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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Jun 24. 2024

모든 걸 바꿔 놓는 사랑의 맛

영화 <1초 앞, 1초 뒤> 리뷰

SYNOPSIS.

늘 남들보다 한발 앞서는 바람에 입시도, 일상생활도, 연애도 쉽지 않은 우체국 청년 ‘하지메’. 남들보다 늘 한발 느린 템포로 사진을 찍으며 느리지만 조용한 삶을 살고 있는 ‘레이카’. 어느 날, 미모의 뮤지션 ‘사쿠라코’를 만난 ‘하지메’는 가까스로 데이트 신청에 성공하지만, 눈을 떠 보니 약속날은 지나가버리고 얼굴까지 새빨갛게 타버린다. 파출소에까지 찾아가 잃어버린 하루를 되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하지메는 우체국에서 매일 우표를 사가던 ‘레이카’가 사라진 하루의 열쇠를 쥐고 있다는 걸 알게 되는데..! 천년 도시 교토에서 살아가는 1초 빠른 남자와 1초 느린 여자. 분실된 하루에는 과연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


POINT.

✔️ 대만 로맨스 영화 <마이 미씽 발렌타인>의 리메이크작. 이 사실을 모르고 보면 리메이크 사실을 눈치채기 어려울 만큼, 일본 교토라는 도시에 들어맞게 로컬라이즈가 잘 되었어요

✔️ <드라이브 마이 카>에 출연한 오카다 마사키, 허광한과 함께 <청춘 18x2 너에게로 이어지는 길>에 출연한 키요하라 카야, <괴물>에서 인상 깊은 연기를 보여준 히이라기 히나타의 출연작. 셋 다 각자의 역할에 위화감 없이 스며드는 연기를 보여줍니다

✔️ 설정이 매우 독특한 로맨스 영화라서, 대체 뭘까 궁금해 하면서 따라가는 맛이 있어요


걸음이 빠른 사람이 사는 도시

이 영화의 남자 주인공은 이름조차 한 일(一) 한 획으로 긋고, 시작이라는 뜻의 '하지메'라고 읽는다. (기본적으로 일본어에서 한자를 읽는 법은 정해져 있고, 그 방식대로라면 한 일(一) 자를 하지메라고 읽지는 않지만, 이름으로 사용될 때는 아무렇게나 읽는다. 얼마나 아무렇게나 읽냐면, 소리 음(音) 자를 쓰고 '멜로디'라고 읽어도 그런가 보다 할 정도.) 그는 언제나 남들보다 한 템포씩 빠르다. 빠르면서 야무졌다면 모르겠는데, 빠른 만큼 엄벙덤벙하다. 앞을 보고 빠르게 걸으면서 사는 사람이고, 잃는 것은 우울한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다. 어머니는 그에게 "진정하고 사람 말을 끝까지 들으라"고 하지만 하지메는 말조차 끝까지 듣지 않는다.


그런데 그는 기이하리만큼 "진정한 교토"에 집착한다. 우리로 치면 사대문 안쪽만이 진정한 서울이라고 말하듯이, 진짜 교토와 교토가 아닌 곳을 딱 잘라 선 그어 나누는 사람이다. 심지어 교토는 한국으로 치면 경주처럼 천년 고도로 꼽히는 도시이기에 이 지점이 더욱 눈에 띈다. 진정하라는 말을 들어야 할 만큼 앞만 보는 사람이지만, 일직선(一)을 그린다는 건 결국 앞과 뒤가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하니까. 아무리 걸음이 빨라도 사람의 걸음은 늘 이전 걸음과 연결되어 있다. 1초 앞의 시간 또한 1초 전의 시간과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다. 라디오에 대고 조곤조곤 자기 마음을 이야기하거나 교토에 관한 노래에 매력을 느끼는 하지메 또한 그런 존재다.



다른 방향에서 보면, 언제나 다른 이야기

하지메가 앞만 보는 동안, 이 영화는 다른 각도에서 시간을 독특하게 뒤틀어서 주인공들을 만나게 한다. 하지메와 달리 이름의 획수만 해도 만만찮은 여자 주인공 '레이카'는 하지메의 반대처럼 보이는 존재다. 늘 한 템포 느리고,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데 그것도 고요한 정물일 때에만 찍을 수 있는 사람.


영화가 흘러가고 하지메와 레이카의 이야기가 풀어지는 방향성은 관객으로서 예측하기 어렵다. (왜 인물들은 저 설명을 납득하는 것일까? 어떻게?) 개연성보다는 톡톡한 창의성에 방점을 둔 설정들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 영화는 관객이 잠시 시간을 멈추고 생각하게 만든다. 시간과 방향을 비틀어 보면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을 가질 수 있음을. 걸음이 느린 사람에게도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훨씬 더 많은 걸 이해할 수 있을 것임을.



그렇게 곰곰 곱씹다 보면 깨닫게 된다. 가끔은 멈춰 버린 시간이 오히려 흐르는 시간의 힘을 갖는다는 걸. 그리고 그 힘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매개체는 사진과 편지라는 걸. 영화 <러브레터>나 <연애사진>에서도 그렇게 쓰였지만, 사진과 편지는 역시나 시간을 담아놓는 아이템이다. 매개체라는 건 뭔가를 전달할 수 있다는 뜻이다. 같은 소재로 전혀 다른 이야기를 얼마든지 풀어낼 수 있는, 그런 소재가 된다.


이 영화 또한 기존에 우리가 알던 사진과 편지 그 이상으로 색다른 이야기를 풀어낸다. 특히 원작 영화에서 성별을 반전시킨 지점이 매우 주효했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멈춰버린 시간을 풀어내는 방식에서 우리로서는 좀 불편하다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성별이 반전된 데다가 오카다 마사키와 키요하라 카야의 톤 조절을 통해, 다소 기괴하게 느껴질 수 있는 부분들이 그럭저럭 중화되었다.



모든 맛을 순식간에 바꿔 놓는 것

하지메는 어머니와 소면을 먹으며, 아버지와의 추억이 서린 생강 이야기를 한다. 이들은 생강을 넣으면 모든 맛이 완전히 바뀌어 버린다고 말하며, "넣지 않는 편이 좋다"고 말한다. 정말 그럴까. 이들은 사실 모든 걸 바꾸는 선택을 꽤나 잘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이들은 사랑 하나가 쏙 들어와 전혀 달라져 버린 삶을 받아들인다. 걸음의 속도가 다른 사람을 기다리며, 오지 않을지도 모를 미래를 기다리며, 소소한 하루하루를 채워 나간다. 열심히 일하고, 여름 밤에 앉아 수박을 먹고, 나란히 앉아 소면을 나누면서 찬찬히 일상을 보낸다.


도시의 시간은 결코 걸음이 빠른 사람들의 시간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경주나 교토처럼 오랜 고도들은 언제나 걸음이 빠른 사람들의 시간 뒤에, 그렇게 찬찬히 일상을 영위한 시간들로 채워졌을 것이다. 먹고, 일하고, 사랑하면서. 누군가에게는 이 영화 또한 인생의 맛을 바꿔 놓는 사랑의 추억일 것이다. 나와 다른 방향에서 이 영화를 볼 누군가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걸음의 속도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더 자주 듣고 싶어진다. 로맨스라는 장르에 이 마음을 웅숭깊게 담아낸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나름의 의미가 있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초청받아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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