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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Sep 23. 2015

내가 사랑하는 곳

이곳에서 다시 시작

  길고 길었던 여름이 끝났다. 비가 와야 하는 우기까지 삼키며 버티고 앉은 지독한 여름이었다.


  그리고 내게는 인도에서 살기로 한 2년 중 1년이 끝났다.


  바람이 바뀌고 있었다. 바깥 공기도, 내 안에서도.



  2014년 8월 31일 1AM. 우여곡절 끝에 끊은 비행기 티켓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어릴 때부터 숫자 오류를 많이 내곤 하던 나는 어쩐지 시간이 헷갈려 나도 모르게 31일 밤에 출발할 생각을 자연스레 하고 있었다. 31일 새벽 1시 비행기면 출발은 30일 밤에 해야 한다는 걸 깨달은 건 ‘출발했니?’라는 연락을 받고서였다.


  왜 지금 출발해야 하지, 하다가 화드득 깨닫고 뭐라 인사를 나눌 틈도 없이 공항으로 내달렸다. 그토록 기다렸던 안식의 태국 행은 시작부터 정신 없었다. 여권을 두고 갔던 지난 번을 떠올리며 짐을 며칠 전부터 미리 싸뒀던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NGO에서 주관하는 구호개발 세미나에 참여하느라 무려 1달 동안이나 태국에 가게 되었다. 많이 지쳐 있었기 때문에 기대가 컸다. 산 속에 있는 리조트에 틀어박혀 지낼 수 있다는 점, 여기엔 없는 다양한 음식을 많이 먹고 올 수 있다는 점, 어깨 한 번 펼 정신도 없이 살다가 태국 마사지를 받을 수 있다는 점- 다 좋았지만 무엇보다도 내 안의 딜레마를 해결하고 싶었다. 지난 1년 간 다양한 일을 보고 듣고 겪으면서 내 마음에 불편한 마음 하나가 돋아났고, 그 마음이 계속 자라면서 점점 더 불편해지고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도 실제로 와서 살면서도 자꾸만 드는 생각이 있었다. 이 의견이 온전하지는 않겠지만, 이 거대한 불의(不義)는 단순히 한 사람의 가난, 한 사람의 게으름, 한 사람의 무지가 아니라 구조적 폭력이라는 생각이 갈수록 짙게 드는 거였다.


  가난도 문제고 질병도 문제지만 거기서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는 굴레가 씌워져 있다는 느낌이었다. 단순히 신분 상승을 할 수 없다, 부자가 될 수 없다, 이 정도의 굴레가 아니라 먹고 살 수 없다, 생존할 수 없다는 굴레라면 너무 심하다. 한 명의 개인, 한 곳의 공동체로서는 뒤집을 수 없는 이 거대한 불의 앞에서 나는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한들 의미가 있을까? 이렇게 말하는 나 자신도 의로운 사람이 아니어, 언제든지 그 앞에서 눈을 질끈 감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기에 더욱 괴로웠다. 마치 내 어떤 행동도 의미가 없는 것처럼, 입을 열어 어떤 말을 할 자격도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열심히 해온 일들이 다 의미가 없는 것만 같아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질문은 날로 매섭게 이어졌지만 답은 찾아지지 않았다. 평생을 찾아도 찾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나는 당장 오늘을 살아야 하는데 눈앞의 일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아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길어지니까 갈수록 힘이 빠져갔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처음의 마음도 거대한 불의의 역설 앞에서 위축되어 가고 있었다. 괴로움과 어려움, 복잡한 심경들이 뒤얽혀 더께더께 얹혔다.


  그래서 복잡한 마음을 안고 있을 무렵 들려온 세미나 소식에 정신 없이 달려간 거였다. NGO의 마음가짐과 실무까지 모두 다루는 세미나라니, 거기서라면 이 마음이 정돈되고 해소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태국에서의 시간은- 황홀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얼굴들이 좋았고, 다양한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분들을 만나 그 분들이 해주시는 한 마디 한 마디에서 배울 점이 많은 것도 좋았다. 새로운 도전을 던져 준 힘 있는 강의들, 즐겁게 읽은 한국어 책과 숙제들, 구호 개발 관련 가치와 그 실무에 대해 고민하게 된 귀한 시간들, 안정되게 흘러가는 하루하루와 그 일기, 주말마다 놀러 나가서 오랜만에 먹은 반가운 음식들, 1년 만에 온수에 몸을 담글 수 있었던 온천, 기분 전환을 한답시고 귀를 하나 더 뚫으면서 두근거렸던 마음... 하나하나 손 꼽기 모자랄 만큼 좋은 시간들이었다.


