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 엮어 적은 이야기
1월은 분주한 달이다. NGO에서는 매년 1월마다 겨울방학을 맞은 대학생들을 단기 봉사 팀으로 꾸려 지부나 협력 지부에 보낸다. 이곳은 정식 지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속한 어린이 센터와 HIV/AIDS 사업이 NGO와 협력으로 이어져 있어, 내가 처음 왔던 것처럼 한 팀이 오기로 되어 있었다. 바쁜 연말연시를 쉼 없이 달린 직후에 팀을 맞는 것이 고되리라는 생각에, 새해의 설렘보다는 마음의 고삐를 바짝 당기며 시작했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바빴다. 스케줄을 조율하고, 조율한 스케줄에 맞춰 움직일 수 있도록 음식이나 차량을 준비하고... 모두가 눈코 뜰 새 없는 한 달이었다. 센터와 팀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팀 인솔을 맡은 나도 정신이 없었다. 일정이 갑자기 바뀐다든지 예약한 택시가 30분이 넘도록 오지 않아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든지 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러나 가장 힘들었던 건 그게 아니었다. 매주 목∙금요일마다 HIV/AIDS 가정을 방문해 팀과 함께 앉아있는 시간이었다. 3주 중 6일, 총 12~13 가정. 좁디좁은 방에 예닐곱 명이 다닥다닥 붙어 앉았다. 침대 하나에 여섯 명이 앉아 있기도 했다. 대체로 환기가 잘 되지 않는 이 도시의 '외딴방'들이었고, 보통은 그 삶의 무게가 턱 하니 목을 죄어와 공기가 탁하고 무거웠다.
현지어에서 영어, 영어에서 한국말로 중역(重譯)되느라 마디가 길어진 이야기는 집집마다 비슷비슷했다. 결혼하고 보니 남편이 양성임을 시댁에서 속이고 있었다든지, 재산을 주지 않으려고 과부와 아이들을 쫓아냈다든지, 아주 어린 제 아이를 잃고 오래 마음을 닫았던 때라든지... 어려운 이야기들을 어렵지 않게 터 놓은 그 덤덤한 말투가 오히려 우리를 무겁게 했다.
때로는 가족들 간에 서로 말이 맞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무엇이 정확한 사실인지를 알 수야 없었으나 확실한 것 하나는 가족들의 관계가 처참하리만큼 무너져 있다는 점이었다. 또 어떤 날은 그간 나도 몰랐던 이야기를 알게 되어 놀란 기색을 감추며 앉아 있던 때도 있었다.
이런저런 이유들로, 나는 통역하는 중간중간 말을 멈추고, 목에 가시처럼 툭 걸린 말을 천천히 골라내야 했다.
그중 몇몇 이야기는 꼭 글로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바로 이것을 위해 내가 여기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막중한 의무감이었다. 오늘은 그중 P의 이야기를 풀어 본다.
시계를 조금 더 앞으로 돌려 11월 말쯤을 더듬어 보면 그 때도 잠시 이 지역을 방문한 사람들이 있었다. 브라질에서 온 여섯 명이었고, 마임을 얼마나 잘하는지 가는 곳마다 퍼포먼스 한 번이면 어린아이들부터 어른들까지 이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우리 사업장에는 도시 곳곳에 다니며 다양한 일을 하는 도시 사업 팀이 있었는데, 이 브라질 친구들은 나보다는 이 도시 사업 팀과 주로 함께 다니며 일하고 있었으므로 슬럼이나 학교 등을 주로 다니고 있었다.
아이들과 사는 우리 집에도 두어 번 와서는 저글링으로 아이들 마음을 쏙 빼앗아간 팀이었지만, 그때에도 한두 명 빼고는 영어를 잘 못 하는 데다가 워낙 짧은 방문이라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만으로도 이들이 유쾌하고 따뜻한 사람들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어서 나는 이들이 꽤나 좋았다.
그러나 HIV/AIDS 사업에는 잘 어울리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저렇게 에너지가 많고 역동적인 사람들이 앉아서 가만히, 두 번이나 통역을 거쳐 이야기 듣는 게 쉽지 않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건 나의 어림짐작일 뿐이었다. 그들은 그 순수한 마음으로 몸뿐 아니라 마음도 함께 앉아 있어 주었다. 이들과 딱 하루 함께한 시간은 정말 잊을 수 없는 시간이 되었다. P 때문이었다.
