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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Dec 30. 2022

마침내 우리가 만날 때

영화 <3000년의 기다림> 리뷰 (조지 밀러 감독)

  오래 품은 소원에는 힘이 있다. 흩어지지도 해지지도 않고, 모양을 오래도록 유지했다는 그 자체로. 그 끝에 이루어진 소원은 거의 성공 신화가 된다.


  그만큼 쉽지 않으니까. 소원이라는 단어는 얼핏 강해 보이지만 현실이 되기 전까지는 흐릿한 안개 같다. 흐지부지 밀려나기도 하고, 세파에 깨지기도 하고, 문득 스스로 폐기할 수도 있다. 오래 품은 소원을 이룬다는 것은 뚝심과 에너지, 자기 확신은 물론 행운까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이룬 이야기에는 거의 마법에 준하는 힘이 있다. 무심코 떠오른 강렬한 생각 하나를 한참 바라본 끝에 확장한 소설 <작은 땅의 야수들>처럼, 남들에게 인정받는 과정을 거쳐야 했지만 끝내 꿈꾸던 장면을 만들어낸 영화 <라라랜드>처럼.


  그런데 <매드 맥스> 시리즈로 이미 반열에 오른 조지 밀러 감독에게도 그런 숙성의 시간이 필요했나 보다. 20년 전 읽은 단편소설을 토대로 빚은 영화를 마침내 가지고 왔는데, 공교롭게도 소원을 소재로 한 이야기다.


  세상 모든 이야기를 섭렵한 서사학자 알리테아(틸다 스윈튼)가 학술 대회 차 방문한 튀르키예에서 기념품으로 작은 병을 구입한다. 그런데 별안간 병에서 지니가 튀어나오고, 세 가지 소원을 묻는다. 알리테아는 이런 이야기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안다며 거절하려 하지만, 지니는 알리테아를 설득하기 위해 자신이 세 번이나 병에 갇히게 되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건 환상일까 진실일까? 이야기는 크게 지니의 이야기 세 편과, 알레티아의 세 가지 소원 두 가지 축으로 굴러간다고 볼 수 있다.



과학이 이야기를 만날 때


  영화는 튀르키예로 이동하는 비행기 안의 알리테아에서 시작한다. 오래전 이야기들처럼 ‘옛날 옛적에…’ 식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데, 무미건조한 현대 사회 풍경을 묘사하는 문장들에 전혀 다른 색을 입혀, 마치 다른 시공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공항에서 내려 발걸음을 옮기는 알리테아를 봐도, 온통 무채색 옷을 입은 사람 중 유일하게 다른 색깔 옷을 입은 사람이다.


  서사학자로 학회 발표 자리에 선 알리테아는 정작 이야기가 이야기일 뿐이라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데, 일상의 태도를 보면 사실은 이야기 그 자체인 사람이라 물건을 고르는 기준조차 세간의 가치보다는 이야기가 묻어나는 지 여부를 본다. 빈티지 물건들이 다시 사랑받는 세상, 알리테아와 같은 이들은 여전히 꽤 많아 보인다. 이 영화는 그런 사람들이 좋아할 영화다. 작은 물건 하나에 깃든 이야기로 기뻐하는.


  그런 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장소가 튀르키예인 점은 매우 적절하다. 행정 수도로 기획된 도시 앙카라 말고, 천년 고도 이스탄불이어야 한다. 오래된 도시에는 골목마다 이야기가 숨어 있으니까. 벽면에도, 발코니에도, 옛 연인의 단꿈이나 누군가의 한숨, 피, 배신, 눈물 같은 것들이 속속들이 배어 있으니까.


  더없이 적절한 풍경에서 알리테아와 지니는 만나고,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이야기에 의존해 영화는 진행된다. 지니의 이야기 속에는 다양한 시대가 등장한다. 시바 여왕의 시대, 오스만 제국의 시대, 제피르라는 여자가 살았던 중동의 어느 시공간까지. 각 시대는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뒤섞어 매끄럽게 연출되어 있어, 눈과 귀에 화려하게 감긴다.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아야 하는 이유다)


  실제 역사에 마법이 존재하던 시대 같은 것은 없지만, 그저 꿈에 불과하지만, 지니의 이야기 속 세계는 마치 "옛날 먼 옛날 어딘가"에는 마법이 존재했을 것만 같아 보인다. 생각해 보면 이야기란 원래 존재였다. 아직 식량 생산이 충분하지 않고 전쟁과 기아가 코앞에 있던 그 옛날에도 사람들은 황금빛 이야기를 통해 괴로움과 척박함 속에서 살아 버텼을 것이다. 병 속의 지니처럼.



  불안한 미지의 세계에서 이야기는 우리가 가진 유일한 힘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은 이야기를 했다. 그렇다면 과학이 발달한 지금, 과학은 이야기를 대체했는가? 어떤 설명은 과학에게 자리를 내주었겠지만, 여전히 이야기는 나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자기 이야기는 별로 없다는 알리테아에게 지니는 정색하고 말한다. It’s always a story. 우리의 삶은 언제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어떻게 써내려 가고 어떤 식으로 편집할지 차이가 있을 뿐, 이야기가 아닐 수는 없다. 삶의 이야기, 그것은 과학이 대체할 수 없는 이야기의 영역이다.


  애당초 이야기와 과학은 서로 배척하는 단어가 아니라 연결된 별개의 무언가이다. 지니의 이야기 속 제피르를 보아도, 최초의 영화와 상당히 닮은 것을 만들어냈다. 이야기와 과학이 만나는 지점에 영화도 있고 인간도 있는 것이다.



