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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Sep 23. 2015

그러나 여전히 이어지는

내가 만난 사람, P의 이야기

  어느덧 홈스쿨링 반대론자가 되어버린 내게, 아이들과 씨름하다가 하루씩 밖에 나가 HIV/AIDS 가정을 방문하는 시간은 여러 의미로 소중했다. 그 자체로 의미있기도 하지만 내 시선이 일상에 매몰되지 않게 불어오는 신선한 바람 같은 시간이기도 했다.


  HIV/AIDS 가정이라고 해도 결국 사람 사는 일이어서, 희로애락을 다양하게 나누다 보면 심각한 날보다는 평범한 날이 더 많았다. 평범하게 안부를 묻고 이야기를 듣는 일은, 때로는 그냥 이웃집 마실 같은 일이었다. 사실 이웃집 마실이 맞기도 하다만.


어느 '이웃집 마실'의 한 순간. 오늘 할 이야기와는 별 상관이 없지만, 오늘 할 이야기는 어떤 사진도 없기 때문에 편의상 첨부한다.

  그런 여느 날 같아 보였던 하루. 오랜만에 P를 찾아가 그 환한 미소를 마주할 생각에 기뻤던 나는, P가 억울한 마음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울컥울컥 올라오는 눈물을 참아야 했다.



  P의 집에 가면 항상 P에 대한 안쓰러움이 물씬 올라오곤 한다. P는 항상 밝은 얼굴로 우리를 맞아 주지만 그 집은 그 미소와 어울리지 않는 침침한 모습이다. 먼지와 때에 절어 원래 색을 잃은 지 오래인 침대보, 퀴퀴한 냄새, 가스레인지 위에 싸하게 얹혀 있는 P 혼자만의 점심, 한 사람이 앉아있기도 옹색한 방. 불을 켜도 언제나 어두운 그 구석 쪽방에 P와 아내, 두 아이까지 네 가족이 살고 있다. 그러나 나는 P의 집을 여러 번 방문한 여태까지 P밖에 만나본 적이 없다.


  P는 이 집 유일한 HIV 보균자인데 몸이 상당히 좋지 않다. 몸이 너무나 약해져 있어 웬만한 일은 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특히 서서히 마비되고 있는 한쪽 다리를 절뚝거려 걸어다니는 것조차 쉽지 않다.


  아내는 그런 남편을 대신해 가계를 꾸려가고 있다. 두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서 잡다한 일을 돕는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는데, 직원이라 해도 사실 온갖 일 다 시키며 잡역부 취급이었다. 함께 일하는 현지인 스태프의 말에 의하면, 아내는 스태프를 만날 때마다 눈물 바람을 짓는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었다. 기댈 곳 없는 가정에서 P는 P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미안함과 버거움에 얼마나 힘들어할지 다 보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그러나 우리를 볼 때마다 피어나듯 웃던 P가 그렇게 서럽게 우는 것을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린아이처럼 엉엉 우는 P의 얼굴이 어찌나 서럽던지, 보는 나까지 눈물겨웠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음에도 공기로 P의 설움을 느끼고 앉아 있는 한국인을 보며, 현지인 스태프도 침통한 얼굴로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두어 달 전쯤 P가 취직이 되었다고 했다. 아내가 일하고 아이들이 다니는 그 학교의 스쿨 버스 등하원 도우미 자리였다. 우리나라 유치원 선생님들이 으레 하듯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가방 내리는 것을 도와주는 일로, 다리가 좋지 않은 P도 할 수 있는 일이었고 그래서 뛸 듯이 기뻐했다고 했다.


  그러나 기쁨은 얼마 가지 않았다. 2주 내 이어진 다사라 축제 휴일이 끝나고 출근했을 때, P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해고였다. 버스 기사와 다른 도우미들이 항의를 했다고 했다. P가 학부모들과 언성을 높인다, 는 이유였다. 그러나 P가 언성을 높이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모두가 알았다. 당연히 핑계에 불과했다.


  사실 그 학교 버스 기사들과 도우미들은 서로 쉬쉬하며 스쿨 버스에 주유된 휘발유를 몰래 빼내 팔고 있었다. 함께하자는 제의를 P는 거절했고, 그 뒤로 따라온 건 모욕이었다. 다리가 유독 불편한 날 한쪽 주머니에 손을 넣어 허벅지를 있는 힘껏 붙들어야만 걸을 수 있는 P의 등 뒤로 폼 잡고 있다며 킥킥 비웃고 놀리는 소리가 이어졌고 P가 아무리 그만하라 부탁해도 허사였다. 교장은 고작 이런 작은 일에까지 조사를 해 볼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이렇게까지 된 것이었다.


  그동안 쌓였던 모든 마음- 가족에 대한 미안함, 후회, 죄책감, 마음과 몸을 붙든 아픔, 그리고 일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한 분하고 억울한 마음과 속상한 마음이 뒤엉켜 통곡으로 터져 나왔다.


  이 이야기가 그냥 나와 함께 사는 아이들 사이에서라면 아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아이들끼리야 하루에도 수십 번 찾아와서 ‘얘 때문에 열 받는다’, ‘얘가 나한테 뭐라고 했다’ 공시랑거리는 게 일상다반사니까.


  그런데 이게 아이들 일이 아니라는 게, 이미 다 커서 직업을 갖고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어른들이, 알 만큼 알 사람들이 이렇게 유치하고 치졸한 짓을 했다는 게 너무나 폭력적이었다. 아이들에게는 이러면 안 된다는 정확한 기준을 제시하고 이러면 왜 안 되는지 이유를 설명하고, 잘 되지 않으면 벌을 주어서라도 아이들을 훈육하면 된다. 그러나 이렇게 다 커 버린 어른들을 혼낼 수도 없고 뭘 어쩔 수 있을까?


  그저 P의 설움을 함께 삼키며 오래오래 그 아픈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P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그 이야기를 함께 아파하는 현지인 스태프를 보는데, 그 형제 같은 모습을 보며 나는 내심 아찔해졌다. 그마저 없었다면 이 어두컴컴한 방에서 P는 혼자 울지도 못하고 이 설움을 어떻게 토해냈을 것인가.


  P는 아주 오래오래 울었다. 우리도 오래오래 앉아 P의 눈물을, 말을, 그 공기를, P를 들었다. P의 입에서 나오는 문장은 먼저 터져 나오는 눈물 탓에 끝을 맺지 못하고 엿가락처럼 맥없이 늘어졌지만 그 모든 것 하나하나가 P의 언어였다. 우리는 한참 이야기를 듣고 돌아와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한참 괴로워했다. (P의 이야기는 나중에 더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며칠 사이 끔찍한 이야기를 또 듣게 될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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