P에 대해서는 이전에도 글을 쓴 바 있다. 부당한 해고를 당하고 어린아이처럼 울던 P. 그러나 브라질 팀과 함께 찾아간 P는 그 전은 물론 그때와도 확연히 다른 상태였다.
부들부들 떨리는 몸과 금방 꺼질 촛불 같은 얼굴을 한 P가 문을 열어 주었다. 그의 눈엔 우리 모두가 보이지 않는 듯했다. 손님이 오면 항상 화사하게 웃으며 인사를 하던 그가 차마 우리한테까지 신경도 쓰지 못한 채로, 그저 현지인 스태프를 붙들고 하염없이 울면서 이야기를 가닥가닥 늘어놓았다.
착잡한 얼굴로 현지인 스태프는 중간중간 한 번씩 통역을 해 주었다. 그 해고 이후로 면역세포 수는 아주 급격하게 감소해 이제는 위험 수준이었다. 몸이 많이 상했다는 건 P의 겉모습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으나 정말 걱정되었던 건 P의 말들이었다.
아이들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고, 자기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와 자기 꿈 이야기를 했다. 원래 가정 방문을 할 때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나는 울지 않고 참았다가 밤에 방으로 돌아와 우는 편인데, 현재진행형의 삶을 이야기하는 그 눈앞에서 내가 우는 건 예의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그 날만큼은 도저히 참지 못해 방에 널려 있는 빨래 뒤로 얼굴을 감추고 뚝뚝 울 수밖에 없었다. 나뿐 아니라 모두가 그랬다. 한국에서 온 2명과 브라질에서 온 6명. 현지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인 8명 모두가.
공기가 읽히는 탓이었다. 사람은, 아니 생명은 어쩐지 죽음에 대한 감만큼은 무서우리만큼 정확하게 갖고 있으니까.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P가 삶을 정리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그 방에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특히나 서글퍼 보였던 사람은 따로 있었다. 브라질 팀 중 유독 덩치가 컸던 한 사람. 어린 시절에는 길에서 자랐다는, 전직 복서였고 아내와 딸이 있었지만 어찌 된 건지 지금은 직업도 가족도 잃었다는 사람. 언젠가 꼭 가족들을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믿는다는 말로 봐서는 가족이 죽은 건 아닌 것 같은데, 잘 모르긴 해도 사연이 깊어 보이는 사람.
그는 아무 말 없이 P의 바로 옆에 앉았다. 작게 옹송그린 어깨를 감싸 주었다. 함께하지 못하게 될 자식을 걱정하는 아버지와, 함께하지 못하게 된 자식을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그렇게 허공에서 공명했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않았지만, 입을 열었어도 말이 통하지 않았을 사이지만, 마음을 헤아리기에 그 잠깐이 충분했다. 아버지의 눈빛은 그토록 따뜻하고 눈물겨운 것이라는 걸, 그 맞댄 등과 어깨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조금씩 눈물이 잦아드는 P를 그 어두운 방에 두고 나오기가 마뜩잖던 우리의 머릿속에는 각자의 그림들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형광등이라도 밝은 걸로 갈아주어야겠다, 가 우리 현지인 스태프의 생각이었고 나와 다른 한국인 스태프는 침대 시트라도 말끔하고 산뜻한 걸로 갈고 향초라도 피우면 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각자의 머릿속 그림들을 입밖에 내니 그럴듯한 계획이 되었다. 때마침 단기 봉사 팀이 오니 다 같이 해서 페인트 칠부터 시작해 대청소를 싹 하고 집을 좀 갈아 엎어 보자는 거였다. 그리고 단기 봉사 팀을 전원 다 데리고, 오랜만에 P의 얼굴을 볼 생각에 걱정 반 궁금함 반으로 그 집에 방문했을 때…
숄을 어깨에 걸친 P는 울고 있지는 않았지만 푸석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집 주인이 안 된다고 해서 페인트 칠이나 대청소를 할 수 없다’고 했다. 바로 그 당일 아침에 통화할 때까지만 해도 그런 말이 없었기 때문에 현지인 스태프는 당황해했고, P는 말없이 고개만 떨구었다.
