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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Aug 28. 2022

빛이 비치는 자리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기획기사] 영화 <오마주> 리뷰

감독] 신수원
출연] 이정은, 권해효, 탕준상, 김호정
시놉시스] 지완은 갱년기에 접어든 여자 감독이다. 어렵게 만든 세 번째 영화마저 실패한 후 실의에 잠겨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영상자료원으로부터 60년대 여자 감독이 만든 영화의 복원 작업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그 작업을 통해 지완은 60년대에 활동했던 영화인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그들의 삶을 통해 그녀에게 영화란 그리고 인생이란 무엇인가 돌이켜보게 된다.



보이지 않던 것들
 
어렸을 때 나는 <빨간 머리 앤> 못지않게 거창한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 사람이었다. 어른들이 놀라며 “그런 말도 알아?” 할 때마다 민망해지는 느낌이 싫었다. 나중에 어른 되면 난 절대 애들이 어떤 단어를 써도 놀라거나 주목하지 말아야지. 그 다짐은 잊지 않았지만, 그런 말을 안 하는 어른이 되지는 못했다. 대신 당시 어렴풋하게만 느꼈던, 아직 몇 년 안 산 작은 사람의 어휘력을 칭찬하려는 어른들의 마음만 더 잘 알게 되었다.


이십대 시절에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눈을 반짝이게 만드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 상대가 “나도 너 나이 땐 그랬어.”라는 말로 응수하면 그렇게 듣기가 싫었다. 상대와 나는 나이 차가 10살을 넘지 않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더욱 그랬다. 뭔 팔십 먹은 사람처럼 말하고 있어, 자기도 아직 젊으면서. 나는 나중에 그러지 말아야지 또 다짐했다. 그 다짐 또한 잊지 않았지만, ‘나도 그랬지…’하는 씁쓸하고 그리운 감정이 가끔 불쑥 올라온다. (그래도 말은 억지로 삼킨다.) 내 사기를 깎으려는 게 아니라, 나는 안중에도 없이 그냥 자기들의 호시절을 그리워했던 거구나. 지난날의 그들을 이해하고 있다.


그 시절의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하나씩 보이면서, 나중에 어떤 중년과 노년을 살아가게 될지 궁금해졌다. 나는 커서 무엇이 될까 궁금했던 어린 시절처럼 두근거린다. 벌써 느끼기 시작한 ‘나도 그랬지…’의 씁쓸하고 그리운 감정만으로 채우고 싶지 않은 그 긴긴 날들에 무엇을 채워 넣게 될까? 참고할 만한 이야기를 찾아 주변을 돌아보니, 중년과 노년 여성의 서사가 놀랍도록 적고 납작했다. 그러나 점차 같은 문제의식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할머니’를 다룬 소설도 늘어나고, 다양한 중년 여성과 노년 여성들의 이야기가 점점 우리에게 많이 와주고 있다.



그중에서도 이제 중년을 넘어가는 여성 ‘지완’(이정은 분)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오마주>를 보면서 힘을 많이 얻었다. 얼핏 보면 신수원 감독 본인의 이야기가 많이 녹아 있는, ‘1명’의 이야기 같지만, 뚜껑을 열어 보면 그 안에는 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외로워도 아파도 설령 지워진다 해도

지완은 소위 ‘독립영화’ 혹은 ‘예술영화’로 분류되는, 그러니까 천만 영화가 될 확률이 높지 않은 영화 세 편을 연달아 만들었다. 사실 ‘지워지지’ 않고 감독으로서 꾸준히 영화 세 편을 내놓는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프로듀서와 단 둘이 어두운 극장에 앉아서, 이 상영관에서도 곧 내리겠지 생각하는 일은 즐겁지 않다.


그나마 함께 있던 프로듀서 동료조차 영화를 그만둘 것이라 하고, 지완이 영화를 따르는 삶에 불만이 많았던 남편과 아들 또한 지완이 영화보다는 돈 되는 일이나 가사노동을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드러낸다. 이럴 때일수록 힘 있게 작업에 매진하면서 자기 확신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잘 쓰던 ‘되’와 ‘돼’가 헷갈릴 만큼 시나리오 작업도 쭉쭉 나가주질 않는다.



