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에는 축복을
연말연시는 부산했다. 연말연시라고 기분이 뭐 다를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울적했다. 눈이 온다거나 친구들 가족들끼리 모인다거나 크리스마스를 준비한다거나 하는 한국 소식을 듣고 있자니 뭔가 나 혼자만 기존 생활에서 뚝 떨어진 느낌이 별로 유쾌하지는 않았다.
나의 겨울, 나의 크리스마스를 감싸던 것들이 그리웠다. 공기는 살을 에일 듯 시려도 눈 쌓인 골목길을 걸어가면 환한 이웃집 목소리들은 왜 그리 정답게 들리는지. 뽀드득 눈길을 걷다 보면 작은 시골 교회에 장식해 놓은 고요한 크리스마스 불빛이 요란스럽지 않아 얼마나 따스한지. 아빠가 들고 들어오시던 하얀 크리스마스 케이크, 웃음 소리, 괜히 잠으로 보내기 아까워 책상 앞에 앉아 음악을 작게 틀어주고 끄적끄적 일기를 써 내려갔던 기억들까지 점점이 떠올랐다.
그러는 동안 사랑니를 뺐다. 인도에서 두 번째로 빼는 사랑니였다. 이를 뺀 것만도 아픈데 반대쪽에도 사랑니가 올라와 양쪽으로 앓았다. 하필 속까지 뒤집어졌다. 진통제와 위장약을 오락가락하며 보내는 시간이, 그러면서도 제대로 쉴 수 없는 시간이 조금은 서럽기도 했다.
멋모르는 아이들은 끙끙 힘들어하는 날 보며 졸리면 가서 자라고 했다. 졸린 게 아니라 어지러운 건데. 나는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지난주 과학 시간에 너희들 치아 구조 배웠지? 어금니 뒤에 사랑니, 이게 사랑니야. 설명해 주자 한 녀석은 자기도 사랑니가 나는 것 같다며 심각한 얼굴이다. 얘야 네 건 어금니란다. 잘 벌어지지도 않는 입을 벌려가며 이의 개수까지 하나 두울, 하고 세어 확인시켜 주었다.
생각해 보면 나도 열두 살 즈음엔가 어금니가 나는 걸 보며 이게 말로만 듣던 사랑니인가 하고 불안해했던 적이 있다. 엄마가 그건 어금니라고 여러 번 말해 주었지만 "그래도 이게 사랑니면 어떡해? 나도 빼야 되는 거 아니야?" 하며 불안했던 기억이 나서, 그 심각한 표정이 이해가 갔다.
어쩌면 아직 어린 우리 모두는 불안하고 낯선 것들 틈바구니에서 저보다 조금 더 큰 등을 보며 자라고 있나 보다. 더 등을 곧게 펴야겠다, 고 생각했다. 배워야 할 건 끝이 없지만 내 앞에도 곧은 등이 있다. 이 와중에 안쓰러워 문자로나마 끌탕을 하시는 우리 엄마. 애써 태연한 척 “어디 있어도 아픈 건 똑같은데, 뭐. 괜찮아요.”라고 말하니 “옆에 있었으면 죽이라도 해 먹일 텐데 안쓰러워서 그러지.”하는 대답이 들려온다. 따뜻함을 느끼면서도 울컥 하고 올라와 어쩐지 더 힘든 것만 같은 기분이다.
그래서 엄마 마음 대신 내가 나에게 죽을 끓여 주기로 했다. 오후 햇살이 남은 잠깐의 여유시간을 모두 털어 넣어 정성껏 나를 위한 죽을 끓이며, 마음을 더 강하게 벼리자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이미 설움이 몰려오기 시작한 몸과 마음에 힘을 주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내게 크리스마스의 동방박사 이야기는 의외의 위로가 되어 주었다. 크리스마스를 준비하기 위해 머나먼 동방의 이국에서부터 준비를 갖춰 몇 달 전부터 여행을 떠났을 그 박사들. 대사도 별로 없는 동방박사들은 늘 좋은 옷을 입고 무대 한 켠에 들러리처럼 서서 번쩍거리는 선물 하나씩 내려놓고 서 있었다.
