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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Jun 27. 2021

모든 아이들은 자란다

영화: 웬디(2020, 벤 제틀린 감독)


 “모든 아이들은 자란다. 단 한 사람만 빼고.” 소설 <피터 팬>의 유명한 첫 문장이다. 영원히 자라지 않는 소년 피터 팬은 탄생 1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풋사과 같은 동심의 표상으로 사랑받고 있다.


 아무도 어른이 되지 않는 환상의 나라 네버랜드, 그곳을 인도하는 악동 피터 팬의 이미지는 다양하게 각색되고 변주되어 왔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뮤지컬, 온갖 노래 가사에까지 녹아들었음은 물론이고, 기존의 해석을 뒤집는 시도도 이어졌다. 피터 팬의 대칭적 인물인 후크 선장을 통해 피터 팬을 이해해 보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리고 이제 6월 30일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는 영화 <웬디>는 웬디의 입장에서 네버랜드와 피터 팬의 세계를 펼쳐낸다.


 이야기의 중심에 웬디를 두는 순간 우리는 피터 팬과 네버랜드의 매력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던 사실들을 마주하게 된다. 110년의 세월 동안 인류가 이뤄온 진보의 시선까지 감안하면, 피터 팬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재구성하는 것이 과연 매력적인 결과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의심스러워진다. 그래서인지 벤 제틀린 감독은 이야기의 뼈대만 남겨놓고 완전히 해체해,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가장 태고적인 그림들로 피터 팬의 세계를 재조립했다.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초청받아 시사회에 참석하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국내 개봉일은 6월 30일입니다. (문화가 있는 날!)



 소설 <피터 > 읽다 보면 어쩐지 도망치고 싶어 진다. 정확히는 웬디에게 피터 팬을 떠나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 진다. 피터 팬은 웬디를 엄마 역할로 데려왔고, 웬디는 엄마라는 단어와 거의 동의어처럼 묶인다. 그러나 동시에 피터 팬과 웬디 사이에는 서로를 독점하고 싶어 하는 애정도 엿보인다. 그래서 <피터 >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같은 측면이 엿보인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웬디뿐 아니라 팅커 , 타이거 릴리까지, 피터 팬을 사랑하고 서로를 질투하며 맴도는 위치에만 놓여 있다. 피터 팬에게는 아주 안전한 거리다. 피터 팬은 상대가 원하는 마음을 주는 단계로는 나아가지 않고, 유아처럼 그저 애정을 배부르게 받아먹고만 싶어 한다.


 네버랜드에서는 누구도 자라지 않는다는 말만큼은 명확히 지켜지고 있어서, 후크 선장조차도 어린아이 같다. '엄마'가 있는 소년들을 부러워하고, 가장 암울한 순간에 스스로를 3인칭으로 칭하는 것 또한 피터 팬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가 악행을 행하는 방식은 기묘하게 모범생 아이 같은데, 사립학교 시절 배운 올바른 품행을 기준 삼아 그 역방향으로 달려가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사망하는 순간까지 피터 팬의 품행을 지켜보고 있는 후크는 대칭을 이루는 또 하나의 피터 팬이자, 피터 팬에게 집착하는 또 하나의 인물이다.


 다시 말해 모든 캐릭터가 피터 팬만을 맹목적으로 향하고 있다. 물론 주인공을 중심으로 서사가 굴러가는 것이 당연하기는 하지만, <피터 팬>에서는 유독 모든 인물들이 피터 팬의 부수적인 존재로만 기능하는 느낌이다. 특히 웬디는 받아주고 챙겨주며 양육하는 모성의 이미지만을 끊임없이 요구받는다. 피터 팬과 소년들만의 요구가 아니다. 원작 소설에서는 후크 선장과 해적 일당조차 피터 팬 무리를 무찌르고 웬디를 데려와 엄마로 삼고 싶어 한다.



 영화 <웬디>는 웬디라는 캐릭터에서 우선 엄마의 이미지를 걷어내어, 웬디가 제 발로 설 수 있게 한다. 그 결과 이야기는 웬디가 아주 아기였을 때부터 시작한다. 기찻길 옆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엄마의 품에 안겨 달걀도 같이 깨고 손님맞이도 하면서 자라는 아주 작은 아이. 디즈니 삽화에서 보던, 허리 선을 강조한 드레스나 머리 리본 같은 건 없다. 이 영화 속 웬디는 맑은 색 귀걸이 정도를 제외하면 장식이라곤 하나 걸치지 않은, 잠옷에 가까운 티셔츠 차림이다. 원작에서보다 훨씬 공상적이고, 자기 세상이 뚜렷한 아이가 되어 있다.


 웬디에게서 끊어진 단어, 피터 팬과 소년들이 집착하던 ‘엄마’, ‘모성’은 이제 대자연으로 갈음된다. 대자연도 한없이 부드럽고 품어 주기만 하는 공간으로만 묘사되지는 않는다. 아이들은 화산을 터뜨리고 물에 뛰어들며 자연의 품에서 마음껏 뛰어놀기도 하지만, 화산 폭발이나 거친 파도를 피해 뛰기도 한다. 게다가 네버랜드의 대자연에도 쓰레기는 쌓여 있다.