착잡한 지완에게 영상자료원 측에서 영화 복원 의뢰가 들어온다. 홍재원 감독의 <여판사> 복원을 위해 백방으로 뛰면서, 지완은 당시 여성 영화인들을 돌아보게 된다. 두 번째 여성 감독이자 이 영화 속 ‘홍재원’ 감독의 모티프가 된 홍은원 감독뿐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감독이자 아이를 업고 현장을 지휘했다는 일화로 유명한 박남옥 감독, 영화 <오마주>에도 변주되어 등장하는 여성 편집 기사 김영희까지.



어느새 이 일은 단순한 영상 복원 그 이상의 의미를 띠게 된다. 지금보다 훨씬 견고했던 당대의 유리 천장에 균열을 내며 길을 텄던 여성 선배들의 단단한 등을 바라보는 일은, 지완뿐 아니라 그 뒤에 영화를 사랑하는 모든 여성들, 남들이 모두 안된다고 하는 꿈에 가슴 시려 본 모든 사람들을 몰입하게 만든다.


선글라스와 코트로 멋지게 선 모습도, 외로움과 막막함을 토로하는 모습도 모두 그들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성공을 거두고 당당하게 씩 웃는 젊은 날의 모습만이 아니다. 중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가도, 외롭고 아프고 잊혀도, 그들의 모습이다. 꿈꾸다 사라진 사람들, 사라져도 꿈꾸는 사람들, 어쩐지 눈물 날 듯 아름답다.



그림자를 더듬는 작업

필름은 기본적으로 빛과 그림자의 작업이다. 그러나 때로는 그림자이기만 한 것 같다고 느껴지는 날들이 있다. 이 영화 속 지완이 자주 그랬듯이. 영화 속 홍재원 감독이 쓰던 편지 내용 같이. 가끔 쓸쓸하고 겁도 덜컥 날 때가 있다. 생각해 보면 꼭 필름만, 영화만 그런 일은 아닌 것 같다. 관성적으로 하다가도 문득, 이게 맞나 돌아보게 되고. 나이 듦이란 것도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영화를 만들고 복원하는 일이 늘 외롭고 쓸쓸하기만 한, 혹은 아름답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일들처럼 이 또한 당사자에게는 관성적으로 일하는 날이 훨씬 더 많겠지. 하지만 긴긴 ‘일의 시간’ 위에 이따금 외로움과 회의감이 찾아오는 날을 아주 피할 수 없다면, 그 일의 아름다운 면을 기억하는 것 또한 필요하지 않을까? 더 오래 달리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듯이.


그러니 이따금 외로워 보이는 그림자의 자리야말로 곧 빛이 있는 자리임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 빛이 어디서 왔는지를 생각한다. 영화 속에 종종 구둣발 소리와 함께 등장하는 여성의 그림자는 어디에서 왔는가? 이런 생각들이 뭉쳐, 지완의 티셔츠 프린팅이나 아들이 써낸 엽서처럼 일상적인 곳에 은은하게 묻어날 것이다.



홍은원 감독과 1세대 여성 영화인들에 대한 ‘오마주(hommage, 감사와 존경)’가 묻어 있는 이 작품에, 신수원 감독과 다른 여성 영화인 더 나아가 꿈꾸고 일하는 수많은 여성들에 대한 ‘오마주’를 담는 사람이 또 얼마나 많을까? 때로는 외롭고 때로는 아름다운 각자의 길에서 서로의 등을 보며 나아갈 수 있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바로 이 자리가 빛이 비치는 자리라고.




서울국제여성영화제
 2022. 08. 25 ~ 2022. 09. 01
 
 <오마주> 상영 시간표
 2022. 08. 27. 10:30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5관
 2022. 08. 29. 20:00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1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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