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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Sep 27. 2015

Happily, ever after.

내가 만난 사람, R의 이야기

  병원으로 가는 오토릭샤 안이었다. 계절은 서서히 그 옷을 여름으로 갈아입을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릭샤를 타고 있는 내 몸은 덜덜 떨렸다.


  큰길에 있는 병원까지 넉넉히 쳐도 10분 거리. 잠시 후 병원에서 무슨 말을 듣게 될까, 혹시 삶을 정리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부터 시작해 갈래갈래 찢어진 생각의 끝에 소실점처럼 모여든 생각은 더욱 착잡했다.


  당신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단기 봉사 팀이 돌아가고 1월이 끝났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락가락해 더욱 바빴던 시간에 종지부가 찍혔다. 팀을 공항에 바래다 주고 돌아오는 길, 피곤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으려고 앉은 내 주위로 아이들이 몰려들어 비행기며 공항에 관해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오늘따라 평소보다 질문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비행기를 타고 오가는 사람들을 워낙 많이 보아 늘 관심 있어 하는 소재였기 때문에 그냥 같이 이야기를 했다. 아이 하나가 오더니 이제 오늘부터 우리 숙제 누가 도와주냐고 물었다. 너는 내 담당 학년이니까 내가, 라고 대답했더니 씨익 웃었다. 그리고 또 다른 아이 하나는 발에 상처가 났다고, 약 담당인 나를 찾아와서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틀 전에 다쳤는데 약 바르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그 한 마디로, 아이들이 내게 갑자기 와글와글 던진 수많은 질문과 말 하나하나가 다 이해되었다. 팀을 배웅하고 돌아오는 지금 이 순간까지 아이들이 날 기다려 주고 있었구나. 1월 한 달 내내 바쁜 나를 보면 ‘어딜 그렇게 맨날 가냐’고 퉁명스러운 척 했으면서도, 사실 기다려 주고 배려해 주고 있었구나.


  사랑 받고 있음에 기뻤다. 더 열심히 살고 싶어졌다. 다시 마음의 죔쇠를 조이고 아이들의 간식을 챙기고 숙제와 성적표를 검사하고 청소를 하고 부지런히 일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몸이 하루쯤 쉴 새도 없이 마음이 먼저 힘을 얻은 탓에 나는 또 끊임 없이 신나게 걷고 있었다. 쉼을 모르고 신나서 끝까지 가는 건 내 나쁜 버릇이었다. 미처 풀 새 없었던 피로가 조금씩 새어 나오는 가스처럼 나를 덮치고 있다는 걸 느꼈지만 정말 ‘조금씩’이었으므로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나는 R의 집을 방문했다.



  밝은 노란색과 오렌지색으로 칠해진 벽 한쪽에 있는 선반을 장난감이며 도기, 조화 등으로 오밀조밀하게도 꾸며 놓았다. R의 집은 세 식구가 칼잠이라도 잘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작지만 늘 깔끔하고 예쁘게 정돈되어 있다.


  R은 두 딸과 살고 있는데 둘 다 착하고 예쁘고 열심히 사는 모습이 엄마를 빼다박았다. 대학에 다니는 큰딸은 팔다리가 길쭉길쭉하고 눈매가 서글서글해 그 착한 성격이 인상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둘째 이제 상급 학교 진학을 코앞에 둔 10학년인데 언니와 정반대로 키나 덩치가 또래보다 훨씬 작고 얼굴도 새침한 인상으로, 무려 패션 디자이너가 꿈이라는 야무진 아가씨다.


  이 둘째 딸은 NGO 아동 결연 사업으로 연결된 아이이기도 해서, 우리와 지속적으로 얼굴을 봐 온 사이이기도 했다. R의 집은 1월에 팀과 함께도 방문을 했으니 제법 최근에 왔던 편인데, 그 짧은 시간 사이 R은 어쩐지 그 때보다도 더 힘이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제 한 몸 가누기도 힘들어 보이는데 자꾸 차이를 끓이거나 뭐라도 대접하려 하는 것을 우리 현지인 스태프들이 계속해서 만류했다. 돈도 힘도 쓰게 하고 싶지 않은 탓이었다. 하지만 R도 손님 대접을 꼭 하고 싶어했다. 화장실 가면서 슬쩍 옆집 아이에게 부탁해 음료수를 기어코 사왔다. 감사한 마음으로 음료수를 마시며 우리는 R의 이야기를 들었다.


