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프렌치 수프> 리뷰
SYNOPSIS.
20년간 최고의 요리를 함께 탄생시킨 외제니와 도댕. 그들의 요리 안에는 서로에 대한 존경과 배려, 그리고 사랑이 있다. 인생의 가을에 다다른 두 사람, 한여름과 자유를 사랑하는 외제니는 도댕의 청혼을 거절하고 도댕은 오직 그녀만을 위한 요리를 만들기 시작한다.
POINT.
✔️ <그린 파파야 향기>로 칸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한 신인이었던 트란 안 훙(사실 발음은 쩐안훙에 가까워요..) 감독이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게 한 그 작품.
✔️ 다시 말해... 타협 없이 담아낸 영상미가 보장되는 작품!
✔️ 줄리엣 비노쉬 & 브누아 마지멜 두 주연배우는 실제 부부였던 사이. 이별하고 2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서로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안고 이 영화에 출연했다고 해요. 뭐랄까 오래 끓인 국물 같은 느낌입니다. 프리마(?) 풀어서는 흉내낼 수 없는.
✔️ 영상미를 부정할 수 없지만 전 사실 이 영화에서 영상보다도 대사들이 유독 아름답게 느껴졌어요. 빛 고운 영상 안에서, 아름다운 관계를 고스란히 녹인 대사들이 풀어집니다. 정말 아름다운 영화.
'진짜' 요리로 보여준 것
이 영화는 밭에서 야채를 고르고 다듬는 외제니의 모습을 비추는 것으로 시작한다. 시작부터 선포하는 셈이다. 이 영화의 요리는 진짜일 것이라고. 얼기설기 흉내만 내는 것이 아니라, 정말 시작부터 끝까지 깊이 보여줄 거라고.
촬영에 최적화하기 위해 가짜 음식을 적당히 섞어 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 영화는 진짜 요리들을 활용해 담아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요리가 '진짜'라고 느껴진 건 그 때문만이 아니다. 현장의 배우들이야 눈앞의 요리가 진짜인지 아닌지가 생생하고 중요하겠지만, 사실 촬영을 위해서라면 꼭 진짜 요리가 베스트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시간이 가면서 변형되고 빛이 바뀌는 진짜 요리에 비해 어쩌면 정교한 가짜 요리가 더 나은 선택지일 때도 분명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필요한 그 이상으로 공을 들인다. 마치 요리의 재료를 준비하는 외제니의 손길처럼, 영화 바깥의 요소들이 섬세하게 준비되었다. 우선 미슐랭 3스타 셰프인 피에르 가니에르가 직접 '요리 감독'으로 참여해 음식을 직접 감수했다. (중간에 왕세자 옆의 셰프 역할로 출연도 한다.) 영화에 나오는 모든 음식에 그의 손이 닿았고, 마치 도댕과 외제니처럼, 실제로 오래 함께 일한 동료가 그 작업을 함께 했다. 줄리엣 비노쉬와 브누아 마자엘 사이에 감도는, 한때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은은한 존중 또한 마찬가지다. 이렇게 영화의 '밑작업'들이 영화 속 요리를 통해 표현되는 관계를 더욱 '진짜'로 만든다. 오래 끓인 국물처럼, 입에 톡 튀는 재료 없이도 깊은 맛으로 배어난다.
이 맛이 빛을 발하는 장면이 바로 영화 초반 외제니와 도댕의 요리 장면이다. 아주 긴 시퀀스로 비춰주는, 합이 탁탁 맞는 이 장면은, 아무 말도 없이 두 사람의 관계를 모두 설명한다. 조수 역할을 하는 비올레트와, 비올레트를 따라왔다가 천부적인 재능을 발견하고 요리에 흥미를 느끼는 소녀 폴린까지, 네 사람이 부엌에서 움직이는 장면은 높낮이 없는 협력과 존중 그 자체다. 고기를 굽고, 가재를 데치고, 소스를 끓이고, 야채에서 물기를 짜내고, 무거운 냄비를 나르고... 자신 있게 경쾌하게 움직이는 그 모든 동작에는, 각자의 전문성과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다. 성별과 연령이 지금보다 극명히 갈리던, 20세기 초를 배경으로 한 영화임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정갈하게 섞여 협력하는 주방, 햇빛이 따스하게 들어오는 주방은 아름답기만 하다.