현지인 스태프는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타이르긴 했지만 그도 실은 이해하고 있었다. P나 게으르거나 귀찮아하거나 우리를 소중히 여기지 않아서 말이 없던 게 아니라는 걸. 그렇게나 여유가 없을 만큼, 사릴 대로 사리게 되어 버린 그 마음을 우리가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짐작은 할 수 있기에. 우리는 계획을 다 내어버리고 그냥 다 같이 그 외딴방에 앉았다. 좁은 방에 거의 구겨 넣어지다시피 했지만 그걸 신경 쓸 겨를 같은 건 없었다.
통역하기 가장 힘들었던 날이다. 이내 울기 시작한 P의 입에서는 정말 죽으려고 했다는 말이 나왔다. 4달째 아이들이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했고, 이웃집에서 맛있는 음식 냄새라도 나면 칭얼대는 아이들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상황이 답답하기도 한 마음에 결국엔 아내가 벌컥 화를 냈다고 했다.
그런 아내를 이해하고 또 미안해하면서도 속상한 마음을 가눌 만큼의 힘은 없었던 P는 그냥 집을 나섰다고 했다. 큰 길로 나가 차에 치여 죽을 심산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아들이 따라 나와서 P의 팔을 잡았고, ‘아무튼 아빠는 우리에게 아빠야. 아빠가 없으면 안 돼’라는 말을 들은 P는 아들을 따라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후로도 마음의 어둠은 가시질 않아서 줄곧 죽고 싶었다고 했다. 우리는 오래도록 P와 대화를 나누었다.
브라질 팀과 방문했을 때 P가 자기 삶을 풀어놓을 때만 해도 죽음이 가까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한국 팀과 방문했을 때는 느낌이 달랐다. 몸 상태도 비슷했고 상황도 나아진 게 없었지만 아주 조금 달라진 무언가, 그건 마음의 상태였다. P 본인이 사람들의 애정과 격려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오랜 시간 여러 번 반복해 들어온 구슬 같은 이야기들이 이제 한 줄로 꿰어졌다고나 할까.
우리는 P를 잃을까 두려워했고, 언젠가는 그렇게 될 거라는 것도 안다. 그러나 P의 마음에도 우리의 마음에도 이제는 한 줄의 보석 같은 이야기가 생겼다.
나는 이 이야기를 꼭 다른 사람들에게 외치고 싶었다. 자기도 사실은 자기 삶을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도록 살고 싶었다는 유언 같은 말을 들으며, 그렇다면 내가 대신 써야겠다고 결심했다. 귀여운 아이들의 아버지로, 좋은 아내 곁의 좋은 남편으로... 오래오래 살아서 그가 직접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꼭 들려주고 싶었다.
이 글을 쓴 건 2015년 1월의 일이고, 2015년 9월이 끝나 가는 지금 P의 딸은 결연 아동으로 후원을 받게 되었다. P의 이야기는 시간을 따라 결을 달리해 왔고 이제 P는 더 이상 위험한 벼랑 끝에 서 있지 않다.
P를 못 본지 꽤 오래 되었지만, 다시 만나면 P는 내게 환한 미소를 다시 보여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P를 볼 때마다 떠올릴 것이다. 내가 아빠를 생각하면 드는, 애틋한 부성애에 대한 짠한 마음을 나는 계속해서 떠올릴 것이다.
해서 나는 오래 전 우리 아빠를 생각하며 썼던 시를, P를 생각하며 또박또박 다시 적어 보았다.
심장에 소금기가 고여
말을 이을 수가 없다
얼기설기 거친 뗏목으로
바다를 이고 살아온 당신이었다
단단하여 가련한 등에서는
볕발에 무르익은 내음이 났다
온 마음으로 나를 듣는 그 등이
먹먹하게 밀려와
심장에 뻑적지근하게 뭉치면
말없이 발끝만 내려보았다
내려본 발치에까지 소금이 맺혀
아스라이 반짝거리면
달려가 당신의 너른 등이
좁은 내 품에 스미도록
끌어안았다
심장에 소금기가 고여
차마 말은 이을 수가 없었다
P를 생각하는 내 마음도 그랬다. 결연의 힘으로 무럭무럭 자란 아이가 언젠가 같은 마음을 다른 언어로 적을 것이다. 그것이 P를 향한 헌사가 될 테고, P가 그토록 외치고 싶어 했던 삶의 흔적이 될 테지. 어느덧 파도가 사그라든 P의 바다가, 부디 좀 더 오래 고요했으면 한다.
어느 아버지를 향한, 어느 딸의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