  별다른 새로운 소식이 있다기보다는 그냥 두 달째 몸에 열이 내리지 않아 고생하고 있는 거였다. 열만 있으면 다행인데 구토에 설사, 어지럼증이 시시로 일어 밤에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다고 했다.


  때문에 일을 잘 나가지 못해 큰딸이 수업을 빠지고 격일로라도 가사 도우미 일을 대신 나가고 있다고. 세 모녀가 서로에 대한 안쓰러움과 미안함, 속상함과 슬픔으로 그 좁은 단칸방에서 몰래몰래 눈물을 훔치며 지내고 있다고 했다. 나는 불현듯 내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우리 친할머니는 딸만 셋 낳고 이른바 '소박'을 맞은 분이셨다. 때문에 아들에 대한 욕심이랄까 집착 같은 것이 있으셨다. 엄마가 가끔 서러웠던 기억으로 늘 꺼내던 이야기가 있었다. 작은엄마가 임신했을 때 할머니가 작은엄마는 아랫목에 앉혀 놓고 엄마한테만 집안일을 시키셨던 기억이다. 아기였던 나, 소중한 손녀이기는 하나 이미 딸로 태어났으니 아들일지도 모를 뱃속의 사촌동생보다는 뒷전이 되어 버린 나를 업고 찬물에 설거지를 하셨단다.


  아직까지도 친척들 모일 때면 회자될 만큼 울음을 멈추지 않는 아이였다던 내가 그때도 도저히 달래지지 않고 계속 울어, 서러운 마음에 같이 울고 싶은 심정이셨다고. 그 이야기를 들을 때면 마치 오래 전에 본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르듯 어렵지 않게 그 장면이 마음에 그려지곤 했다. 충분히 그려낼 수 있을 만큼 익숙한 공기인 탓이었다.


  엄마가 내 동생을 임신 중이었을 때에는 할머니가 어린 나를 붙잡고 주걱인지 방망이인지 두 개를 내밀며 하나 골라잡아 보라하신다든지 뭐 그런 일이 다반사였던 듯하다. 그래서였을까. 간호사가 ‘축하드립니다, 공주님이세요.’ 운운하자마자 내가 자지러지게 울었다고 했다.


  기함을 한 외할머니가 이유를 물으니 ‘서울 할머니가 우리 엄마 아들 낳아야 한댔는데 딸을 낳았으니 이제 우리 엄마는 구박 받게 생겼다’고 서럽게 울었다고 한다. 세 살짜리가 그런 말을 하며 서럽게 우는 통에 외할머니도 기가 막혀 친할머니를 찾아가기까지 했다고 하니, 일은 일이었다.


  사실 나는 그 날이 생생히 기억난다. 아마 지금 내가 가진 기억 중엔 가장 오래된 기억일 것이다. 엄마가 누워 있던 병실 모습과 연분홍색 침대 시트, 그 앞에 시장이 있던 것도, 외할머니 손을 잡고 시장에 가서 어떻게 생긴 장난감을 사왔다는 것까지도 척척 이야기해 친척 어른들이 놀라곤 했으니까.


  그러나 정작 간호사 앞에서 엉엉 울었다는 그 순간만큼은 기억에 없다. 친척 어른들이 내가 듣는 줄 모르고 자기들끼리 하는 이야기를 듣고야 알았는데,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너무 슬픈 이야기라 충격을 받았다.


  왜 그 날의 또렷한 기억에 그것만 없는지, 어쩌면 너무 괴로운 기억이라 스스로 지워버린 건 아닌지. 꼭 타인의 그것처럼만 느껴지는 이야기 속 어린 내가 서글프고 측은하게 여겨지곤 했다. 남 같은 그 어린애가 불쌍해서 눈물도 났더랬다.


  기억과 그 이편에 묻혀 있는 크고 작은 상처 조각들. 때문에 나는 공부든 뭐든 더 열심히 해서 엄마를 지켜 줘야지, 라는 마음을 안다. 엄마를 ‘지켜’줘야지, 얼핏 이상해 보일 그 말이 일상어인 삶을 나는 안다. 더불어 엄마가 아프면 불안해지는 마음도 안다. 친척이나 손님들이 많이 왔다간 날이면 피곤해진 엄마가 일찍 자는 게 머리로는 이해가 되면서도, 엄마가 일찍 누웠다는 이유만으로 마음에 검게 그림자를 드리우던 그 불안을 나는 기억한다.


