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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Apr 11. 2021

사다리 안쪽에서

넷플릭스 <힐빌리의 노래> (2020, 론 하워드 감독)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빛을 품게 되는 단어들이 있다. 의미가 크게 변하지 않아도 사회 흐름 속에서 그 농도나 채도 어딘가가 달라지는 것이다. '자수성가'도 그렇다. 70년대와 지금의 느낌이 많이 달라져 있고, 앞으로도 더 달라질 단어가 아닐까 싶다. '자自'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조차 점차 불분명해지고 있다.


<화이트 타이거>의 발람을 보며 함께 떠오른 인물은 <힐빌리의 노래> 주인공 JD였다. 동명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인데, 소설 <힐빌리의 노래>는 개인의 지극히 자전적인 소설임에도 트럼프 시대를 이해하는 실마리가 되어준다고 언론의 주목을 받던 책이다. 그 이유를 찾아 JD의 회고를 따라가 본다.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하고 인턴 면접을 앞둔 시점, JD는 갑작스럽게 누나 린지의 전화를 받는다. 중요한 면접을 앞두고 있다고 항변해 보아도 어쩔 수 없어, 그는 먼 길을 달려 다시 고향으로 향한다. 영화는 그의 여정을 따라 과거와 현재를 번갈아 비추어 보이며 가족 전체를 훑어내린다. 정장을 차려입고 고고하게 앉아있는 변호사 무리가 대놓고 무시하는, 켄터키 지역 노동자 계층이 그의 뿌리다.


다소 거친 이웃들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고성 오가는 싸움을 벌이는 이웃들. 그래도 영구차 앞에서 모자를 벗어 예를 갖추고, 문제가 있으면 인맥을 동원해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다. 힘내라고 다정한 말을 건네지는 않지만,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도움을 툭 건네거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평범한 이웃들이다. 단지 사회의 어떤 시스템에 훌륭하게 안착하지 못했을 뿐이다. JD의 엄마 베브도 예외는 아니어서 민들레 홀씨처럼 붕붕 떠다니며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생활한다. 아들에게 자기 실수를 미안하다 인정하며 찡긋 웃는 모습은 분명 사랑스럽지만, 아이들보다 훨씬 불안정한 상태다.


오늘의 JD는 분명 이들과 다른 곳에 서 있다. 세상이 말하는 "좋은" 일에 더없이 다가서서, 고상하고 가진 것 많은 사람들과 자신의 뿌리 사이에 중간자 같은 자리에 서 있다. 소위 개천에서 난 용이지만 실은 불안한 자리다. 앞으로 만나게 될 사람들 옆의 자신이 황새 옆의 뱁새처럼 느껴지는 자리. 거기서 미끄러질까 불안한 자리. 자신이 뿌리 내리고 살아온 토양이 남들 눈엔 약점으로 비칠 거라는 사실을 깨달아버린 당혹스러운 자리.


거기서 선택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다. 자기 뿌리를 끊어낼 수도 없고 답습할 수도 없는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만큼의 성장을 다하는 것. 어떤 출발점에서든 한 번에 한 발짝씩만 멀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나아가는 것. 김애란의 단편에 밑줄을 그으며 생각한 적 있다. 그런 작은 한 걸음들이 이어져 우리를 다른 곳으로 데려간다는 걸.


아무리 바빠도 음식을 플라스틱 용기가 아닌 접시에 담으려고 노력하는 건 내가 부모 세대와 반 발작 다르게 사는 법이다. 말은 반보라지만 실은 결정적으로 다르게 사는 방식. (...) 평소 재이에게도 음료를 병째 마시지 말고 컵에 따라 먹으라고 잔소리한다. 그렇게 작은 것들이 나중에 큰 걸 지켜주기도 한다고.
_<가리는 손>, 김애란.


가끔 개천에서 나는 용의 소식들이 어디선가 들려오지만, 더러 누구에겐가 잭팟이 터졌다는 이야기가 들려오지만, 그 또한 실은 모든 한 걸음의 총합이리라는 것을. 하물며 이무기도 아니고 카지노에 앉아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보통 날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한 발짝 두 발짝은 대단한 진전이라는 것을.



JD와 린지 또한 그렇게 한 발짝씩 엄마의 자리에서 걸어나왔다. 베브의 전철을 밟지는 않은 건 분명 그들의 노력이었다. 베브는 자신이 누리지 못한 것, 받지 못한 것들에 대한 회한을 쏟아내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썼다. 그 회한도 부모 세대에게서 온 것이지만. 린지는 그런 엄마에게 품었던 모든 회환까지 끌어안으며 자기 삶을 받아들인다. JD도 마찬가지다. 끝내 가족을 놓치지 않으면서 가족의 회한에서는 한 발짝 멀어진다. 그 뒤에는 할머니의 존재가 있었다.



할머니는 어린 시절부터 그를 강단 있게 가르친다. 먼저 싸우지 말되, 누군가 싸움을 걸어오면 꼭 그 싸움을 끝내라고. 어떻게든 가족이 도와줄 거라고 안정감을 전해주는 동시에, JD가 이 자리에 만족하고 멈추지도 않게 만든다. 계속 공부하고 노력하게 손주를 독려하고, 삐뚤어질 틈을 주지 않는다. 힘든 상황에서도 기준을 잃지 않게 가르치면서 동시에 엄마와의 끈이 끊어지지도 않게 하는 존재다.


