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이정 Sep 23. 2015

갈매나무가 대신 눈을 맞는 밤

내가 만난 사람, J 부부 이야기


  침 삼키듯 원통한 눈물을 삼키며 P의 이야기를 듣고 온 그 날 괴로운 밤을 보냈다. 그러나 일주일도 되지 않아 끔찍한 이야기를 또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결연 업무에 매진하느라 클리닉에 한동안 가지 않다가, 새로 온 한국인 스태프에게 사업장 소개를 해주기 위해서 오랜만에 클리닉에 발걸음한 날이었다.


  새로운 스태프를 데리고 클리닉을 한 바퀴 돌면서 누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소개하고 인사를 나눴다. 새로 온 스태프의 전공이 바이러스였기에 연구실에도 들어가서 이런저런 설명을 듣고, HIV 테스트 키트로 양성 여부를 검사하는 것까지 본 날이었다. (결과는 음성이었다. 우리는 밝은 표정으로 실험실을 나왔다.)


  모처럼 간 거니까 원래 일하던 약국 일을 돕는답시고 앉았다가 알약을 4000개나 포장한 날이기도 했다. 그래도 한창 일 다닐 때에 비하면 한결 수월한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기 직전, 현지인 스태프와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그 이야기를 들었다. 즉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들은 이야기였다.


  내가 J 부부를 처음 방문한 건 1월에 한국에 있는 NGO에서 파견한 단기 봉사 팀이 왔을 때였다. 그들을 데리고 도시 외곽까지 오래 달려, 드문드문 있는 작은 폐가 같은 집에 갔던 기억이 난다.


  작다는 말도 황송한 집이었다.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한 시간 어둠과 싸울 것이라곤 꼬마전구 하나뿐이라 금세 어둑어둑해지던 방. 엷은 꽃잎 같은 미소를 띤 아주머니가 내 손을 잡고 한 얘기를 또 하고, 또 하고 했다. 아저씨는 여전히 천하를 호령할 기세의 말투였지만, ‘가족도 찾아오지 않는데 누가 이렇게 바나나와 계란을 사 들고 우릴 만나러 오겠냐. 너희가 우리 가족이다’라고 고마워하는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젊었을 때 아저씨는 잘 나가는 건축업자였다. 큼직한 힌두 사원을 몇 개나 지었다고 했다. 지은 사원의 수와 비례하게 재산도 늘어 갔고, 아저씨의 야망도 커졌다. 통이 컸던 아저씨는 정치판에 손을 뻗기 시작했다.


  애초에 권력욕으로 시작한 선거였으니 그 과정이 말끔하지 않았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금권 선거를 얼마나 동원했는지 선거에서 패하고 가세도 같이 기울었다. 그렇게 허무하리만큼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었을 때, 하필 그때 알게 되었다. 초청하지 않은 바이러스가 몸에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을.


  숙주에게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그 바이러스로 인해 아주머니의 뇌 어딘가가 손상을 입었다. 잘 나가던 귀부인은 하루아침에 철딱서니가 되었다. 딸은 부모를 떠났다. 화려했던 시절을 다 뒤로 한 부모는 그때쯤 이미 거지보다 조금 나은 정도의 행색이었다. 딸이 떠날 때 부모를 다시 보지 않겠다고 딱 잘라 말했다 한다.


  아마 딸에게 이야기를 듣는다면 그 이상의 사연이 실타래처럼 얽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용기 내어 부모를 보러 오다가도 동구 밖에서 서성이다 돌아가곤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그 이야기를 듣는 내 마음에도 저녁 무렵 그림자처럼 길게 슬픔이 드리웠다. 당사자에겐 얼마나 아픈 이야기일지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래도 부부는 잘 지내고 있는 듯 보였다. 일이 이렇게 된 건 슬플지언정, 이미 벌어진 일을 놓고 다투느니 같이 손 붙들고 얼굴이라도 마주 볼 수 있으면 그나마 좋았으니까. 그러나 바이러스가 무너뜨린 담장을 타고 들어온 결핵균 때문에 아주머니가 빨리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됐다.


  결핵균은 HIV/AIDS 환자들에게 매우 치명적이었다. 한국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결핵이란 건 폐에만 걸리는 병인 줄 알았는데 면역력이 없는 사람들에겐 그렇지가 않았다. 결핵균이 시신경을 건드려 맹인이 되었다든지 폐 아닌 다른 어떤 부위로 들어왔는데 치료가 제때 이루어지지 않아 죽음으로 이어진다든지 하는 일이 이 사람들 사이에선 허다했다.


  하여 결핵이 의심되자 우리 팀은 곧바로 J 아주머니를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이 병원에 대해서는 전에도 쓴 적이 있는데, HIV/AIDS 환자들 중 결핵을 앓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전문 병원이다. 시골 수도원처럼 따뜻하고 깨끗한 분위기라 편안해 보이는 곳이었다.