모처럼 마음의 날씨가 갠 날, 창밖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태국 제2의 도시 치앙마이, 북부 산간의 시원한 휴양지고 온천으로도 유명하다. 내겐 그 이상의 의미로 기억되겠지만.
어딜 가든 잊지 않고 챙기는 한 가지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담아 보낼 엽서. 향토적인 풍경을 예쁜 필치로 담은 그림 엽서가 많아서 무척 두근거렸다.

  그러나 가장 좋았던 건 더께더께 얹혀있던 고민들이 마치 비 맞은 거품처럼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진 것이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이 무거운 질문은 평생의 화두로 나를 몰아칠 것만 같았는데- 잘 쉬고 잘 공부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는 사이 질문의 해답은 무겁지 않게 내 안에 이미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돌아오기 전 마지막 정리 시간, 마이크를 잡고 앞에 선 간사님의 입에서 나온 아주 명쾌한 문장으로 내 앞에 떨어졌다.


  누구도 모든 걸 다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누구든 무언가 하나는 할 수 있다.

 그러니 나는 내 앞의 땅 한 평이 온 세계인 것처럼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한 번 안개가 걷히자 왜 여태까지 헤맸나 싶을 만큼 명확해졌다. 걷힌 안개가 사실 불안감이고 내 자만이라는 걸 알았다. 완벽할 수 없는 사람의 완벽주의라고나 할까?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일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고민은 멈출 수 없는 게 맞다. 그러나 삶을 멈춰놓고 고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부분은 살면서 경험으로 배워야만 진척되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삶은 이렇다 저렇다는 명제로만 정리되기엔 어려운 문제고, 구조는 더욱 그렇다. 그 모든 구조의 어려움을 보고 괴로워하여도 나는 눈 앞 한 평 땅을 경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한 명의 인간이다. 그 괴로움 없이 일하는 것도 아니고, 일하지 않고 괴로워만 하는 것도 아니다.


  이 결론은 신선하거나 충격적인 이야기가 아니었다. 과연 이걸 내가 몰랐을까? 알았지만 뭔가 슈퍼히어로 같은 답을 찾고 싶었던 게 아닐까? 괴로워하고 싶지 않고, 깔려 죽고 싶지 않고, 무진 애를 써도 성과가 없는 싸움은 별로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불의하다’는 사실이 그렇게 괴로웠던 것이다. 마치 윤동주의 ‘서시’ 안으로 들어온 기분이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면서, 잎새에 이는 작은 바람에도 괴로워하면서,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는 삶.


  태국에서의 한 달, 새롭고 신선한 결론이 날 줄 알았던 그 시간은 결국 항상 내 옆에 있었던 ‘서시’로 갈무리되었다.



  세미나를 마치고 돌아온 인도는 그새 태국 기준으로 눈이 높아진 내게 다시 덥고 척박해 보였다. 태국 다녀오는 사이 우기도 오고 날씨도 좀 풀리겠지 기대했는데 웬걸, 우기는 오지 않고 날씨는 여전히 더웠다. 마치 1년 전 인도에 처음 왔던 그 때 같은 기분이었다.


  새벽에 돌아와 쪽잠을 자고 바삐 아침을 맞았을 때, 문 밖에서 진치고 앉은 아이들의 목소리도 여전했다. 문을 열고 나가보니 반겨주는 아이들, 벽에 각 잡힌 그림 하나 붙여놓고 정작 본인은 쑥스러워 숨은 아이, 달력에 ‘써니 디디 돌아와줘서 고마워요’라고 (그와중에 철자는 틀린) 문장을 삐뚤삐뚤 써 놓아 뭉클하게 만드는 것까지. 작년 같기도 하고, 작년보다 한 발짝 더 나간 것 같기도 한 기분이었다.