인간이 이야기를 만날 때


  알리테아는 자기 이야기를 쓰기보다는 수많은 이야기를 읽고 파악하고, 요약하고 정리하여 갈래로 기억하는 사람이다. 떠나버린 사람의 기억은 상자 하나에 말끔하게 담아 넣고, 상처로 기억되는 순간들도 담담하게 축소해서 기술한다.


  반면 이야기를 풍성하게 풀어내는 지니는 상대적으로 더 인간 같다. 소원을 들어주는 정령이라 하나, 전지전능한 존재는 아니다. 더 강한 존재에게 붙잡히기도 하고, 미래도 모른다. 한 치 앞도 모르고 갈망하는 존재, 그것이 인간다운 것임을 깨닫게 한다.


  바로 이 지점에 이야기의 매력이 있다. 사실 세 가지 소원에 대한 이야기는 알리테아가 말하듯 흔한 장르다. 우리도 어릴 때부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도 이토록 오래된 이야기가 여전히 흡입력을 갖는 이유는 거기에 갈망이 있기 때문이다.


  세 가지 소원이란 결국 마음이 진정으로 갈망하는 게 무엇인지 깊이 들여다보아야만 알 수 있는 질문이다. 한 가지도 아니고 세 가지라는 점에서 더욱 세밀하게 속내를 드러낸다. 위험을 느끼면서도 끝내 손을 뻗게 만드는 것, 그 손끝에 무엇이 닿을지 집중하고 보게 되는 것. 마음이 편하기보다 외줄 타기를 바라보는 것처럼 위태롭다. 어쩌면 괴로울 수도 있을 것이다.



  이야기를 사랑하지니 또한 이야기를 괴로워한다. "희망은 괴물 같고, 이야기는 희망의 노리개"라는 그의 대사에서, 우리의  괴로운 갈망 끝에 무엇이 있는지 보인다. 이야기는, 이야기를 통해 인간은 끝내 희망을 찾아 헤매  것이었다.


  절망의 중심을 직시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희망의 한 갈래 길을 찾는 것. 이야기는 이야기를 믿는 인간에게만 그렇게 존재한다. 그냥 인간이 그렇다. 인정 없이는, 사랑 없이는, 대화 없이는, 그래서 그것들로 희망을 바라보지 않고서는 이 어둠을 헤치고 살아갈 길을 알지 못한다. 힘들어 죽겠는데 한 번 더 무릎을 펴게 만드는 것이 "괴물 같"은 희망. 포기할 수도 나아갈 수도 없는 지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는 것. 이야기는 그래서 존재한다.


  이 점은 현대 사회가 이야기로부터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 깨닫게 한다. 이야기조차 그저 지식의 파편으로 간주하며, 재산화되어야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는 세상. 이야기는 갈망의 산지가 아니라 무수한 심심풀이 도구 중 하나로 간주되어 간다. 화려한 보석 같던 이야기들이 이제는 굴러다니는 돌이 된다.


  현대 사회는 이야기의 찬란한 빛이 많이 감춰진 시대다. 사람들은 “콘텐츠를 소비”하지 “이야기를 듣”거나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지 않는다. 괴로워도 희망을 향하기보다, 그저 아는 절망을 늘어놓으며 절망을 절망의 핑계로 삼는 게으른 창작도 "콘텐츠"로 훌륭하게 기능하는 시대가 되었다. 지식과 이야기의 의미는 변한다.


 옛날 같았다면 환영받았을, 이야기가 풍요로운 땅에서 온 이들은 불청객 취급을 받고 있다. 알리테아가 사는 런던의 길거리에도 터번을 쓴 남자와 차도르를 두른 여자가 돌아다니는 세상인데, 알리테아의 이웃집 할머니들은 자기네 문화권이 아닌 이야기를 찾아 다닌다며 알리테아를 못마땅해 한다. 이들은 모른다. 자신들의 조상이 게으르게 그려낸 이야기가 그들의 절망에 기여했다는 걸. 아니었다면 그들은 지금쯤 전혀 다른 이야기를 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만날 때


그러나 이 척박해 보이는 시대에도 시간을 들이고 공을 들여, 여전히 이야기를 들이마시는 사람들이 있다.


  이야기로 의미를 찾고 위로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 삶의 어떤 부재 가운데서도 그 위로를 찾아 버틸 수 있는 사람. 이를 위해 이야기 끝을 뾰족하게 다듬고 섬세하게 방향을 잡는 사람. 괴로워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 심지어 이야기를 사랑하다 못해 이야기의 일부가 되고 마는 사람들이 있다. 가끔은 광인처럼 보일 수도 있다.


  알리테아의 이야기도 그렇다. 사실 모든 이야기는 진실인 동시에 광기이다.



  그래서일까. 이야기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본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존재처럼 방황한다 해도, 언젠가 어떤 이야기와 반드시 공명할 것이다. 그 이야기를 통해 마주친 누군가의 눈이 반드시 알아볼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살아 버텨야 한다. 극장의 어둠 속에서 기꺼이 기립근에 힘을 주고 끝도 없이 영화를 보며, 나의 영혼에 다정하게 공명할 이야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마침내 만날 것이다. 그리고 말하겠지. “And yet here you are, my Impossible.”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초청받아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영화의 개봉일은 2023년 1월 4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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