  할머니에 대해 또 그런 기억에 대해 내 안에서 화해가 이루어지고 그래서 지금은 더 이상 아픈 기억이 아님에도, 그 불안이 거미처럼 기어오던 밤들의 감촉을 다시 그려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그 불안에 덮여 오늘을 사는 사람들을 본다. 엄마가 아프다는 건 얼마나 큰 불안일지. 한창 공부에 집중해서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시기, 너는 그저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말을 들으며 책상 앞에 앉는 느낌을, 사춘기라고 분류되는 나이- 봄을 생각한다는 그 때에 이따금 마음의 뼈 같은 곳이 시려오는 추위를 느끼는 순간을, 그 마음을 벼리는 자세한 아픔들을… 다는 몰라도 옆에 같이 서서 짐작은 가능하다.


  때문에 나는 그 날 아주 마음이 아팠다. 뒤늦게 서서히 나를 덮쳐 오고 있는 피로까지 합쳐 매우 힘이 들었다. 그러나 정작 진짜 아픈 건 그 이틀 뒤였다. 일요일 오전에 교회 예배 때부터 허리가 욱신욱신 아파 왔다.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을 지경이라 마치고 방에 들어서기 무섭게 “나 잠시만 누울게” 하고 파스를 붙이고 누웠다.


  잠깐만 누웠다가 아이들 점심을 챙겨 줘야지, 하고 생각하며 누운 거였는데 나는 그 날 저녁까지도 일어나지 못했다. 몸살이라는 단어의 뜻을 새삼 느낄 만큼 몸 구석구석이 살 박힌 듯 아팠다. 오한이 나고 열이 올랐다. 피곤했던 게 이제야 오는구나.


  올 것이 왔다 싶어 놀랍지는 않았지만 다음 날 중요한 회의가 있었으므로 빨리 나아야 했다. 약을 챙겨 먹고 해열 패치까지 붙여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잠이 들었다. 원래 이럴 땐 보통 하루 쉬면 괜찮으니까.


  다음 날 아침 일어났을 때 이마를 짚어 보니 열이 내려 있었다. 괜찮아졌구나 싶어 일어나는데 몸이 이상했다. 가까스로 화장실에 갔는데 누가 포토샵으로 얼굴 채도를 팍 낮춰 놓기라도 한 듯한 안색이었다.


  결국 그 날 회의는 가지 못했다. 회의가 문제가 아니라 아예 방 밖을 나가지 못한 채 그저 침대와 화장실만 오락가락했다. 하루 종일 누워서 구토, 설사, 어지럼증에 시달렸다. 오전에는 ‘그냥 몸이 많이 피곤했나 보다, 푹 쉬어야겠다’한 마음 편하게 먹고 있다가, 오후가 되자 두 갈래 불안한 생각으로 변했다.


  하나는 R의 증세와 너무 똑같다는 것이었다. 사실 R의 집을 방문했던 날부터 내 상태가 슬슬 이상하긴 했다. 이미 진작에 사람이 지나간 허공에 대고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든지 나도 모르게 인도인에게 한국말로 물어본다든지 헛발질을 한 번씩 하고 있었지만 그 때만 해도 다 같이 웃어넘기고 말았다. 그래도 그때부터 이미 면역력은 떨어지고 있었을 것이므로 R의 증세를 옮았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또 하나의 생각은 돼지독감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그때 우리 도시에는 돼지독감이 한창 유행하고 있었고, 오늘까지 총 몇 명이 죽었다더라 하는 이야기가 풍문에도 신문에도 실렸다. 어딜 가나 사람들은 돼지독감 이야기로 하루를 시작하곤 했고, 웬만한 위생 문제에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는 오토릭샤 기사들까지도 권고사항대로 마스크를 꼬박꼬박 쓰고 다니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저녁이 되고, 지사제가 듣지 않고, 열까지 다시 치솟으면서 혹시 돼지독감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들어 슬쩍 인터넷에 돼지독감을 검색해 증상을 살펴보았다. 같은 생각을 한 다른 스태프도 같은 검색을 했는지 내게 물었다. “언니 혹시 기침은 안 해요?” 그건 돼지독감 증상과 내 증상의 유일한 차이점이었다.