소중하게 갈무리해 둔 그림. 이런 작은 사랑 표현 하나하나가 꽃으로 우거져 마음에 내렸다. 덕분에 나는 내 심정과 상관 없이 매일 꽃길을 걸었다.

  그간 배운 것도 있고 하니 정말 잘 해봐야지. 10월 15일이 되면 인도에 온 지 1년이다. 시간의 흐름을 마음 속으로 다져보면서 또 다시 결의를 다져야지, 케이크라도 하나 살까, 신나게 생각했건만...


  현실은 그냥 현실이었다. 오자마자 10월 한 달은 정신 없이 굴러갔다. 다사라 축제로 휴일 2주일, 아이들 시험 기간 1주일, 다시 또 디왈리 축제로 휴일 3일… 앞에서 아이들과 뒤엉켜 지내다 보니 어느새 11월이었다.


  기대한 것처럼 멋지지도 야무지지도 않지만, 아무튼 이곳에서 다시 시작했다. 처음의 마음을 다시 붙들고,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 혼자 해결할 수 없다는 것과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살 것을 인식하고 또 결심하면서. 어느새 내가 사랑하는 제2의 집이 되어버린 이 곳에서. 공기가 변하고 있었다. 나도 변하고 있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나지 않는다는 느낌으로 무겁게 내려앉았던 나의 거리. 끝날 때까지 끝내지 않겠다, 는 각오로 되새겼다.


  아이들과 복닥거리는 시간은 피곤해도 재미있다. 학교에서 다녀온 아이들을 맞아주고 도시락을 닦고 야채를 다듬고 간식과 식사를 챙겨주고 공부와 숙제를 도와주는 일상은 정말 소중하다. 그러나 그 소중함에 묻혀 살 수 있는 복이 내겐 없었다.


  그 소중함에 매몰되지 않 비록 몸은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더라도 마음은 두 곳 혹은 서너 곳을 동시에 바라보아야 하는, 다른 복이 내겐 있었다. 해서 부러 더 고개를 들었다. 눈 앞의 상황보다 많은 것을 생각해야 하는 날들이 늘어 갔다.


  정확하게 1년을 넘어서면서 이 다음에 어떤 행사가 있고, 다음 달에는 무슨 일이 있고, 하는 가닥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내 시선도 조금 달라졌다. 그 동안도 부단히 달라져 왔을 것이고 앞으로도 달라져 가겠지만, 한 시기를 넘어서는 것의 차이가 분명히 있는 것 같다.


  새로운 시작이라는 느낌과 함께 마음을 다시 다지게 된다. 계속 고민하고 궁금해한 답은 하나의 말로 잡히지 않지만 그래도 꾸준히 걸어가기로, 애초에 잘 해서 뽑혀 온 것도 아니고 내 능력이나 의지 밖에서 굴러들어온 복으로 온 것임을 기억하기로 마음을 다졌다.


태국에서 지내면서 책장에서 날아와 마음에 박힌 말이 있었다.


사랑이 바라는 것을 정의가 요구한다.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춘다.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본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고민하는 내용의 실상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세상에 펼쳐질 수 없는 장면이기에 더 고민했던 것 같지만, 세상에 완결될 수 없는 일이라해도 이것을 위해 애쓰지 않으면 누군가는 골방에서 홀로 억울한 울음을 삼켜야 할 것이고, 누군가는 여름 한 가운데서 차가운 눈을 맞으며 붕괴되고 말 것이다. (이 '누군가'들의 이야기는 이 다음 글에 이어진다.) 


  목표는 완결이 아니다. 그건 내 권한과 능력 밖의 일이고, 나는 그저 내 눈 앞 한 평의 작은 땅에서 쓰러져 가는 사람들을 보는 것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한 평 텃밭이 봄빛으로 따뜻하게 물들기를 소망하면서, 그렇게 꿈 꾸면서.


  이상하다, 끝나는 건 없는 것 같은데 매번 새로운 시작을 하고 있다. 또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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