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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May 15. 2024

아무튼 피어날 것은 피어난다

영화 <디피컬트> 리뷰

SYNOPSIS.

대출과 빚에 허덕이는 ‘브루노’와 ‘알베르’ TV 중고거래에서 우연히 만난 둘은 공짜 맥주와 감자칩에 이끌려 얼떨결에 환경 운동에 동참하고, 지구 온난화를 막기 위해 블랙 프라이데이에 반대하는 ‘캑터스’를 만나 환경 운동에 점점 진심이 되어가는데… 살기는 어렵지만 사랑은 하고 싶은 두 남자와 환경 문제 외에는 모든 것이 무감각한 여자까지… 갓생을 꿈꾸는 파리지앵 3인의 동상이몽 라이프가 시작된다!


POINT.

✔️ 프랑스 영화는 난해하다는 인식을 깨고 한국에서도 흥행했던 <언터처블: 1%의 우정> 감독 작품이에요

✔️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사랑받은 <알로 슈티>처럼 가볍고 유쾌하게 볼 수 있는 코미디 영화예요

✔️ 팬데믹과 기후위기 속에서 젊은 세대가 느끼는 감각을 전제로 한 작품이라서 흥미로워요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노에미 멜랑 주연! 마티유 아말릭 등 우리에게 익숙한 배우 얼굴들도 반가워요



  계절을 따라 부지런히 옷장 정리를 하다가 한숨이 나온다. 아직 멀쩡하다 못해 새 옷에 가까운 상태이지만 여태까지 손이 잘 가지 않았고 앞으로도 입을 것 같지 않은 옷부터, 마르고 닳도록 입었긴 해도 버리긴 애매한 옷까지... 버릴 것이냐 말 것이냐, 늘 고민하는 동안에도 옷장에는 새 옷이 들어오고, 더 이상은 공간이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결국 큰맘먹고 옷을 덜어냈다. 그리고 이제 당분간 옷을 사지 않기로 결심한다. 내 돈 주고 산 옷이 나에게 짐이 되는 게 싫다. 그러는 동안 밖에는 종일 그치지도 않고 장마 같은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강원도 어디에는 눈이 왔다고 한다. 지금 5월인데요.


  우리가 이런 시대를 산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텀블러를 쓰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말이 단톡방에서 대놓고 부정 당하던 시절이 있었다. 천 번을 써야 한다는둥 그건 의미가 없다는둥... 나는 더 이상 그 단톡방에서 말을 하지 않는다. 텀블러에 대한 의견 차이가 아니라 타인에 대한 예의 차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기후위기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이제 몇 남지 않은 것 같지만, 그럼에도 개인의 민감도 차이는 분명 존재하고, 거기에 타인에 대한 예의를 갖추기엔 너무 바쁘고 지치고 화가 나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가 이런 시대를 산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그런 우리 삶과 닮은 현실을 산다. 그래서 이 영화는 흥미롭다. 기후위기라는 단어를 몰랐던 시절의 로맨스처럼 부요한 재정 상태나 환경 상황을 자랑할 수 없는, 낭비할 거라곤 없고 그래서 휘청거려도 기댈 데 없는 세대를 담고 있어서.



  심지어 이 영화의 주축을 이루는 브루노와 알베르는 소액 대출을 계속하다가 파산에 이르른 사람들이다. 공짜 맥주를 따라가다 보니 환경 단체 사람들을 만났고, 지금껏 그래왔듯 어영부영 돌려막기 하는 태도로 이들의 활동에 합류한다. 닉네임제로 운영되는 환경 단체 규칙에 따라 '캑터스(Cactus, 선인장)'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여자를 보며 점차로 환경 운동에 진심이 되어가는데, 앞날은 여전히 캄캄하다. 브루노도 알베르도 각자의 행복을 찾아갈 수 있을지 궁금해 하며 이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캄캄하고 답답한 상황임에도 어쩐지 실 없이 웃게 된다.



올해도 힘든 한 해가 될 거예요

  사실 이 영화의 원제는 '힘든 한 해 une année difficile'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우리가 익히 아는 프랑스의 대통령과 고위 정치인들이 나와서 "올해도 힘든 한 해가 될 것입니다" 같은 문장들을 말하는 장면들이 모여 나오는데 이 오프닝 시퀀스가 상당히 인상 깊었다. 모든 시대에는 그 시기의 어려움이 있고, 모든 세대는 각자의 어려움을 돌파하며 살아가야 한다. 캑터스와 친구들은 그 문제를 환경 문제로 정의했고, 그에 따라 스크럼을 짜고 구호를 외치며 시대에 맞선다. 


  이들에게는 낭비할 자원도, 기댈 환경도 없다. 그렇기에 과격해진다. 환경 문제보다 부동산과 주식이 더 중요한 한국의 기성세대에게는 믿고 싶지 않겠지만, 전세계적으로 청년과 청소년들은 이 불만을 말하고 있다. 신자유구의 구조에서 빈부격차는 점점 빅토리아 시대의 그것에 가까워지고 있어 청년 세대는 점차 가난해지고 있으며 (이 부분은 한국 사회에서도 대체로 동의하는 것 같지만), 환경적으로도 기댈 곳 없이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소리만 듣고 있기 때문이다.


  기후위기 앞에서 목소리를 냈지만 들리지 않아 더 이상 말할 수 없다며 입을 꿰매고, 환경 문제의 시급성을 가장 큰 소리로 외치기 위해 미술품을 파괴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영화 속 환경단체 사람들도 가게를 막고, 차량 통행을 막고, 심지어는 비행기 출발까지도 막는다.



