심스러운 것도 있겠지만, 그 이전에 대대로 굴러내려 오며 눈덩이처럼 커져버린 업(業)의 수레바퀴가 이들을 짓누르고 있다. 카스트에 충직하다는 건 그런 것이다. 내 역할을 어떻게든 다해야 한다. 반대로 내 역할만 다한다면 그밖에 자잘한 잘못이 있어도 죄과가 아니다. 만약 장사꾼의 업이 이득을 보는 것이라면, 그 과정에서 저울을 속이는 것은 문제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충직한 하인들의 입말에서는 비릿한 냄새가 난다.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는 그토록 미워하는 지주에게 "아버지 같은 분"이시라고 말하는 발람의 표정에도 그 비릿함이 묻어 있다.


자유민주주의에 익숙해진 아쇽 부부에게는 그 비릿함이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불편한 감정만으로 거대한 카스트의 수레바퀴를 걷어내기엔, 마찬가지로 그 수레바퀴 아래 있는 이들에게도 역부족이다. 가족의 굴레는 발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쇽 부부의 대처방식은 더욱 나약하다. 아쇽은 싫다고 하면서도 아버지와 형 말대로 정치권에 뇌물을 성실하게 전달한다. 핑키는 발람에게 "열쇠를 찾아 헤맸겠지만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라고 말하는데, 그야말로 미국에서 살아온 사람이니까 할 수 있는 말이다. 과연 발람의 닭장 문이 활짝 열려 있었을까?



영화 초입에서부터 보여주었듯 발람은 번듯한 사업가가 되었으니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긴 했다. 발람은 자신이 닭장을 탈출했다고 믿지만, 정말 그럴까?


발람이 겪은 모종의 사건들을 척척 엮어 보여주는 동안, 자연스럽게 인도 사회의 사다리가 눈앞에 드러난다. 마지막 시퀀스에서는 소름마저 오소소 돋는다. 발람이 닭장이라 믿은 공간은 실은 사다리의 한 층이었다. 사람과 사람과 사람을 수직으로 겹겹이 포개어 쌓아 낸 지옥도. 사다리 위층도 여전히 사다리 위다. 여느 성공 신화와 달리, 올라간 자리 또한 지옥이라는 것. 그렇게 이 영화는 끝까지 절망에 녹슨 채로 강렬하게 문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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