 팅커 벨과 타이거 릴리는 아예 극에서 사라졌다. 피터 팬을 사랑하고 허영심을 부리면서 웬디를 질투해 이야기에 곤경을 더하곤 했던 팅커 벨은 등장하지 않는다. 아메리칸 원주민 전사 캐릭터인 타이거 릴리는 훌륭한 전사라고 묘사되면서도 부여된 역할은 고작 피터 팬 손에 목숨을 구하는 것, 그 후로 피터 팬의 대사 속에서 ‘엄마가 아닌, 의미 있는 누군가’가 되고 싶어 한다고 언급되어 팅커 벨과 웬디의 질투심을 자극하는 것이 전부였다. 피터 팬을 돋보이기 위한 장식적인 기능만 수행하던 캐릭터들은 과감히 잘라냈다.


 뿐만 아니라 네버랜드 한켠에 사는 아메리칸 원주민과 인어들 모두 사라졌다. 후크 선장과 해적들도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등장시켜 이야기를 전개해 간다. 원작 소설에서는 110년 전이라는 시대의 한계 때문에 원주민과 해적을 설명할 때나 소년들이 영국 이야기를 할 때 기묘하게 제국주의적 냄새가 풍기는데, 이를 걷어낸 것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피터 팬을 비롯한 몇몇 소년들을 유색인종 캐릭터로 만들었다.



 다 뜯어진 신발에 낡은 재킷을 걸친 채로 기차 위에 앉아, 어둠 속에서 눈을 희번덕거리며 웃는 피터 팬의 존재는 단연 새롭다. 풀잎 같은 초록색 옷을 입고 소꿉놀이 같은 생활을 하던 피터 팬의 이미지를 기억하고 좋아했던 사람들에게 다소 충격적인 비주얼이다. 공통점을 찾자면 진주 같은 젖니가 빛나고 있다는 정도.


 이렇게 걷어낼 것을 모두 걷어내고 완전히 새롭게 지어 올린 <웬디> 속 네버랜드와 웬디, 피터 팬은 원작에 비해 다소 야생적인 색깔을 띤다. 네버랜드뿐만이 아니다. 켄싱턴 공원과 반듯하게 정리된 침실 대신 지나가는 기차에 덜컹거릴 만큼 위험해 보이는 웬디의 집, 빛나는 요정 가루 대신 금방이라도 쇳내가 날 것 같은 화물 열차와 바닥에 구멍이 난 조각배로 이동하는 피터 팬은 분명 우리가 알던 피터 팬의 세계에 비해 거칠다.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지만, 성장이라는 주제만 놓고 본다면 원작보다 조준점이 명확하다.





 모든 성장은 반드시 상실을 동반한다. 어린 날 공상으로 지어 올린 세계가 처참히 부서지는 것을 목격하면서, 때론 그조차 잊어가면서 아이는 어른이 된다. <피터 팬> 원작은 이를 격렬히 거부한다. 사실 성장을 거부한다기보다 책임과 의무를 거절하고 싶어하는 마음에 가깝다. 소년들이 웬디의 집에 하나씩 안착해 학교에 다니고, 나는 법을 잊고, 직업을 갖는 동안 피터는 줄곧 아이로 남아 있다. 그리고 웬디의 딸을, 또 그 딸을, 계속해서 네버랜드로 데려간다.


 원작의 웬디는 가볍게 날아가는 딸과 피터 팬의 뒷모습을 보며 씁쓸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나이 들었다는 당연한 사실에조차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반면 팅커 벨이 죽었다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해 웬디를 경악하게 했던 피터 팬은, 결국 아무 감정에도 책임지지 않으면서 ‘엄마’를 이용한다. 봄맞이 대청소 때마다 웬디가 네버랜드를 방문하겠다는 약속은, 그렇게 무책임하게 승계된다. 결말까지 철저하게 피터 팬만을 위한 방향성이다.


 원작과 달리 영화 <웬디>는 성장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보인다. 영화 속 웬디는 피터 팬뿐 아니라 모든 캐릭터들의 성장을 주도해 낸다. 대자연 ‘엄마’의 힘을 이끌어 내고, 추억을 뒤져 기쁨을 끄집어내고,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성장이라는 모험을 긍정하면서. 웬디와 피터 팬은 원작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결말을 맞는다.



 영화 <웬디> 속 피터 팬과 네버랜드는 안전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지만, 기묘한 위계가 역할을 부여하는 원작과 다르다. 모험으로 가득 차 있을지언정 끝내 잘 될 거라는 막연한 안정감이 있던 디즈니 버전과도 다르다. 불안정하지만 변화에 열려 있고, 그래서 현실적이고 현대적이다.


  이러한 세계에서라면 우리는 영화 속 웬디와 아이들처럼 자기 세계를 공고히 하고, 그 위에 찾아오는 도전을 받아들이며,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것을 성장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한때 아이였던 우리도 여전히 한 뼘씩 마음의 키를 키우며 이 세상을 건너고 있다. 영화는 그런 우리를 직면하고 긍정한다. 그렇게 모든 아이들은 자란다. 단 한 아이도 빠짐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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