  이들에 대한 관객의 반응 차이가 흥미로운데, 현실에서의 환경 단체를 바라보는 시각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을 폭도처럼 묘사하거나 오히려 이들 때문에 반감이 생긴다며 어깃장을 놓는 사람들이 있다. 너희 때문에 더더욱 채식하기 싫어. 식물은 안 불쌍하니? 같은 사람들 말이다. 골프장의 환경 오염을 지적 당하기는 싫어하면서, 환경 단체 사람들의 행동은 하나씩 문제 삼는 사람들.


  하지만 이 영화 속 마티유 아말릭이 분한 캐릭터를 보라. 그는 은행에서 일하는 기성세대이자, 파산 위기에 놓인 젊은이들을 위해 봉사활동까지 하는 훌륭한 어른이지만, 동시에 카지노 출입에 미련을 못 버리는 사람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다 조금씩 모자란 채로 산다. 그것을 청년 세대만의 문제로 취급하거나, 환경에 관심 있는 사람들만의 유난으로 치부하는 자세는 별로 어른스럽지 못하다. 물론... 이 영화 속 청년들도 무분별한 소비를 그만두고 좀 미래 지향적인 재정 계획이 필요하긴 하겠지만, 그게 꼭 골프장 부동산 주식으로만 귀결되는 모양새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차피 우리 모두가 동일한 가치를 지향할 수는 없으니 그렇다면 조롱이라도 하지 않았으면. 바로 그런 자세들이 가뜩이나 힘든 올 한 해를 더 힘들게 해요...


  올해도 힘든 한 해가 될 거라는 오프닝 시퀀스는, 역시나 2024년에도 들어맞는다. 우리 시대가 유독 힘들게 느껴지는 것은 내가 지금 세대이기 때문이다. 지나고 나서 보면 과거의 '힘든 한 해'는 다 지나간 것들이기에 단순해 보인다. 1920년대는 독립운동이었겠지. 1970년대에는 민주화였겠지. 하지만 당대에도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았을 것이다. 독립운동 하에 치열하게 갈라졌을 생각을, 민주화와 경제화 앞에서 각양각색으로 펼쳐진 담론들과 그 안의 우선순위 다툼들. 지금도 마찬가지다. 환경이 먼저냐, 경제가 먼저냐. 어려움조차 각자의 몫으로 흩어져 버린 것 같은 절망적인 한 해, 역시나 올해도 힘든 한 해다.



하지만 유쾌하게 해나갈 수 있지

  세상 모든 단체처럼 이들이 활동하는 환경 단체 안에서도 다양한 다이나믹이 펼쳐진다. 물론 환경을 위한 활동을 펼친다는 점은 다름이 없지만, 환경 외의 모든 것에 무감한 채 앞만 보고 달려나가는 캑터스와 달리, 브루노와 알베르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 안에서 다른 감정들이 동기로 작용하기도 하고 결정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건 지극히 자연스럽다. "OO에서 만나서 결혼하게 됐어요"라고 말하며 웃는 커플들 모두 그런 시간을 거쳤을 것이다.


  이들이 주고받는 사랑 또한 여느 영화와는 다르다. 장미꽃과 안개꽃 뒤섞인 90년대 테이블 위의 로맨틱한 식사도 없는, 고급스러운 명품 선물도 없는 만남. 단지 스스로가 살기 위한 구호를 외치며 만나고, 스스로가 좀더 부끄럽지 않게 살기 위해 선물 하나를 고르거나 받을 때에도 신중하다. 자연스럽게 삶에 녹아든 구호들은, 가끔은 아주 비장하지만 또 매일 묵직하지만은 않다. 이들의 사랑도 이들이 외치는 구호도 삶에 그렇게 녹아든다. 투쟁과 경각심, 기후 우울의 세대이자 가난과 채무의 세대인 이들은, 그렇게 삶에 유쾌한 순간들을 녹여낸다.



  동시에 이 영화는 사랑의 작대기에만 집중하지도 않는다. 동병상련 브루노와 알베르의 적당하고 느슨한 협력, 얼레벌레 상황을 타개해 나가는 모습. 전형적인 끈끈한 우정과는 거리가 있지만, 원래 우정이라는 게 그렇게 얼레벌레 쌓이는 경우가 더 많지 않나. 이따금 알지 못했던 서로의 모습을 보고 시원하게 깔깔 웃어버리기도 하고, 영웅 서사 같은 일을 겪기도 하면서, 이들은 하루씩 나아간다. 남들과 다른 감각으로, 그러나 각자의 방식으로 아름답게.


  그 즐거운 모습을 보다 보면 짙은 기후우울이 조금 달아나는 기분이다. 그치. 내일이 없는 삶 같은 기분이 들지만, 오늘을 차곡차곡 이어가는 거지. 비록 낭비할 낭만도 기댈 환경도 없이, 혼란스럽게 흔들리는 빈곤한 세대이지만. 이들의 투쟁이 아무리 불안하게 휘청거리는 것처럼 보여도, 이들의 선택이 아무리 빈곤한 것처럼 보여도, 화낼 필요 없다. 아무튼 피어날 것들은 피어난다. 마음도, 사랑도 우정도, 그 안에서 내일도.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하여 시사회에 참석해 감상한 후 작성하였습니다. 영화 개봉은 5월 15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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