  그러나 아주머니에겐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주머니는 칼을 들고 의료진을 협박했다. 집으로 보내 달라고,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결국 실랑이 끝에 의료진들은 치료를 포기하고 아주머니를 집으로 보냈다.


  그 상황을 보며 우리 현지인 스태프는‘아주머니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고 했다. HIV 보균자로서 치료를 거부한 결핵 환자가 살 확률은 매우 적다고, 이론으로도 경험으로도 우리는 그렇게 배웠으니까. 그러는 동안 J 아저씨는 다른 병 때문에 국립병원에 갔다가 한 달 가량 입원 처리가 되었다, 고 나중에야 들었다. 그리고 그 사이 아주머니는 사라졌다, 세상에서.


  들은 이야기로는 뇌를 건드린 결핵균이 완전히 뇌를 장악한 모양이었다. 순진한 얼굴로 웃으며 한 말 또 하고 또 하던, 따뜻한 손으로 내 손을 맞잡던 아주머니. 그 아주머니에 대한 세상의 마지막 기억은 옷도 제대로 입지 않고 돌아다니는 것을 누군가 보았더라는 이야기 한 가락뿐이었다.


  그토록 가까이 있었음에도 우리는 풍문으로밖에 듣지 못했다. 결핵 때문에 오래 살지는 못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어디서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게 존엄성 없는 최후를 맞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기에 너무나 씁쓸했다.


   아주머니가 그렇게 세상에서 지워진 후로 현지인 스태프는 아저씨를 한 번 만났다고 한다. 천하를 호령할 듯 기세 등등했던 아저씨는 아이처럼 연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후 아저씨도 사라졌다. 축사만큼이나 비참하고 싸한 그 집을 아저씨 혼자 지키고 살 이유가 없었기에. 아저씨는 여기저기 다니며 사람들이 주는 밥을 받아 먹고 그냥저냥 산다고, 풍문처럼 전해져 왔다.


  밥 주는 곳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거적을 덮고 자는 사람이 되었다고 했다. 아저씨를 처음 보았을 때 ‘여기저기 때에 절은 하얀 룽기를 입은 아저씨. 과거가 무색하게도 걸인보다 조금 나은 정도의 행색을 하고 있었다’고 일기에 썼던 나는 더 입맛이 썼다.


  우리가 졌다. HIV가 결국 한 가정을 완전히 붕괴시켰다. 무너져 가는 것들을 잘 붙들어 가며… 힘겨워도 희로애락을 가진 사람으로, 우리의 이웃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기분이었다.


  험하고 비통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이때껏 들은 이야기 중에서는 J 부부의 이야기가 단연 가장 괴로웠다. 다른 이야기들은 슬프고 괴로울 망정 최소한 삶 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이었다. 최소한… 가족을 잃고 마음을 잃고 자신마저 잃어버리고 유령처럼 겉도는 존재가 되지는 않았다.


  아주 오래오래, 우리 마음은 11월의 나무들처럼 우울하게 웅크리고 떨었다. 현지인 리더는 그 날 하루 종일 밥을 넘기지 못했다 했고, 그 밤 나도 잠을 못 자고 한참을 뒤척거렸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몇 날 며칠 마음을 앓았다.


  무너진 것들을 밟고 서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삶을 받쳐주던 것들이 무너진 자리는, 그 깨진 조각을 밟고 서는 사람의 자리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참했다. 그 삶을 옆에서 지켜보며 같이 서 있는 것밖에 할 수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나는 휘청거렸다.


  잠 들지 못하는 그런 밤마다, 나는 주문처럼 입 속에서 소리 없이 중얼중얼 시를 읽었다. 원래 아껴 읽던 시였고, 나의 밤을 데워주기 위해 필사해 가져온 시였는데 그 날 밤은 시의 내용이 너무나 처연하게 J 부부의 이야기로 다가와 더 마음 아프게 읽은 시였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_ 백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깍지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미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느 먼 산 뒤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에서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전문)



  때문에 이 더운 나라 밤 하늘에서, 내가 선 자리만큼은 눈이 내렸다. 어딘가에 있을 J 아저씨와… 살아 있다면 J 아주머니의 마음속에도 눈이 내릴지 모를 일이었다. 읽다 보면 어느새 시는 기도로 변했다. 부디 우리의 마음에 굳고 정한 갈매나무 하나가 세워지기를. 어찌됐든 살아있는, 살아가는 우리를 지탱할 갈매나무가 세워지기를. 그래서 시리게 내리는 눈을 쌀랑쌀랑 맞아 주기를. 그래서 살기를,


부디 우리,  

살아 가기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