사랑의 계절이 보여준 것
영화 속 도댕과 외제니는 이미 다른 사람이 끼어들 수 없는 둘만의 교감 세계를 완벽하게 구축하고 있지만, 외제니는 도댕의 청혼을 거절한다. 외제니를 위한 요리를 준비하는 도댕과, 그런 도댕을 바라보는 외제니. 두 사람은 이미 서로 사랑하고 있지만, 그 사랑은 가볍게 들뜨거나 설익지 않는다. 요리도 사랑도, 원숙해질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두 사람은 눈빛으로 보여준다.
때로는 과일을 후숙시켜야 하고, 때로는 반죽을 숙성시켜야 하고... 요리를 하면서 두 사람은 적절한 타이밍을 기다리는 법과, 모든 것에 때가 있다는 사실을 잘 배웠다. 사람들을 초대한 테이블에서 도댕이 하는 대사는 그래서 유독 아름답다. 그들은 이미 계절마다 무엇이 찾아오고 또 떠나가는지, 자연이 그들에게 허락하는 것들의 범위를 명확히 알고 있다. 요리도 사랑도 원숙해질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들이 이미 그 계절을 돌고 돌아 원숙해진 사람들임을 떠올린다면, 모든 계절을 함께 축제처럼 즐기고 싶어하는 도댕과, 늘 한여름의 태양 볕을 사랑하고 싶어하는 외제니의 서로 다른 계절관 또한 원숙해진 어떤 지점에서 맞물릴 수밖에 없다. 천진한 첫사랑의 기쁨은 이내 계절을 돌고 돌아 단단해지므로.
외제니는 단어를 신중하게 고르는 사람이고,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며, 나서서 손님을 대접하고 요리를 해체하는 도댕과 달리 주방에서 식재료와 요리를 통해 손님들과 대화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동시에 작열하는 태양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외제니 안에 이미 온 계절이 있다. 온 계절을 사랑하는 도댕과 외제니의 사랑은, 그래서 더욱 풍부하고 깊고 아름답다.
외제니가 있는 부엌은 늘 빛으로 가득하다. 두 사람이 나누어 가졌던 밤과 그렇지 않았던 밤들을 모두 내면에 머금은 채로, 두 사람의 사랑은 아름답게 빛난다. 이토록 아름다운 사랑을 영화에서 본 것도 참 오랜만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홀린 듯이 한참을 바라보고 싶어진다.
결혼에 대한 생각의 차이. 도댕은 외제니에게 청혼을 하고 외제니는 그 청혼을 거절한다. 두 사람의 사랑은 명확함에도. 이런 이야기를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한쪽이 답답한 이야기로만 소비해온 것 같다. 그러나 이 생각의 차이, 그 안에서 느껴지는 각자의 성숙함, 생각의 차이를 빚어낸 것들까지도 존중하는 사랑으로 더욱 아름다워진 관계를 바라본다. 일치하는 생각만이 아름다운 건 아니다. 어쩌면 차이를 이해하고 끌어안는 것이 더 아름다운지도.
예술가의 언어로 보여준 것
영화가 전개되면서, 처음부터 아름다운 협력의 합을 보여준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풍성하게 풀어진다. 두 사람의 사랑뿐 아니라 이해 또한 관객에게 깊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을 보고 있노라면, 예술가로서 서로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깨닫게 된다. 도댕의 말마따나 "하나의 맛이 완성되려면 문화와 기억이" 필요하다. 요리에도 인생에도, 영화에도 예술에도, 배움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도댕과 외제니에게 요리는 사랑이었고 협력이었으며 예술이었고 이해였다. 그 모든 것을 말보다 더 뚜렷한 영상으로 보여준 이 영화는, 그야말로 예술가의 언어였다. <그린 파파야 향기>에서 오래 응시하고 공기까지 느끼게 만들던 그 실력 그대로, 트란 안 훙 감독의 언어는 빛을 발한다. 아름다운 영화였다. 오래오래 끝나지 않았으면 싶은, 시간이 아주 오래 흐른 뒤에도 다시 꺼내 보고 싶은 그런 아름다움이었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초청받아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