할머니는 노력해도 안되는 일 투성이인 세상에서 노력이라도 해야 한다고 JD를 호되게 가르친다. 그런 할머니의 가르침 덕분에 JD는 '한 발짝'의 차이를 가질 수 있었다. 등딱지에 상처 입은 거북을 보고 떼어버리자는 친구와 달리, 곧 나을 거라고 제대로 된 곳에 놓아주는 마음을. 힐빌리의 남성들에게서 흘러내리는 폭력이 불량한 십대들에게서도 터쳐 나올 때 그들과 끝까지 함께하지 않는 선택을. 훗날 성인이 된 JD가 아이들과 여자의 목소리 앞에서 감정 분출을 멈추었을 때, 실은 문 뒤에 숨어있던 더 큰 폭력도 함께 멈춘 것처럼. 아주 작은 것에서 작은 것으로, 그렇게 변해가고 나아지는 것이다.


때문에 이 영화는 입지전을 이뤄낸 인물의 '감동 실화'로 많이 평가받는다. 노력의 힘을 가르치는 할머니와 그 말을 따른 끝에 성공한 손주라는, 그럭저럭 좋은 그림을 만들어냈으니까.


자기 자신이 싫어지고, 다 남 탓을 하고 싶어지고, 그래도 조금씩 계속 성장하기를 선택하는 것. 물론 중요하다. 옛날 같으면 모두에게 '감동 실화'였을 이런 이야기는 이제 반쪽이 되었다. 누군가에게 이는 공허한 울림이 되어 버렸다.



이 영화에는 노력의 뿌듯한 성과 못지않게, 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면들이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지 깨닫게 하는 면면이 담겨 있다. 이는 불평등과 역차별을 외치는 백인 남성들에게는 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없는, 이를테면 <화이트 타이거>의 발람 같은 이들에게는 언감생심 꿈도 못 꿔볼 것들이다.


JD가 사는 세계에는 아동보호에 민감한 시스템이 있다. 도움을 요청하며 이웃집에 뛰어들어가면 상대가 아이의 부모라 해도 곧장 신고를 하고, 경찰이 금방 온다. "너에겐 일상일지 몰라도 이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해주는 어른이 사회에 있다. 물론 그런 어른들조차 닿을 수 없는 세계가 가족이지만, 최소선의 유무는 누군가의 생명을 가르기도 한다.


상대적으로 어렵기는 해도 JD가 노력으로 뭔가 바꿔볼 여지가 있었다는 점, 노력이 성과로 이어질 거란 믿음이 어느 정도 존재한다는 것 또한 큰 차이다. 노력과 성과에 일정한 비례 관계가 있다고 믿는 사회에서 JD의 할머니는 무료 음식 지원을 받을 수 있고, 그 모습을 보며 JD는 더욱 열심히 공부하고 일을 돕는다. 지원이라곤 없는 나라, 노력의 의미가 내팽개쳐지기 십상인 나라에서라면 다른 모습을 보였을지 모른다. 발람의 할머니가 발람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절로 떠올리게 된다.


노력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JD과 린지가 한 발짝씩 나아간 것도 결국은 그들의 노력이었다. 용서하겠다는, 나아가겠다는 노력. 그러나 노력이란 단어의 빛이 점차 바래가는 느낌을 부정할 수 없다. JD는 분명 선량한 인물이고 <힐빌리의 노래>는 그만하면 제법 아름다운 이야기지만, <힐빌리의 노래>를 위시하는 자들에게서 느껴지는 불편함은 그 때문이다. 특권의 존재를 감춘 채 노력만 언급하는 자들의 방패막이로 휘둘렀다는 점.



세상에서 더 이상 정공법은 성공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느낌이 가끔 불안과 함께 불쑥불쑥 올라온다. 불로소득이 노동소득을 이긴 지 오래되었으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층이 생겨 서로 볼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극도의 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제각각의 이유로 불행해져 버렸고, 어딘가 뒤틀려 있고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뿐이다.


"아니, 우리는 누군가를 따라잡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항상 앞으로 나아가는 것. 밤이나 낮이나, 동료 인간들과 함께, 모든 인간들과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그 행렬이 앞뒤로 너무 길어지면 안된다. 그렇게 되면 뒤에 선 사람들이 앞에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 더 이상 서로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점점 더 드물게 만나고, 점점 더 드물게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위의 구절을 외웠던 기억이 난다. 두리토에게 누구의 말이냐고 물었더니, 아마 파농인 것 같다고 했다.

_<A가 X에게>, 존 버거.



그러나 이 또한 오늘날의 인류에게 떨어진 과제일 뿐이다. 우리는 화평과 고통을, 미와 추를 함께 물려받는다. 힐빌리뿐 아니라, 화이트 타이거뿐 아니라 우리 모두. 누군가에겐 기회가 적게 열려 있고, 누군가에겐 그나마도 차단되어 있는 이 세상을 우리는 계속 인지하고 고민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끌어안으면서. 바톤 터치를 하면서. 눈 부릅뜨고 반 발짝씩 어제의 우리와 멀어지면서. 좁은 문을 열어가면서. 다음 사람을 위해 그 문을 잡아주면서. 서로를 위해 기꺼이 밤을 새우는 이들과 이야기하면서. 마음 아파하면서. 포기하지도 않되 누군가를 경멸하지도 않으려고 애쓰면서.


그렇게 서로 만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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