  하루 종일 억지로 넘긴 죽이며 주스를 다 게우고 속을 비웠는데도 구토가 계속됐다. 음식 때문에 하는 구토가 아니므로 또 금방 다시 메슥거릴 터였다. 더 울렁거리기 전에 빨리 병원에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오토릭샤를 잡아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으로 가는 10분 거리에 마음이 무지 착잡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힘이 빠져 복도에 거의 쓰러지듯 주저앉은 나를 보며 다른 환자가 ‘저기 의자가 있으니 가서 앉으세요, 여기보단 나을 겁니다.’라고 친절하게 말해 주었다. 고맙다고 인사를 한 뒤 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벽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 날 따라 대기 시간이 왜 그리 길었는지. 울렁거리는 속을 주체하지 못하는 와중에도 혹시나 내가 돼지독감이라면, 이라는 생각은 그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정말 그렇다면 지금 내가 앉아 있는 것조차 민폐 같이 느껴졌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지금 움직이는 숙주가 아닌가. 게다가 혹시나 이렇게 며칠 앓다가 진짜 죽기라도 한다면 어떡하지?


  다른 건 다 괜찮아도 부모님 마음만큼은 걱정이었다. 생각이 흐르고 흐르다 엄마아빠 생각에 모였을 때 결국 눈물이 탁 터졌다. 몸은 계속 늘어져 갔다. 기다릴 힘조차 남아있지 않을 때쯤 간호사가 나를 불렀다.


  진료실은 따로 구분이 되어 있지 않아서 의사는 나를 진료하다가도 중간중간 몰려드는 다른 환자의 질문에 답을 하거나 자리를 비웠다. 덩달아 길어지는 진료 시간을 감당하기 버거운 몸이 거의 의자에 널브러지다시피 한 채로 진료를 받았다. 증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조금 떨리는 심정으로 물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돼지독감일 가능성은 없을까요? 의사는 처방전에 바쁜 손길로 약을 하나하나 적어가면서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가차없이 대답했다. 노No.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집에 돌아와 죽을 먹고 약까지 챙겨먹고 앉았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나왔다. 살았다는 안도감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착잡함이었다. 나는 불과 하루였다. 하루 이렇게 앓았고, 그 내내 쉴 수 있었다. 날 챙겨주고 안부를 물어주고 기도해 주고 걱정해주는 식구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죽을 끓이고 주스까지 담아 보내주신 이모, 하루 종일 내 일을 대신하면서 내게 필요한 것까지 세심히 챙겨준 다른 디디들, 걱정해 주고 기도해 준 아이들…


  그러나 R은 그렇지 않았다. R은 아이 둘을 책임져야 하는, 생계를 이끌어야 하는 어머니요 가장이었다. 두 달째 열이 내리지 않다고 했을 때도, 어지럼증과 구토와 설사에 잠을 못 이룬다고 했을 때도 나는 그냥 ‘어쩜 좋아’ 하며 듣고 한숨 쉬는 게 다였지 그 실질적 아픔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 병원에서 혹시나 내가 돼지독감일까 하는 마음에 무엇 하나 닿기 저어하던 마음도, 꼭 HIV 양성 유사체험 같이 느껴져 눈물이 났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실은 내가 품은 것보다 훨씬 큰 마음으로 삶을 이어가고 있는 강인한 사람들이었다. 매일의 전쟁터 같은 삶에 기운 없이 나아가서도 하루를 든든히 마치고 돌아오는 자랑스러운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죽음을 준비하던 P의 입에서나 힘 없는 R의 입에서나, 그 어느 누구의 입에서나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이 나오던 말. 우리 아이, 아이 때문이라고. 가족 때문이라고. 동기는 언제나 사랑이다. 부르다 죽을, 가슴 절절한 이름.


  며칠을 앓다가 자리를 떨치고 마침내 일어난 날은 하필이면 또 내 생일이었다. 다시 태어난 기분으로, 그러나 혹시라도 내가 다른 누군가에게 이런 증세를 옮길 가능성이 있을까 걱정되는 마음에 집에서 쉬면서 하루를 보냈다.


  아이들도 학교에 간 긴긴 하루, 무엇을 할 지 혼자 동당거리며 고민했다. 깨끗하게 몸을 씻고, 며칠 식은땀을 받아 낸 이불과 시트를 빨래 돌리고, 방을 쓸면서 작년 생일을 돌이켜 보았다.