숱하게 듣고, 연극이나 모형으로도 많이 보았지만 한 번도 신경 써 본 적 없을 만큼 미미한 자리였다. 그러나 그 자리에 서 있기 위해, 무대 뒤편 아주 먼 곳에서부터 달려왔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고요하고 평화롭지 않아서, 바쁘고 아프고 정신없어서 조금 서럽기도 했지만 누군가는 달리는 날이 크리스마스였다. 그게 정상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위로가 되었다. 이번에는 내가 달릴 역할일 뿐인 거였다.
해서 달렸다. 우선은 짧은 생에 아직 크리스마스 카드란 걸 받아본 적 없는 결연 아동들에게 카드를 주고 싶었다. 어릴 때 미술 시간에 하던 것처럼 종이를 오리고 붙였다. 무슨 말을 쓸까 볼펜을 물고 한참을 고민했다. 카드에 직접 찍은 아이들 사진을 인화해 끼워 넣어 예쁘게 묶었다.
결연 후원자들이 보내주신 새해 선물로 책가방과 도시락통을 준비하고 식량 꾸러미까지 전해 주어야 하는 날 그 손에 같이 쥐여 주기로 했다. 또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잡은 날이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따뜻하게 보내는 이 날, 연말연시를 물씬 느낄 수 있는 이런 날도 차가운 골방에서 홀로 식어 가야 하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 우리는 잔치 아닌 잔치를 벌였다. 환자 중 호텔에서 일하던 사람이 와서 잔치 음식을 한 상 차리기로 했고, 아이들 중에 자기들끼리 연극이나 춤을 준비한 아이도 있었다.
아침부터 부산을 떨며 옷을 차려 입고 들뜬 마음으로 모이니 마치 명절 같은 기분이었다. 아이들을 둘러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을 찍으며 그 분위기를 만끽하다가, 눈에 들어온 결연 아동 중 한 명에게 나는 작은 부탁을 했다.
“G, 혹시 이따 행사할 때 앞에 나가서 ‘한 말씀’ 좀 해 줄 수 있을까? 네가 그동안 이만큼 열심히 해서 이렇게 이루었다, 뭐 이런 거 있잖아… 노력의 가치에 대해서 나눠 주면 좋겠는데.”
G는 내가 팀으로 왔을 때 처음으로 손을 맞잡아 보았던 아이였다. 부모님을 이미 HIV로 여의고 편찮으신 할머니와 둘이 살고 있는 아이. 상급 학교 진학을 앞둔 10학년인데 공부를 월등히 잘 해 항상 1등을 도맡아 하는 데다가 최근에는 무슨 경시대회까지 나갔을 정도였다.
그러나 삶이 참 수월치 않아서, 학교에서 아이의 몸 상태를 아는 친구들이 늘 소외시켜 혼자였다고 했다. 그래서 아이는 늘 주눅 들어 보였고 기운이 없었고 표정이 어두웠다.
아이가 밝아지기 시작한 건 결연이 시작되고 얼마가 지나서였다. 초콜릿과 장난감도 컴퓨터와 운동화도 아닌, 쌀과 식용유가 아이들의 표정을 그렇게 밝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사실 결연을 통해 가시적으로 볼 수 있는 변화가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확실하게 눈에 보인 건 '보호자(주로 엄마)의 걱정을 더는 것이 아이의 걱정을 더는 길'이 될 수 있다는 거였다.
G도 그랬다. 무릎이 아프다고 매일 말씀하시는 할머니의 잔기침 소리가 잦아들 수 있다는 건 G에게 행복이었다. 처음에는 할머니가 내게 와서 하소연이라도 하려 하시면 ‘이 언니는 우리말 모르니까 하지 마요’ 하고 은근슬쩍 막던 어두운 얼굴이 언제부턴가 반짝반짝 빛나고, 제가 먼저 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는 아이가 되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예쁘고 밝은지 그 얼굴만 봐도 나는 마음이 녹는 것 같다. 쌀과 식용유만으로 아이가 밝아진 건 아니었다. 결연아동 20명의 가족들이 매달 모여 위생보건 교육을 받고 식량 배분을 받기 때문에, 그 자체가 또 하나의 모임이 되어 사람들과 섞이고 친구가 되는 것을 배우는 장이 되고 있었다.