  하필 수요일이라 클리닉에 가야 했던 날이었고, 하필 차가 고장났던가 해서 버스를 타고 가야 했던 날이었다. 때문에 만원 버스 속 나를 지형 지물처럼 붙드는 아주머니들 틈바구니에서 캑캑거리며 하루를 보낸 날이었다.


  그 날 따라 또 클리닉에 사람이 많아 몰아치듯 시간을 보내고, 또 만원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잠깐 앉는다는 게 그만 바닥에서 뻗어버렸다가 “언니 일어나요, 아니 생일인데 잠만 자면 어떡해” 하는 소리에 잠에서 깬 어리벙벙한 상태로 케이크 촛불을 불고 아이들의 축하를 받았던 기억이 났다. 고단했지만 그야말로 내가 여기서 하는 일에 퐁당 빠져 행복했다고 생각하며 마무리한 하루였다.


  그렇다면 올해는 정말 '나'라는 한 개인으로 있어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꽤 오래 전부터 그렇게 있지 못해, 하루쯤 그렇게 있어보고 싶었다는 것도 기억해 냈다.


빨래터에 서면 내려다 보이는 동네 풍경. 저 멀리엔 어쩐지 인천 부둣가가 펼쳐질 듯한 느낌이 들어 한참 쳐다보고 있던, 나의 쉼터였다.


  이제 슬슬 여름이 느껴지는 햇살이 어찌나 쨍한지, 빨래를 널면서 바라본 동네 전경이 망원경으로 보는 듯 맑고 선명해 빨랫줄에 같이 매달려 우와… 하고 구경을 했다.


  오랜만에 연락 온 친구들의 안부를 묻고, 그 근황에 놀라고, 통화를 하면서 한참 웃었다. 고등학교 때 친구와 옛날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잘도 지나간다.


  아직 체력만큼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탓에 이야기를 하다가 금방 지쳐 “나 이제 잘래”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 이제 잘래, 라고 말할 수 있고 응 그래 쉬어, 라는 대답을 듣는 건 작지만 분명히 행복한 일이었다.


  낮잠을 자려고 누우니 볕에 보송보송 마른 이불이 기분 좋았다. 적당히 낡아 보드라운 면을 손으로 쓸어 보다가 그 이불을 처음 샀던 때도 기억해 냈다. 고3 때였나 엄마가 ‘이제 여름 이불로 바꾸자’ 하면서 새 여름 이불을 사 오셨던 어느 날의 기억. 그 이불이 멀리 인도까지 왔구나. 선물을 받은 듯 기분이 산뜻했던 기억이 마치 유년의 기억처럼 아득하고 몽글몽글했다.


  “오늘은 생일이니까 특별하게 뭘 해야지!” 라는 마음보다는 그냥 작은 하나하나를 누리는 게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며 잠들었다. 잠에서 깼을 때는 또 “언니 일어나, 생일인데 잠만 자면 어떡해요” 였다.


  작년과 사람은 다른데 어쩐지 같은 대사. 그 우연에 배시시 웃으며 내려갔을 때는 또 아이들이 마음 담아 축하를 해 주었다. 항상 우리 집에서는 생일을 맞은 사람을 앉혀 놓고 그 사람의 좋은 점들을 칭찬해 주는데, 아이들 한 명 한 명이 해주는 이야기들이 다 감동이었다.


  케이크 촛불을 불고, 축하 카드를 받고, 하는데 마음에서 행복이 물고기처럼 선명하게 마구 튀어 올랐다. 이렇게 행복하다니! 오늘 하루 나 혼자 나 개인으로 존재하면서 무척 행복했는데, 함께하는 행복은 그와 비교가 되지 않는 행복이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나라는 한 개인으로, 혼자서도 매우 행복하지만, 지금의 나는 써니디디로서 더 행복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구나. 그 깨달음이 나에게 주어진 가장 큰 생일 선물이었다. 앞으로의 시간을 더 행복하게, 더 감사하게 보낼 수 있게 해 주는 마법의 한 마디니까.


  지금 내가 처한 이 상황이 무언가 포기하고 결연하게 맞서는 시간이 아니라, 지금 내가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는 사실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이 정도면 동화책의 맺음 문장만큼이나 선명하고 아름답지 않을까? Happily, ever after.


고맙고도 귀여운 아이의 사랑. 하루 사이에 풍선이 작아질 것을 예상치 못했는지 풍선을 꺼내 내밀며 나만큼이나 놀란 그 표정이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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