게다가 그때쯤 제법 큰 경시대회에서 수상을 하면서 탁월한 아이를 인정한 친구들이 아이를 조금씩 받아들여 주어 학교에서도 아이가 처음으로 사람들과 섞여 들기 시작한 거였다. 이런저런 연유로 아이는 많이 밝아졌고 훨씬 좋아 보였지만, 그래도 이제 막 첫걸음을 뗀 거나 다름없는 아이에게 사람들 앞에 서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 건 큰 도전이었다.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음에도 내가 G에게 굳이 부탁을 한 것은 다른 아이들 때문이었다. 무작위로 환자를 만나고 다니다가 이제는 20명의 결연 아동들을 모아서 함께 보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아이들 위주로 어떤 공통점을 포착하게 되었다.
첫 번째는 부모님(특히 엄마)에 대한 책임감이 일반 아이들 이상으로 크다는 점. 건강하게 분리되기엔 너무 어려웠던 아이들 삶의 반증이다. 두 번째는 그래서 공부를 아주 열심히 하거나 아니면 공부를 포기하거나 모 아니면 도라는 점. 공부를 열심히 해서 엄마를 호강시켜 드리겠다는 포부를 가졌거나 아니면 ‘어차피 죽으면다 그만인데 공부가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거나 둘 중 하나인 경우가 많았다.
내가 G에게 부탁한 건 이 두 번째 경우의 아이들 때문이었다. 삶의 불빛이 아무리 흐릿해도 사람의 태도에는 그 불빛을 좌지우지할 만큼의 힘이 있다는 걸 이들을 보며 여러 번 느꼈다. 아이들이 처한 상황을 감안해야 하지만 그래도 그렇다고 모든 걸 진작부터 포기할 필요는 없었다. 아니 그래선 안 되었다. 어디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삶을 제 손으로 놓아버리게 둘 수는 없었다. 해서 누구보다 어려운 상황에서 노력했고 그 성과를 보고 있는 G에게 ‘한 말씀’을 부탁했던 거였다.
부탁을 받은 G는 한참을 망설였다. 꼭 살얼음판을 걷기라도 하는 표정이어서 나는 내가 무리한 부탁을 했나 되돌아보았지만, 아이들은 물론 G에게도 귀한 한 걸음을 떼는 시간이 되리라는 마음이 들어 G에게 제발 꼭 해 달라고 간절하게 부탁을 했다. 차마 거절하지 못한 G는 그럼 짧게 하겠다며, 현지인 스태프 언니의 도움을 받아 몇 마디를 준비했다.
행사가 한참 진행되고 마침내 차례가 되었을 때 누가 봐도 긴장한 G가 뻣뻣하게 앞으로 나왔다. 현지어로 진행했으므로 내가 알아들은 건 자기소개와 ‘내가 유치원 때…’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그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다. 잔뜩 긴장한 G가 얼어붙어 말문이 막힌 채 울 듯한 얼굴로 서 있었다.
사진을 찍던 손을 멈추고 어떻게 도와주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찰나, 현지인 스태프 언니가 사리 자락을 휘날리며 G 옆에 가서 섰다. 그 광경만으로도 얼마나 마음이 든든하고 따뜻해져 왔는지.
나는 또 바삐 셔터를 눌렀다. 뷰 파인더 안의 언니는 G를 대신해 G 이야기를 조금 하다가 눈물이 그렁그렁해졌고 이윽고 두 사람의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늘 안전하고 따스해 누구나 기댈 수 있을 것 같은, 오후 햇살 같은 사람의 눈물. 그리고 그 온기 속 안전한 곳에 안겨서 흘리는 눈물.
그 눈물이 다였다. 어떤 말도 더 하지 못했다. G의 이야기로 아이들에게 노력의 가치에 대해 도전하자는 내 야심찬 포부는 그렇게 허공으로 날아갔지만, 사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했다. 한 손은 G의 어깨에 두르고 한 손으로는 눈물을 훔치는 언니의 모습, 그리고 언니가 옆에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조금 진정이 된 G의 모습은 서로 얼마나 아끼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너무나 아름다워 끝내는 나도 눈물이 났다.
열심히 준비한 크리스마스 카드와 자기 얼굴이 찍힌 사진 여러 장을 선물 받은 G가 고맙다고 말하며 웃을 때는, 그 조심스러운 표정이 꼭 첫눈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이 오지 않아도, 여느 크리스마스와 같지 않아도... 그 벅찬 감동은 여전히 함께인 연말연시였다. 그렇게 2014년은 언제 왔다 언제 가는지도 모르게 훌쩍,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